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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뒤총 맞는다.”

 

이문열의 소설 새하곡(塞下曲) 중에 나오는 말이다. 3사 출신의 심소위가 병사들에게 악독하게 구는 걸 보면서 동료 장교가 툭 던진 말이다. 

 

(새하곡을 보면, 육사, ROTC, 3사 등등 장교들의 출신별 상황이 잘 묘사돼 있는데, 이 당시 3사 출신의 심소위는 나이와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장교라는 ‘타이틀’로 억누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중에 개머리판으로 제대로 한 번 두들겨 맞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병들이 장교들에 대한 공격과 살해위협을 했다는 기록과 이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들은 넘쳐난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끝까지 싸웠던 영국군. 소위 말하는 레드 코트들은 ‘구타’로 유지되는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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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내 탈영자의 숫자가 전체 부대원의 30%가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언제한번 영국군의 구타와 탈영에 대해 설명하겠는데, 개괄만 말하자면. 당시 영국군은 탈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육, 해군 가리지 않는다. 펍에서 술 마시다 징병관에게 잡혀서 군대로 끌려온 이들이기에 복무에 대한 의지도 없었다. 까놓고 말해 이 당시 군대는,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을 모아놓은 곳.”

 

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당시 유럽의 왕들은 사회에서 쓸 만한 인재들이 군대에 가는 걸 극히 꺼려했다. 이들은 사회에서 생산적인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거였다. 즉, 군대는 죽어도 문제가 없는 이들만 가야한다는 거였다.

 

(젠트리 계층이 다수 입대하게 되면서, 이 ‘배운 분’, ‘가진 분’들이 군대 내 구타문화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면서 젠트리로 편성된 부대에서 구타가 수그러들었다)

 

영국군이 구타에 의존한 건(다른 나라도 별반 다를 건 없었지만) 이 당시의 전투방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때 당시 전투는 길게 늘어선 횡대 대열로 천천히 걸어가 총을 발사하는...소위말하는 라인배틀 방식의 전투였다. 

 

“적의 흰자위가 보이면 그때 방아쇠를 당겨라.”

 

란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기에 각국은 병사들의 제식훈련과 총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군기를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역시 때려야 했다(제 정신으로 총 앞으로 걸어나간다는 건...).

 

이 당시 영국의 최정예 부대라 불렸던 95라이플 연대의 이야기를 다룬 샤프시리즈(리처드 샤프가 주인공이다. 다른 레드코트들이 활강식 머스킷을 쓸 때 이들은 강선이 파여 있는 라이플을 들고 싸웠다. 선형진을 이루지도 않았고, 각개 병사가 은폐 엄폐 후 저격을 했던 부대다)를 보면, 장교 하사관, 병사 가리지 않고 같이 어울려 놀고먹고 마시며(당연히 구타는 금지였다), 부대단합을 유도했는데, 이 소설에도 뒤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교전 중 자신의 옆을 스치고 날아간 탄환을 봤는데, 이건 아군의 라이플이었고, 뒤에서 날아온 탄이었다. 이 때문에 고민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샤프 시리즈뿐만이 아니었다. 영국해군의 이야기를 담은 오브리-머투린 시리즈(국내에는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로 나와 있는데, 여기 등장한 잭 오브리 함장이 주인공으로 나온 소설이 오브리 시리즈다)를 보면, 수병들의 선상반란에 관한 이야기가 꽤 자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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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간부는 사병들의 적”으로 묘사돼 있다. 이게 단순히 창작물에 국한 된 이야기일까? 아니다.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처절했다. 

 

프레깅(Fragging)이란 단어를 들어 본 적 있는가? 

 

미국이 베트남에서 슬슬 발을 빼기 위해 폼을 잡던 1969년부터 미군 사병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졌던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듣기에도 좀 살벌한데...“수류탄으로 소대장을 해치워 버려!!”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말로만 듣던 장교 살인이 공공연하게 횡행하게 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미 상원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상원 자료에 의하면,

 

- 1969년부터 1970년 사이에 살해나 협박용까지 포함하여 미군 부대에서 수류탄 사고가 790회 발생하여 83명의 장교가 목숨을 잃었다.

 

위에 숫자는 총이나 칼은 빼고 온전히 수류탄으로만 죽인 장교숫자였다. 위의 수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겪었던 장교폭력 사건보다 15배나 높은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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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폭력 정도는 어쩌면 애교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이지만, 1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의 각국은 너나 할 거 없이 병사들의 ‘반란’과 ‘폭동’에 속앓이를 해야 했다. 

 

1917년에 이탈리아 군 병사 5만 명이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해 4월에 프랑스군 68개 사단이 전선 배치를 거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이는 당시 프랑스군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는데, 1918년 칼레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51 하이랜드 사단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헌병들을 바다에 내던져 버리는 사태가 터졌고, 이후에는 왕립 포병대의 대대 몇 개가 연대본부를 습격해 부대시설을 불태워 버렸다. 뒤이어 탱크 부대들도 파업(군대가 파업하면 반란이다)에 들어섰다. 

 

전쟁 말기로 갈수록 이 무의미한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고 봐야 할까? 덩달아 장교 폭력, 장교 살인 사건들이 폭증하게 된다. 아니, 장교폭력, 장교 살인이 전조였고, 이게 모여서 반란과 폭동으로 이어진 거다. 

 

군대란 국가의 공인된 폭력이며, 국가의 마지막 힘이다. 

 

국가 최강의 무력을 다루는 조직이기에 그 분위기가 엄격하고, 보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관리되지 않은 폭력은 고삐 풀린 무장집단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거다. 

 

1차원 적으로 ‘자극’을 주고, 이 자극을 쫓아가게 만드는 방법으로만 통제했다간 억눌린 감정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른다는 걸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때 첫 번째로 희생되는 이가 장교다. 사병들과 가장 많이 접촉하는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민란이 터지면, 양반보다 먼저 타켓이 되는 게 ‘마름’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까놓고 말하자면, 소수의 엘리트 코스를 밟는 장교들(육사 출신이거나 군문에 뜻을 둔 이들)을 제외한 다수의 장교와 간부들도 병과 다를 바 없는 ‘징병’ 된 인원들이다. 즉, 사병들과 같이 끌려와서 군 생활을 하는 이들이란 소리다(월급을 좀 더 받고, 대우를 좀 받지만 말이다). 

 

상황과 처지가 달라 관리자와 관리받는 자로 분류됐지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간부에 대한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본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다 뒤져봐도 간부에 대한 불만이 없었던 시절이 없다. 근원적으로 간부는 명령을 하고 관리를 하는 사람이고, 사병들은 이 명령과 관리를 받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명령과 관리는 자기의 목숨과 관계된 것들이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영화 <고지전>처럼 전시 상황에서 여차하면 ‘뒤총’을 먹일 수도 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생존확률이 거의 없는 명령을 내린다면 어떻게 할까? 나라도 고민할 거다. 

 

(괜히, 전시에 명령불복종을 즉결 처형하는 게 아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끌려 온 병사들, 보장 된 대가나 혜택 없이 목숨을 걸라는 상황에서 병사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일까? 이 병사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간부들은 억압적인 통제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 구조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간부와 사병은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게 내 개인적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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