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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과 화장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밖에 사적이거나 공적인 모임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본심과 감정을 감추고 내보이는, 혹은 상대방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자 꾸미는 모든 표정과 말이 우리가 쓰는 가면이다.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페르소나)’는 인격을 뜻하는 영어 ‘personality(퍼스널리티)’의 어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보이는 우리의 외적 인격이 곧 가면인 것이다.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가면을 쓰는 이유다. 실제 어떤 결과를 낳게 되든 그 목적은 약점을 가리는 것, 마음이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마음의 갑옷이랄까. 사람에 따라 갑옷의 생김 또한 제각각이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마음의 갑옷을 입고 있듯, 내 앞에 다른 사람 또한 그렇다는 걸. 

 

화장 또한 가면과 비슷한 면이 있다. 더 아름답게 보이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화장의 첫 단계는 약점을 가리는 것이다. 

 

 

민낯의 희극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TV에 나오는 사람치고 화장을 아예 하지 않고 나오는 이는 없다. 화장을 하지 않는 방송 컨셉이나 민낯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취지가 아니라면, 혹은 우연히 방송에 출연하게 된 화장하지 않은 일반인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는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모든 사람은 화장을 한 얼굴이다. 내가 아는 한, 단 한 사람만 빼고 그렇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故 박지선이 바로 단 한 사람의 예외였다.

 

박지선 시상식 사진.PNG

 

2008년 연말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그는 피부트러블로 화장을 못 해 어색한 맨얼굴로 시상식에 왔다고 말했고, 말을 이어갔다.

 

“20대 여성이 화장을 못 해서 더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20대 개그맨이 분장을 못 해서 더 웃길 수 없다는 것에 슬픔을 느끼는 진정한 개그맨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은 화제가 됐다. 박지선이라는 희극인의 ‘민낯’이 대중에게 각인된 사건이었다. (개콘 봉숭아학당 첫 출연 때 인조털로 된 구레나룻을 붙였다가 고생을 했다고 토크쇼에 출연해 밝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TV에 나오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 민낯이었다. 

 

 

내 눈에 그는 긍정왕이었다 

 

그는 개그 무대에서 주로 못생긴 여자 역할을 맡았다. KBS 공채 개그맨이 되고 나서 만난 선배 개그맨 정종철과 오지헌, 박휘순이 박지선을 보고 “너구나! 올해는 너구나!” 했단다. 신봉선은 “얘가 나 이겼잖아. 나 이제 뭐 먹고 살아”라고 하며 부러워했다고. 모두 박지선 스스로 청춘 페스티벌 강연 중에 공개한 일화다. 

 

자기 얼굴을 개그 집단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을 보며 자존감이 올라갔다는 말도 덧붙였다. 청춘 페스티벌 강연에서 “나 자신조차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날 사랑해 주겠어요? 여러분도 그러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박지선의 손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양산이 들려 있었다. 

 

청춘페스티벌.PNG

 

내 눈에 비친 코미디언 박지선은 긍정왕이었다. 흔히들 ‘긍정적 마음가짐’이라 하면 좋지 않은 것을 의도적으로 좋게 보고, 좋게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긍정의 사전적 의미는 ‘그러하다고 생각하여 옳다고 인정함’이다. 좋지 않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옳게 인정하는 마음이 긍정이다. EBS의 <지식채널e> ‘사랑해 지선아’ 편에 소개된“다시 태어나면 저로 태어나고 싶어요”라는 그의 말이 바로 긍정의 언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여배우가 그런 말을 해도 긍정적이라고 치켜세울 거냐고. 박지선을 긍정적인 사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본보기로 만드는 것 자체가 ‘못생겼음에도 불구하고’라는 전제를 깔고 보기 때문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박지선은 못생긴 여자 역할이 꽤나 잘 어울리는 개그맨이었다. 분장도 없이 그런 역할을 잘 소화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으니 많은 사람들 눈에 그는 정말로 못생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내 모습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내가 보는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일단 나부터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남을 웃길 수 있다는 게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조금 달라 보였다. 남들이야 뭐라건 말건, 자신을 보며 웃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행복을 좇았던 그에게 타인의 잣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없어 보였다. 

 

그러므로 그는 ‘못생겼지만, 긍정적이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외모에 대한 타인의 잣대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자존감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핵심이자 세상에 끼친 선한 영향력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

 

11월 2일 오후,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가 나왔다. 세상에 애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충격을 받은 내 주변 사람들의 연이은 카톡 메시지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추모글까지 고인이 된 그를 애도하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뒤늦게 뉴스를 접한 아내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박지선 사진.jpg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사람이 세상을 떠난 것 같은  안타까움을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느꼈던 것 같다. 그가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에게 웃음을 준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그 웃음이 남을 할퀴고 깎아내리며 만들어낸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마따나 착한 웃음이어서 그랬는지, 웃음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만한데 그것 말고도 그의 말과 행동이 주었던 선한 영향력이 작지 않아서인지 그중 몇 가지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이 모든 이유 때문인지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 어떤 의미와 이유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나에게 코미디언 박지선은, 그냥 착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멋대로 착한 사람이라 말하는 게 민망하지만 그랬다. 민낯의 환한 얼굴과 수더분한 말투를 보고 들을 때면, 세상에 ‘착한 가면’을 쓴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저 사람만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가 그런 가면을 쓰고 있다 한들, 가면 뒤에 민낯이 전혀 다른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나 또한 덩달아 가면을 벗고 무장해제 될 것 같은, 그런 사람. 그런데다 유쾌하고 잘 웃기기까지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나다니, 마치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떠난 것처럼 안타깝고 슬펐다. 진짜로 오래 알고 지낸 주변 사람이 생전 얼굴 한 번 찌푸리는 일 없이 늘 밝고 쾌활한 모습만 보여주다 갑자기 떠나버리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남을 할퀴지 않고 자신을 낮추며 웃음을 주면서도 남을 웃길지언정 스스로 우스워진 적이 없었으니, 과연 그는 ‘멋쟁이 희극인(그의 트위터 계정 이름이기도 하다)’이라 할 만하다. 

 

트위터.jpg

출처-<박지선 트위터>

 

남을 웃길 때 가장 행복했다는 그에게, 그를 보고 웃었던 수많은 시청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인사를 고한다. 멋쟁이 희극인 박지선, 잘 가요. 덕분에 많이 웃었어요.

 

 

덧붙임, 어떤 언론사의 민낯

 

착한 웃음, 선한 영향력을 주다가 떠난 그의 부고 기사를 무수히 많은 언론사가 내보냈다. 그리고 그중에는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 언론사도 있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유서 내용은 공개하지 않겠다는 경찰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취재를 멈추지 않고 끝내 ‘단독’딱지를 붙여가며 故 박지선 씨의 모친이 남긴 메모의 내용을 보도한 조선일보 이야기다. 

 

해당 기사를 쓴 기자와 조선일보는 의기양양하게 기사 제목 앞에 단독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런 쓰레기 짓은 저희가 단독으로 한 것입니다’라는 자백으로 읽혔다. 이렇게 조선일보가 단독 딱지로 자백을 했음에도 몇몇 매체는 자발적으로 기사를 따라 쓰며 공범이 되었다. 국민의 알권리와 공익이라는 가면은 아예 내던지고 진짜 목적은 돈벌이라는 민낯을 보여주는 것에 일말의 부끄러움조차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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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자 한겨레에서 전날 유서 내용을 공개하며 ‘단독’보도를 한 조선일보 기사를 캡처하여 비판하는 사설을 올렸다. / 해당 사설 링크

 

기자협회가 만든 자살 보도 기준은 유가족을 배려하고 모방 자살을 막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조선일보의 보도를 비난하는 11월 4일 자 한겨레 사설에 따르면 조선일보 홈페이지에 고인의 극단적 선택과 관련된 기사가 150개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같은 언론사인 한겨레가 사설을 통해 ‘언론 윤리는 아예 휴지통에 처박은 듯하다’며 맹비난했을까.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 순위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네이버는 자체적으로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노출 제외 기준을 두고 있다. 모든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가 예외 없이 노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언론사는 아니지만 사실상 여론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이버가 ‘박지선 유서’와 같은 검색어를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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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 오후 7시 54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유가족을 배려하고 모방 자살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자살 보도 기준에서 네이버는 단지 언론사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나.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언론사보다 네이버가 느껴야 할 책임감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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