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산하 추천0 비추천0

2010.03.05.금요일


산하


 


다양한 정신병의 증상 가운데 '쓰레기 수집'도 있어요. 대관절 사람의 뇌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열이든 강박이든 어떤 원인에 의해 그 회로에 이상이 생기면 세상의 모든 쓰레기들이 다 아까와 보이고, 심지어 음식 쓰레기까지도 애지중지 모아 두게 된다고 하지요.  언젠가 맞닥뜨렸던 지상 최강의 쓰레기집에서는 수십 톤 분의 쓰레기가 쏟아져 나와 구청 담당자가 항복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쓰레기의 아마존"이라고 불렀는데 그 아마존의 쓰레기숲의 아래쪽은 이미 화석화가 진행된 듯 쓰레기와 바닥이 구분되지가 않았어요. 이해하시겠어요?  거기서 부부와 딸 둘 아들 하나가 살았답니다. 그 집에 대한 제보는 가출한 큰 딸이 했지요.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군요. 그 병에 걸린 사람의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뛰쳐 나오거나 적응하거나 격리시키거나 셋 중의 하나라고. 



 


언젠가 강박증 걸린 아주머니의 쓰레기집에 기함을 한 뒤로 다시는 유사한 아이템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우리 팔자에 그런 다짐은 안하니만 못하죠.   한 할머니에 대한 제보가 왔어요.  무슨 피난민처럼 머리에 장대한 봇짐을 이고 등에는 잡동사니 그득한 배낭을 메고 시장을 쏘다니며 구걸도 하고 냉이(?)도 판다는 할머니였어요.   아니 할머니도 아니지 법적으로는 예순 둘 밖에 안되니까. 


 


할머니를 따라다니다가 그 집에 갔을 때 나는 괴기 영화 세트와 맞닥뜨려야 했어요. 부산에서 동네 형편이 안좋기로 이름난 동네의 골목길의 열평 남짓한 단독주택의 1층이었는데 문을 연 순간 망연했던 게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만큼 쓰레기가 들어차 있고 오징어 썩는 냄새 비슷한 역한 냄새가 코를 유린하고 들어오더군요.  형광등 줄 끝에는 작은 인형이 달려 있었는데 그 인형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괴물 거미 쉴롭의 거미줄에 칭칭 감겨진 프로도 베긴스처럼 거미줄에 빈틈없이 싸여 있었어요.  집이 좁으니 쓰레기 양은 다른 곳보다 적을 수 있었지만 쓰레기 밀도(?)는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았을 겁니다.  


 


2층에 가건물 올리고 사는 며느리는 사연 얘기를 하며 실실 웃어요.  "아무리 말려도 어머니가 안들으시니까.. 호호....저희도 치워 봤는데 호호..... 노다지 다시 쌓아놓으시니까 포기했죠 호호....." 이상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한 마디 던져 봤어요.  "그래도 잘 웃으시네요."  그러자 며느리의 눈에선 바로 닭똥같은 눈물이 흐르는 거예요. 


 


"이렇게라도 안하면 바로 미쳐 버릴 거예요." 


 


시아주버니네, 즉 큰아들네는 이미 할머니 때문에 이혼한 상황이었고 어머니를 끼고 사는 둘째 아들네도 형편이 어려웠어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사는 상황인데다 할머니 때문에 친정과는 발 끊고 살고 있었지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려고 해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처지에 엄두가 안나고,  부양 가족이 있으니 의료 혜택을 받기도 무망했던 겁니다.   할머니가 모아오는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쌈박질도 하고 악도 써 봤지만 헛수고일 뿐, 1층 할머니의 방은 쓰레기천지가 되어 갔던 거예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랬는가. 들으니 기구하고 거듭 새기자니 처량합니다. 어려서 식모 살이를 했던 어머니는 일종의 결혼 사기를 당했습니다. 버젓이 애 있는 홀아비가 총각 행세를 했던 거지요. 그래 놓고는 두들겨 패기를 다반사로 했고 아들의 기억으로는 생활비를 주지 않아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직장을 찾아간 어머니를 아버지가 각목으로 머리를 때려서 그 자리에서 실신해서 병원에 실려가기도 한 적이 있답니다. 큰아들은 그때부터 이상해진 거 같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혼을 하고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워가던 어머니는 악을 써서 돈을 모았고 변변치는 않지만 집도 두어 채 장만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아버지 다른 여동생이 그만 이 두 집을 홀랑 사기쳐 먹고 말았다지요. 어머니는 방안에 틀어박혀 누구에겐지 모를 욕설을 퍼부으며, 며칠을 뒹굴었답니다.


 



 


애 둘 먹여 살리느라 악착같이 살아가던 어머니는 그 과정 속에서 점차 이상해졌대요. 자꾸 뭔가를 모아 오고, 아무리 봐도 쓸데가 없어 뵈는 물건들을 주워서 쌓아놓더라는 거지요.  언젠가 쓸모 있을 것이라면서. 나중의 일이지만 병원으로 그분을 모신 뒤에 집을 치웠더니 세상에 방범창에 휠체어에 오토바이 헬멧에 동의보감 번역본까지 나오더군요.


 


우리가 자꾸 개입하고 만류하니까 홀연 할머니가 사라지셨어요. 아직은 추운 겨울인데 행여 어디 가서 얼어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백두산이었지요.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본들 바람같이 오가는 할머니가 어디에 있는지는 국정원도 모를 거 같더라고요. 그때 아들이 고향 얘기를 했어요. 좀체 안가시기는 하는데 가끔 고향에 움막같은 곳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거예요. 득달같이 달려갔더니 할머니가 그곳에 계시긴 하더군요. 간 김에 할머니의 과거를 물어 봤어요. 아들들이 모르는 과거...... 거기서 뜻밖의 얘기가 나왔습니다.  

 "가 아버지가 보도연맹으로 죽었어요. 엄마는 즉시 다른 데로 개가해뿌고 큰집에서 크다가 나이 열댓 먹었을 때 대처 식모로 보내뿠지요. 불쌍한 아라..   " 


 


지리산 자락의 동네였습니다. 전황이 국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기 전,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은 왕년의 좌익 혐의자는 물론 그 언저리를 모아 묶어 세웠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습니다. 그 수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겁니다. 할머니의 호적 등본을 떼어 봤을 때 할머니의 아버지의 사망신고는 80년 12월 31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온 동네가 다 알고 할머니의 불행의 시작이었던 한 남자의 죽음은 30년 뒤에야 신고되었던 겁니다.


 


그제야 아들도 짚이는 데가 있다는 듯이 말하더군요. 할머니가 경찰을 무서워했다고. 옥상에 쓰레기를 채워놨을 때 음식 쓰레기를 끓여 먹었는데 화재의 위험을 두려워한 이웃이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이 찾아와서 한 마디 하자 바로 중단했다고...... 그렇게 아들과 며느리가 덤비고 이웃이 난리를 쳐도 꿈쩍도 않던 할머니가 경찰 제복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더라는 겁니다.  


 





태어나서 돌도 안되어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를 못마땅해 한 외갓댁 식구들이 엄마를 빼내 가고 큰집에서 자라다가 식모로 보내져 버린, 살겠다고 아득바득 살아보다가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핏줄에게 배신당한 채 쓰레기를 살림으로 굳게 믿어 버리게 된 할머니. 그래서 끝내 자신의 불행을 아들들에게 유전시키고 있던 할머니..... 할머니의 사주팔자가 궁금해지지 않나요.  어떻게 이렇게 기구할 수가 있단 말인가요.


 


병원으로 모시려고 할머니를 설득했을 때 할머니는 완강했습니다. 나를 때리려고도 했고 자식에게는 호통도 쳤지요. 도무지 설득이 먹혀들지를 않았어요. 물론 설득이 통할 정도면 그 지경이 안됐겠지만. 별 수 없이 강제로 모실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앰뷸런스가 도착하고 이송 요원들이 할머니 앞에 이르렀을 때 전혀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할머니의 표정과 말투가 돌변한 거예요. 

"나 때문에 온 거라요?  내가 가야 되는 겁니꺼?"
"네 할머니 가시지요."
"가지 뭐. 가서 의사 만나고 병 있으면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니가."  

어이가 없어도 분수가 없게 없더군요. 아주 미소까지 지으며 순순히 걸어서 자기 발로 앰뷸런스에 오르십니다. 일체의 저항도 거절의 말 한 마디도 없었어요. 거기 있던 사람들 죄다 어리둥절할 뿐이었지요. 그때 후배가 한 마디를 했어요. "할머니가 역시 제복을 무서워하시네요."  아 제복! 앰뷸런스를 타고 오신 분들은 죄다 제복을 입고 있었어요. 어깨에 은빛 견장을 다신 것이 경찰 비슷했지요. 그 제복의 등장에 할머니의 기세가 순식간에 숙어 버린 겁니다.   아니할말로 보통 문제가 있으셔서 우리가 찾아갈만큼 심각한 분들은 경찰이라고 차별 두지 않으세요. 경찰이 오면 더 기세가 등등해서 날뛰는 경우도 흔하지요.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어요. 

앰뷸런스를 타고 가면서 할머니에게 옛일을 여쭤 봤어요.  엉뚱하게 자신의 아버지를 "국가유공자"라고 하시던 할머니는 얘기하는 와중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과거의 고리들을 꺼냅니다. 매우 간략하지만 날카로운........ "우리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하고 한목에 (한꺼번에) 죽었다고 하대요. 와 죽었는지는 나는 몰라. 정말 몰라. 우리 할아버지가 장죽을 물었거등요. 긴 담뱃대.  내가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우리 할아버지가 날 보고 울었어요.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울었어요. 와 그랬는지는 나는 몰라 정말 몰라." 


 


그렇게 얘기하면서 할머니는 서럽게 울었어요. 그 울음을 들으며 내 머리 속도 참 많이 헝클어지더군요. 민간인 학살은 히틀러만 한 것이 아니고 좌익 빨갱이들만이 한 것도 아니며, 정통성 있다고 자부하고 "UN에 의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은 정부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해 져 버린 듯한 과거가 이렇게 오늘의 비극과 맥이 닿아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범상할 수는 없잖아요. 수십 년 전 맞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어간 빨치산들의 추모제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이 이빨을 드러내고, 그 정도는 우리 공화국이 감당할 수 있다는 판사의 상식이 선포한 무죄에 여당의 대표가 으르렁 살의같은 악의를 드러내는 시절이라 더욱 그런지 모르겠어요.  

정말 이거 하나는 기억해 둬야 할 거 같아요. 일본 제국주의가 학살의 형태로 죽였던 조선인들의 수...... 그러니까 의병 전쟁과 3.1운동 진압과 간토 대지진과 경신대참변 등에서 죽여없앤 조선인들의 수보다 더 많다고 추정되는 사람들이 6.25가 시작되고 한 달 사이에 죽어갔다는 사실 말입니다. 교전 중인 군인도 아니었고 반 대한민국 봉기를 일으킨 것도 아니었고, 이적행위의 현행범도 아닌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변호도 없이 꾸역꾸역 실려와서 차례차례 죽어가서 차곡차곡 쌓여져서 두리뭉실 처리되었다는 거예요. 빨갱이들이 그만큼 지독했으니 그런 거 아니냐는 소리 하지 마세요. 빨갱이들이 지독했다는 것이 우리가 악마가 된 사실을 합리화하지는 못해요.   


할머니의 건강과 안온한 여생을 기원합니다. 60년을 한맺혀 살았다면 남은 세월은 그걸 푸는데만도 부족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