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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전화

2010-02-18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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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2.월요일


호빵


 


며칠 전 낮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도 나는 당연하게 밤을 새우며 게임을 했고(이삿짐을 풀다 프린세스 메이커 3 CD를 발견한 기념으로 간만에 프메를 1탄부터 쭉 달렸다. 오늘부턴 대항해시대 2를 할 예정) 그래서 전화가 온 오후 3시쯤엔 마치 한밤중처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잘 자고 있었다. 바깥은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씽씽 불며 몹시 추운 한겨울이었지만 나는 전기장판 온도를 뜨뜻하게 올려놓고 등을 지지며 평화로운 낮잠을 즐긴 것이다. 이거야말로 백수나 누릴 수 있는 한가로운 평일 낮의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전화가 왔다.




내 폰엔 전화 올 일이 거의 없다. 그래서 벨 소리를 딱 한 칸만 켜두고 책상 서랍이나 침대 밑에 대충 놔둔다. 그날도 침대 밑에서 빌빌거리며 벨 소리가 울렸다. 막 잠이 든 참이라 나는 어렵지 않게 눈을 떠서 폰을 집어들었는데, 액정에 표시된 발신자번호는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귀찮아서 받지 말까 받을까 고민을 좀 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무슨 우체국에 택배가 왔느니 마니 하는 사기 전화나 대출을 받으라는 스팸전화일 거라 짐작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예상대로 그 전화는 무슨 보험사인지 어디서인지 온 스팸전화였다. 전화를 건 여성분이 또렷한 발음과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특별한 고객님을 위한 좋은 정보가 있다고 했다. 특별한 고객은 무슨, 그냥 목록 쭉 뽑아서 되는 대로 전화했겠지. 나는 시큰둥하게 예, 하고 대꾸를 하며 폰을 귀에 대고 침대에 누웠다.




여성분의 설명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잠에 반쯤 취한 내 귀에는 속사포 랩보다 더한 빠르기로 말이 술술 흘러가 대체 무슨 좋은 정보를 말해주는지를 알 수 없었다. 좀 미안하긴 하지만 차라리 걍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폰을 접어버리려고 손을 드는 내 귀에 갑자기 여성분의 질문이 던져졌다.




 -###고객님께서는 현재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 그만 얼떨떨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저기, 저는 그냥 놀고 있는데요…….”


“예? 노신다구요?”




폰 너머의 그녀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프로답게 금방 원래의 상냥하고 높은 목소리로 현재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그렇다고, 집에서 놀고 먹고 있다고 비교적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정보는 고맙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가 없으니 이만 전화를 끊겠다고 했다.




나는 한치의 숨김 없이 몹시 솔직했지만, 그녀는 내가 자기에게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녀는 지금껏 ‘솔’이나 ‘라’정도로 말하던 목소리를 ‘도’쯤으로 확 낮추더니, 정말로 직업이 없으시냐고, 알바 정도도 하지 않으시냐고 물었다. 약간 상황이 귀찮게 돌아가는 것 같아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절대로 아무 일도 안 한다고, 말 그대로 놀고 먹는 백수라고 했다. 그러자 급기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음자리까지 내려갔다.




그녀는 나에게 논다는 말을 왜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느냐고, 그 나이에 노는 게 부끄럽지 않느냐고 존댓말과 반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물었다. 어라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 아줌마가 꼭 나한테 시비를 거는 것 같잖아. 나는 깜짝 놀랐으나 분명히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나도 똑같이 시비를 걸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게다가 지금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통화 중이 아닌가. 내 얼굴을 보면서 같은 말을 했다면 나는 한 마리 순한 양처럼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러니 나도 한껏 비꼬아주리라.


 



넌, 오라질년




나는 그녀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내가 노는 게 아줌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고객님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으냐고 점잖게 응수했다. 그녀 또한 지지 않고 나에게 맞섰다. 이젠 고객님도 20대 후반이니까 마냥 놀 나이가 아니지 않으냐, 남들은 그 나이에 벌써 적금을 몇 개씩 넣고 있다, 시집은 안 갈 거냐 등등 상당한 강타를 날렸다. 역시 프로다. 수많은 ‘고객님’과 각종 대화를 해온 프로답게 그녀는 내가 아플법한 곳을 정확히 찍었다. 나는 잔뜩 약이 올랐다. 친척들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얼굴도 모르는 이 아줌마에게 들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내 자존심을 걸고 그녀에게 카운터를 날렸다.




나는 그녀에게 도대체 내 전화번호와 이름, 나이는 어떻게 알았느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내 일갈에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폰을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 그녀에게 가젤펀치, 간장치기, 뎀프시롤 등을 날렸다. 내가 폰을 새로 만든 게 불과 작년 중반인데 어째서 내 폰 번호와 내 이름을 아느냐고, 대체 남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어디서 훔쳐낸 거냐고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자 갑자기 그녀가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내 말을 싹 무시하고 자기 혼자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이자율이 몇 퍼센트니 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여유롭게 전화 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솔’ 높이의 목소리로 내게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고객님, 하고 인사를 남겼다. 통화종료를 알리는 폰 벨 소리는 참으로 상쾌했다.




나는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폰을 다시 침대 밑에 밀어 넣고 잠을 청하려고 하니까 자꾸만 그녀의 말들이 귓가에 뱅글뱅글 돌았다.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이런 기분에 빠져 있으면 정말로 자신이 패배자처럼 느껴진다. 물론 패배자가 맞지만, 아무튼 간에 나는 기분을 바꾸려고 즐거운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평소엔 내가 즐겁다고 생각한 일들- 새벽에 IPTV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라면을 먹거나 남들 일하는 평일에 즐기는 낮잠, 돈이 없어 늘 위시리스트에 넣기만 하는 인터넷쇼핑몰의 예쁜 옷들, 다리를 절지만 애교를 부릴 줄 아는 고양이 같은 게 죄다 패배자의 말로같이 느껴지는 거다. 아 안돼. 점점 더 기분이 추락한다. 이런 걸 노렸다면 아줌마가 이겼다. 애당초 일하는 아줌마에게 백수인 내가 이길리가 없지. 나의 기분은 추락하고 또 추락하다 못해 바닥을 쳤다.




결국 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지금은 IPTV를 틀어놓고 라면을 먹으면서 구인·구직 싸이트를 뒤적대고 있다. 뭐,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찾고 있기는 한데, 문제는 나를 써줄 만한 너그러운 곳이 영 보이질 않는다. 지역도 문제고 차편도 문제고 무엇보다 내 스펙이 문제다. 어쩔 수 없구나. 결론은 또 알바다. 알바라도 해야지 별수 없다. 이 와중에도 라면이 너무나 맛있어서 그게 더 슬프다 어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