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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쇼핑

2010-02-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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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5.목요일


호빵


 


그날도 아침 겸 점심으로 라면을 먹고 빈둥대다가 아직도 못 푼 이삿짐이나 좀 풀까 싶어서 작은방에 들어갔다. 드레스룸으로 쓸 예정인 작은방엔 이삿짐 상자가 한 50개쯤 있는데, 책이나 CD, 옷 같은 걸 분류하지 않고 되는 대로 싸둬서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고 하면 모든 상자를 다 까봐야 한다. 저번 주말에 풀려고 했지만 역시나 이놈의 게으름이 문제다. 손톱깎이를 찾으려고 했다가 그냥 포기하고 새 걸 하나 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는 착실하게 짐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처음 연 상자에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이 있어 오랜만에 읽어볼까 하고 바닥에 앉아 읽다 보니까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멍하니 만화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해보니 이래서는 한 달 내내 짐을 못 풀겠다 싶었다. 안 되겠다. 빨리 다음 상자를 열자. 나는 만화책 상자를 뒤쪽으로 쌓아놓고 다음 상자를 열었는데, 무슨 조화인지 다음번 상자도 만화책이었다. 무심코 또 만화책을 읽으려다 말고 낑낑대면서 그 상자도 뒤쪽에 쌓았다.




다행히 세 번째로 열어본 상자는 만화책이 아니라 내 옷이 들어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옷들을 꺼냈다. 그러다 어느 친구에게 얻은 치마를 발견했는데, 이 치마는 암만 봐도 나한테 좀 작을 것 같았다. 진짜로 작으려나? 나는 바지를 후다닥 벗고 조심스럽게 그 치마를 입었다. 예상대로 치마가 엉덩이에서 걸려 더는 올라가지 않는다. 분명히 친구에게 받은 당시엔 멀쩡히 잘 들어갔던 치마였는데 이젠 도저히 입을 수가 없다. 숨을 참고 입어도 안 올라가고, 바닥에 누워서 끌어올려도 안 올라간다. 놀고먹는 동안 살이 찐 게 틀림없다.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집에선 항상 헐렁한 체육복이나 입고 있다 보니 세수하다 말고 거울을 봐도 그냥 얼굴이 쪼금 더 동그래졌다 싶은 생각밖엔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치마를 입어 보니까 노골적으로 살찐 내 상황이 뼈저리게 느껴진 거다. 나는 잠깐 슬퍼하다가 그 치마를 벗고 다른 옷도 하나씩 입어보기 시작했다.




큰일났다, 나 입을 옷이 없어! 친구는 나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더니 그럼 지금 입은 옷은 옷이 아니고 무어냐고 물었다. 꼭 내 어머니의 반응과 똑같은 반응이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옷이 없다는 식으로 투정을 하면 그럼 작년에는 뭘 입고 다녔나, 작년에는 벗고다녔나 하는 식으로 나에게 면박을 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우물대면서 작년은 작년이고 올해는 이제 입을 옷이 없으니까, 하고 애매한 변명을 했다. 이렇게 어머니께 변명하던 식으로 친구에게도 똑같이 변명하니까 친구는 그래서? 라고 되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대화를 돌리며 속으로 친구를 욕했다. 진짜 못돼먹었다. ‘그래서?’는 정말 최악의 질문인데, 누구든 이 한 마디를 되풀이해서 공격하면 열 번을 못 견딘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쓸데없는 이야기나 했다. 엑스박스360과 플스3 중 뭘 먼저 살까, 모니터 큰 거와 TV 큰 것 중 어느 걸 먼저 살까 하는 배부른 소리나 하는 친구의 말을 대충 넘기면서 나는 계속 옷 상자를 찾아댔다.




나는 옷을 입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며 좌절하고, 다시 새 옷을 입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며 좌절하는 짓을 반복했다. 눈치 없는 고양이는 내가 열어둔 상자에 좋아라 들어가서 꼬리를 말고 앉았다. 고양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혼자만의 패션쇼를 했다. 연달아 약 삼십 벌의 옷을 입고 벗으니 슬슬 지쳤다. 그래서 큰방으로 돌아와 컴터 앞에 앉아 즐겨가는 쇼핑몰 싸이트에 들어갔다. 옷을 두어 벌 살까 하는 생각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여긴 옷이 예쁜 대신 뭔가 영 비쌌다. , 남들에겐 그냥저냥한 가격이겠으나 나에겐 무진장 비싸게 느껴지는 수준이란 거다. 막 눈에서 땀이 다 나오려고 했다.




 그래 내 주제에 새 옷은 무슨 새 옷이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데 하물며 옷은 엄청난 사치지. 나는 깔끔히 새 옷을 단념하며 컴터를 꺼버리려고 했지만, 쇼핑몰 창을 끄려고 할 때마다 자꾸 이런저런 옷에 대한 슬픈 일화가 생각났다. 특히 내가 가진 옷의 절반 정도가 남들에게 얻은 옷이라는 사실이 나를 울적하게 했다. 어머니에게 얻은 옷도 있고, 여동생에게 얻은 옷도 있으며, 여자친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남자친구에게 얻은 옷도 있다. 내가 무슨 헌옷수거함도 아니고 이렇게 남이 입던 옷을 잔뜩 가지고 있다니. 받을 당시엔 헤헤거리면서 좋아 어쩔 줄을 몰랐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좀 슬펐다.




 혼자 모니터를 보며 한참 울적해하는데 갑자기 친구가 사고 싶은 옷 있으면 딱 8만 원치만 고르라고 말했다. 설날 떡값으로 받은 돈이 좀 남았다고, 너 나중에 서울 갈 때나(딴지 모임) 알바 면접 볼 때 입을 옷을 사야 하지 않느냐는 거다. , 진짜 천사가 따로 없구나. 나는 무척 감동하면서도 괜히 한 번 튕겼다. 나도 돈 있으니까 내 돈으로 살 생각이라고 하니 친구는 무뚝뚝하게 그럼 그러던가, 하면서 대화를 끊으려고 했다. 앗 아냐, 진짜 고맙다. 잘 살께 하고 나는 얼른 말을 바꾸고 재빨리 쇼핑몰 위시리스트를 눌렀다. 남의 돈으로 옷을 사려고 하니까 아깐 그렇게 비싸 보이던 옷이 별로 안 비싸 보였다. 나는 신나게 옷을 선택해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6만 원짜리 옷을 하나 골라버리니까 나머지 2만 원에 맞는 옷이 없었다. 그렇다고 6만 원짜리 옷을 포기하고 4만 원짜리를 두 개 사고 싶진 않았다. 이걸 어쩌지. 나는 마치 덧셈 뺄셈을 막 배운 애처럼 손을 꼽으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차라리 내 돈을 보탤까 하고 고민하는데 문득 어디선가에서 읽은 인터넷쇼핑몰 옷 구매 조언이 생각났다. 개인쇼핑몰들은 어차피 옷을 떼오는 곳이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자체제작이나 직수입품이 아니고서야 그 옷이 그 옷이라는 거다. 그러니 쇼핑몰들을 잘 돌아다녀 보면 똑같은 옷을 조금 더 싸게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생각하면서 바로 G모 싸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 몇백 개가 넘는 상품들을 일일이 눌러보며 똑같은 옷을 찾아다녔다. 약 다섯 시간 만에 드디어 나는 그 쇼핑몰에 있던 옷과 똑같은 옷을 찾아냈다. 전체 길이나 단추 수, 상세 사진으로 보이는 짜임 수준이 완벽히 일치하는 옷이었는데 쇼핑몰보다 무려 만 육천 원이 쌌다. 만세, 내가 해냈구나! 나는 마구 마구 흥분하면서 그 옷을 장바구니에 넣은 다음 쇼핑몰에 있던 다른 옷들도 찾아냈다. 다들 기본 만 원 이상 쌌다. 무척 신났다. 흡사 대단한 삶의 지혜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대단한 삶의 지혜를 친구에게 떠들어대면서 즐겁게 쇼핑을 마치고 장바구니로 돌아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내가 지나치게 즐거운 기분으로 쇼핑을 한 탓에 옷을 94천 원이나 넣어버린 거다. 그럼 만 4천 원을 빼면 되긴 되는데, 문제는 이게 옷 하나를 빼면 또 돈이 너무 남아버린다는 거다. 두 손이 저절로 머리 위로 올라갔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겨우겨우 옷을 다시 골랐다. 그래도 돈은 9만 원이 넘었다.




 친구는 나에게 옷을 다 골랐느냐고 물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실 9만 원이 넘어버렸다고, 어떻게든 8만 원으로 만들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실실 웃더니, 사실은 옷을 10만 원치 사줄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10만 원을 훌쩍 넘길까봐 일부러 8만 원이라고 했다고, 그냥 옷을 빼지 말고 두라고 했다. 정말 빈틈없는 인간이다. 나는 그 8만 원을 맞추려고 온종일 옷을 골랐는데 눈이 빠질 정도로 고생한 나의 노력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줄이야.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했지만 어쨌거나 천사 같은 친구에게 욕을 할 수는 없어 나는 잠자코 친구 몰래 옷을 하나 더 넣었다. 이로써 총 금액은 딱 10400원이 되었다. 결제를 하려고 컴터 앞에 온 친구가 아깐 9만 원이 넘었다더니 왜 지금은 10만 원이 넘었느냐고 묻기에 배송비 착불인 상품이 있어서 배송비를 같이 결제하는 걸로 했더니 돈이 더 넘은 거라고 둘러댔다. 내가 생각해도 참 멋진 변명이었다.




 두 눈 가득 기대를 품은 내 앞에서 친구는 여유롭게 보안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인터넷 뱅킹을 했는데 황당하게도 이용시간이 아니라서 이용할 수 없다는 메세지가 떴다. 이럴 수가…….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이 더러운 농협이 협조는 못할망정 훼방을 놓는구나. 나는 몹시 실망하면서 물끄러미 친구를 쳐다보았다. 인터넷 뱅킹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나야 이용시간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친구는 분명히 이용시간을 알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대로 친구는 이용시간을 알았는지 예전엔 새벽 한 시까지였던 것 같은데 시간이 준 것 같다면서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했다. 그래 뭐, 내일 사면 되겠지. 나는 크게 실망하긴 했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괜히 궁시렁댔다가 옷 사준다는 말을 취소해버리면 어쩌나 싶어서.




 다행히 다음날 무사히 결제를 마쳤고, 며칠이 지난 지금은 딱 하나 남은 택배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배송 중 표시가 뜬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여우가 어린왕자를 기다리는 시간 못지않게 행복이 가득하다. 택배 기사 아저씨에게 멀쩡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머리감고 세수하는 게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택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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