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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4.목요일


펜더


 



 


제    목 : STALINGRAD(한국 출시 제목 “스탈린그라드”)
감    독 : 요셉 빌스마이어
주    연 : 토마스 크레취만, 도미니끄 호로비츠, 세바스티안 루돌프, 실베스타 그로트 등등
제작년도 : 1993년
제 작 사 : 로얄-바바리아-B.A-페라톤 프로덕션
수    상 : 93 독일 아카데미, 독일 연방필름, 독일 국제 바바리언 영화제, 94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상은 받을 만큼 받았다.
러닝타임 : 1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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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비 2천만 달러, 2만 5천명의 엑스트라, Das Boot의 스탭이 총집결한 20세기 최후의 묵시록


 


스탈린그라드란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수입사에서 뿌렸던 헤드카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카피가 바로 위의 문구였다. Das boot의 스탭이 총집결 했다는 걸 강조하면서 스탈린그라드의 전투가 20세기 최후의 묵시록 이란 걸 은근히 강조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차피 같은 독일 영화사에다가, 비슷한 전쟁영화, 거기에다가 [반전]을 구호로 집어넣었음을 보면, 스탭들이야 다시 모일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결정적으로 감독이 다르기에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 작품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보자. 이 작품은 독일 패전 50주년 기념작품이랍시고, 독일에서 만든 작품인데, 독일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이 영화가 기존의 "할리우드" 전쟁영화랑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구?


 


우리가 무수하게 접한 미국식 [전쟁영화], 그 중에서 2차 세계 대전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2차 세계 대전이란 것이 마치 미국과 영국...그 중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치러진 전쟁이고, 미국이 제일 열심히, 그리고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독일과 맞서 싸운 듯이 나와 있다. 그런데 어쩌냐...미국이 독일과 싸운 건 맞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소련이 민족의 운명을 걸고 싸운 아마겟돈이었고, 영국과 미국, 그밖에 일본의 전쟁은 그 주변부에서 벌어진 그저 그런 변두리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심한 표현일수도 있겠지만,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결정전 바로 앞에 치러진 3라운드 시범 경기였다고나 할까? 제2차 세계 대전의 총 사망자 수를 5,300만 명 정도로 계산한다면, 그 중 43%인 2,300만 명의 죽음은 바로 소련 인들의 죽음이었다. 이 중 소련군의 죽음은 76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 수의 26배, 영국군 전사자 수의 19배에 달한다(이 외에도 1,500만 명이 전쟁 불구자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소련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7,950명의 병사를 독일군에게 제물로 받쳐야 했었고, 2차 대전 최대의 시가전이라 불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강철의 격돌이라 불리는 쿠르스크에서의 대격전. 이 단 두 번의 전투로 잃은 병력의 수가 대전 전 기간 영, 미군이 잃은 병력의 손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점만 봐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주 전선은 동부전선이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자, 그런데 우리들의 상식 속에 들어가 있는 2차 세계대전이란 영국과 미국이 합심해서 일본과 독일을 때려잡은 전쟁이었지, 그 어디에도 소련이란 "낯선"존재는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군은 미군의 M1 소총에 맞아 픽픽 쓰러지는 존재이거나, 불쌍한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쳐 집어넣어 학살시키는 존재이지 모스크바 근처나 스탈린그라드에서 능수능란하게 소련군을 도륙하던 존재는 아니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어째서 독소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독일이야 원래 진 놈들이었으니까 할 말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2차 세계 대전 최대의 피해자인 소련은? 바로 냉전이란 이름의 또 다른 전쟁의 등장 때문이었다.


 


할리우드는 자기네들 전쟁영화 만들어 내기에도 바빴지만, 이제 새로운 적으로 등장한 소련이란 놈들을 위해 그들의 영화를 찍을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그들은 [왜곡]은 아니어도 자신의 전쟁을 [강조]함으로써 소련과 독일의 전쟁에 대해선 [상대적 축소]를 조장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2차 대전 소련군과 연관된 전쟁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근래에 나왔던 애너미 엣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가 헐리우드가 소련군의 시각으로 만들었다면서 내놓은 작품이지만, 이 역시도 어쩔 수 없는 “할리우드”작품이란 걸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 이 [스탈린그라드]는 어떤 작품일까? 한마디로 독일인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2차 세계대전 소련과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러 독자제위들 여기서 눈치 챘겠지만, 이 이야기의 기본 주제는


 


- 독일 애들은 [나치]만 있는 게 아니다!! 독일 애들도 사람이고,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우리도 인간이었단 말이다!!


 


대충 이런 분위기를 뽑아내려고 무던히도 애쓴 작품 되겠다. 즉, 독일 애들도 지난 기억에 대해서 좀 항변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언제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나오는 독일군들은 쓰레기 인간 말종처럼 그려져야 한단 말인가? 우리도 불쌍하다! 우리도 인간의 피가 흐른다라는걸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져서 그런지 조금 작위적인 냄새가 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특수효과나 2만5천명이나 되는 엑스트라를 동원해서 찍은 그 [그림]이 좀 괜찮게 보였냐면...글쎄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쓰는 본 필자도 이 점에 대해선 상당히 민망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래도 독일 측 입장에서 보면 초대형 블록버스터이다. 300여개의 세트장, 600여명의 스턴트맨에 연인원 10만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들, 5천 톤에 달하는 소품에, 독일 영화 역사상 단일 촬영에 300여명의 스탭이 동원된 초거대 프로젝트였다. 흥행수입도 만만찮았는데, 독일에서만 500만 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으니, 대박은 대박이었다. 이 작품의 제작과정은 여러모로 '라이언 일병구하기'와 비견되는데, 고증을 맞추기 위해 유럽의 군장과 군복 벼룩시장을 이 잡듯이 들쑤셔서 군장과 군복을 구하고, 출연진들에게 3개월간 군사훈련을 시킨 점 등등은 라이언의 그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감독인 요셉 빌스마이어가 유명 배우들을 의도적으로 캐스팅에서 제외했다는 점일 것이다. 유명 배우들의 이미지가 전장의 혹독함을 연출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는 판단에서 가급적 무명에 가까운 배우들을 캐스팅 했다는 것이다. 스필버그가 흥행을 위한 캐스팅을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캐스팅이다. 이런 전차로 국내에 수입된 지 3년이나 흘러갔음에도 수입사는 개봉일자를 저울질 하게 되었고, 결국 97년이 되서야 스탈린그라드를 개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할리우드의 대작 블록버스터에 입맛이 길들여져 있기에 스탈린그라드에 나와 있는 특수효과나 전투장면은 [쥬라기 공원] 앞에 떡 버티고 있던 영구 아트무비의 [티라노의 발톱]의 모습을 보는 듯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럼 이걸 왜 봐야 하냐고? 그래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관한한은 그나마 객관적이고, 할리우드식의 유치찬란한 미국 만만세를 쏙 뺀 [제대로 된 전쟁영화]이기 때문이다.


 




 


1. 두 왕따들의 만남


1939년 8월 23일 독일의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의 외무인민위원인 몰로토프가 체결한 독소불가침 조약의 체결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된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했었다. 이 독소 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전해들은 히틀러의 첫마디가,


 



내꺼임ㅋ


 


- 이제 유럽은 내 것이다!!


 


란 것이 허풍만은 아니었다. 이미 1차 세계 대전 때 동부와 서부전선에 병력을 쪼게 놓고 지리한 참호전을 벌려야 했던 지난 전쟁의 기억만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 육지의 1/6을 영토로 삼고 있는 소련을 배후에 남겨둔 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란 건 누가 보더라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럼 말이다. 소련은 왜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을까? 영국이나 프랑스, 폴란드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일까? 사회주의 국가의 양심상? 따져보면 독일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일단은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더 "구미가 땡기는"제안을 해왔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쟁이 터지면 폴란드를 지원하겠다는 의견이 나오자, 폴란드 군인들은 일언지하에,


 


- 소련의 도움을 받느니 차라리 혼자서 싸우겠다!!


 


이러면서 소련의 심기를 자극하니 소련 역시 내민 손이 민망해질 수밖에...결정적으로 영국과 프랑스, 소련이 모여서 전쟁이 터지면 각자의 병력을 얼마씩 끌어올 수 있는지 의견을 나누고, 좀 더 구속력이 있는 조약을 체결하려는 자리에서 영국군이 현재 대륙으로 보낼 수 있는 군대가 4개 사단뿐이며, 이 중 2개 사단은 당장 장비와 훈련의 부족으로 추후에 보낼 수 있다 사실을 말하게 된다. 소련...머리가 아파진다.


 


- 얘들 편에 붙었다간....쪽박 차겠는걸??


 


그런 생각에 더해서 그 동안 독일과의 밀월기간에 있었던 [왕따 동류의식]과 [오고가던 군사 정보 속에 싹 튄 우정]이 만개한 거였다. 그게 뭐냐고? 일단 1920년대 독일과 소련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했다. 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라고 당했고, 소련은 전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해 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본주의 세계를 적으로 돌려놓고, 자본가들을 불문곡직 쏴 죽여도 총알 값이 아까운 버러지쯤으로 취급하는 소련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좋아했을까? 자 여기서 두 나라는 어쨌든 나라를 지키고 재무장도 해야 하는데,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독일은 기술이 있지만, 베르사이유 조약의 서슬 퍼런 감시 때문에 무기개발은 물론, 군대의 훈련조차 못시킬 정도로 코너로 몰린 상태이고, 쪽수 많고, 땅 넓은 소련은 반대로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해서 이 두 나라는 1920년대 서로 뭉치게 된다. 소련은 독일의 재무장을 돕기 위해 모스크바 남동쪽 300마일 떨어진 곳의 리페츠크 비행장을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훈련비행장으로, 볼가강의 카마에는 탱크학교를 세워주고, 톰카에는 화학전 단지를 건설해서 독일군이 거기서 훈련과 실험을 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다 제공해 준다. 그렇다면 소련은?


 


소련군은 독일군의 훈련을 참관하면서 하나하나씩 현대전의 기초를 배워나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소련군의 대부이자, 종심공세 전략의 기본을 탄탄히 닦아낸 투하체프스키가 당시 소련의 엘리트들을 데리고 1925년부터 독일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하러 갔다는 것이다. 이때 그들은 2차 대전 소련을 도륙 냈던 독일 측의 명장들...탱크부대의 아버지 구데리안이나, 전력의 천재 만슈타인, 모델원수, 카이텔 등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


 


어쨌든 독일과 소련은 결국 손을 잡게 된다. 당시 스탈린의 생각은 간단했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등 서방 제국주의자 놈들끼리 서로 얽히고설킨 상태로 치고받고 싸우다 지칠 때쯤 소련이 한번 발길질로 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하였고, 1940년 봄 드디어 [가짜전쟁]이 끝나고, 독일이 프랑스로 쳐들어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스탈린은 적어도 전쟁이 5,6년 정도 이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독일이 프랑스를 6주 만에 항복시켜 버린 것이다. 스탈린의 똥줄이 타들어갈 만 하였다. 소련은 동맹국 하나 없이 유럽의 허허벌판 속에 홀로 독일과 마주보고 서 있는 꼴이 된 것이다. 자, 이 상황에서 우리 히틀러 아저씨는 [나의 투쟁]에서 그렇게도 설파한 레벤스라움(Lebensraum : 생활공간)을 떠들기 시작한다. 레벤스라움이 뭐냐고? 간단히 말해서 소련땅 뺏어서 그 땅에 순수 아리안 민족인 독일애들을 정착시키고, 식민지화 한다는 것이지...1940년 7월 3일 날 히틀러는 비밀리에 프리츠(Fritz)라는 암호명으로 소련 침공 작전에 대한 연구를 지시 내린다.


 




히틀러는 A-A라인 즉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에서 아스트라한(Astrakhan)까지의 땅을 차지해서 이곳을 요새화 시키고, 원주민(?)들을 아리안 인종들의 몸종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냈다. 뭐 이 시점에서 히틀러를 막을 사람은 유럽 전 지역에서 아무도 없었으니까...스탈린은 이때까지 철통같이 히틀러가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지만, 군부의 간청과 함께 측근들의 동요에 따라 마지못해 1940년 가을부터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 네들이 그렇게 원한다면...뭐 그렇게 해도 좋은데, 히틀러가 그럴 놈 아냐. 걔 괜찮은 놈이라니까?


 


실제로 독소 불가침 조약...그 짧디 짧은 기간 동안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간이라도 빼줄 만큼 엄청나게 애썼다. 소련은 그 당시 17개월 동안 석유 865,000톤, 목재 648,000톤, 망간원석 14,000톤, 구리 14,000톤 그리고 거의 1,500,000톤에 이르는 곡물을 보냈었고, 독일이 구매하지 못했던 다른 원료나 물자들을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대신 구매하여 넘겼다. 이것도 모자라 독일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루는 기간 동안 소련은 기상 정보까지 제공하였고, 해군은 쇄빙선과 함께 무르만스크 부근의 해군기지 하나를 제공해서 독일 해군 무장상선들의 재급유를 도왔다(제일 압권은 독일 공산주의자들 800명을 게쉬타포에게 넘긴 것이다. 독일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모스크바로 도피한 800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스탈린은 넘겨버렸던 것이다).


 


어쨌든 소련은 독일에게 할 만큼 했으나, 독일은 이미 소련을 때려잡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소련이 맥 놓고 당했냐? 그건 아니었다. 물론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련이 멍청히 앉아 있다 당한 건 아니었다.


 


2. 최악의 커플...그리고 시작


NKVD(내무 인민 위원회)란 게 있었다. 그게 뭐냐고? 바로 KGB의 전신이다. 이정도 말하면 이해들 했을 것이다. 1936년에 이 '내무 인민 위원회'의 대장 자리에 앉은 인물이 바로 그 유명한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Ezhov)란 녀석이다. 그리고 이 녀석이 NKVD의 대빵 자리에 앉기 1년 전에 소련 검찰총장의 자리에 앉은 녀석이 바로 안드레이 브이신스키(Andrei Vyshinskii)란 녀석이었다. 이 둘이 누구냐고?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10년 숙청의 피날레를 장식한 꼴통 커플이다.


 


이 녀석들의 숙청사업은 정말 황당하다 못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 숙청의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썰들이 난무하였으나, 대충 따져보면, 스탈린이 군부에 대한 견제 정도가 가장 합당한 썰로 회자 되어진다. 공산혁명 기간 동안 러시아 군부를 한바탕 싹 쓸어버린 이 녀석들이 갑자기 30년대 중반부터 군부에 다시 한 번 손을 대는데, 당시 대령에서 원수까지의 지휘관 837명중에서 720명을 포함해서 육해군의 고위 장교 및 정치장교의 45%가 처형되거나 면직 되었다. 더 충격적인 건 사실상의 소련군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사위원회의 고위 장교들 85명 중에서 71명이 세상과 작별을 해야 했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소련군부의 지휘관급은 도륙이 난 상황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하위 장교들은 그 나마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총 42,218명이 숙청이 되었지만, 대부분 목숨은 건졌다(까놓고 말해서 당시 소련군은 군복을 입혀놓은 허수아비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1939년 1월부터 1941년 5월 사이에 군비증강에 나선 소련이 161개의 신설사단을 창설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당장 장교가 부족한 마당에 어쩌겠는가? 애네들 다시 데리고 와 써야지...여하튼 이때 소련 군부는 완전 초토화 상태였다.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투하체프스키 같은 명 전략가도 사형을 언도받았으니 말 다했지 뭐...


 


아무튼 이런 숙청의 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련은 다가오는 독일의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문제는 이때당시 소련의 대응이었는데, 당시 소련은 준비는 하고 있었다. 장비도 꽤 있었고, 병력도 있었다. 다만 문제라면 스탈린의 [고집]이 문제였다. 스탈린 생각에 만약...진짜 만약에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더라도 소련 영토에서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국경 근처의 요새화된 지역에서 독일군을 막아내고, 역공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예전에 스탈린 선이라고 옛 소련 국경에 박아뒀던 방어선을 버리고, 독일과 갈라먹은 신국경선에 다시 방어선을 쳤는데, 이게 좀 문제가 심했다. 국경선 2,800마일을 다 방어해 낸다는 자체도 어불성설이지만, 이 2,800마일 전부를 요새화 한다는 소리 자체도 황당한 주문이었다. 그래도 상승장군인 쥬코프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방어계획을 보충하고 예비군을 소집해 80만 명의 병력을 확보한 다음에 6월4일에 12만 명의 병력을 국경지역의 요새들로 보내는 것 까지는 좋았다. 요새 선에 새로운 전차와 포, 장비들을 보내기 시작할 때...그러니까 한참 병력과 장비가 배치되거나 이동 중에 덜컥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즉, 이도저도 아닐 때 제대로 한방 먹은 것이다.


 


그럼 그때까지 독일 침략의 징후는 없었던가? 음...엄청 많았다. 1941년 봄 무려 84건의 경고나 전쟁징후가 스탈린에게 보고됐다.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게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당시 영국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이 직접 날려 보낸 경고였는데, 이게 오히려 스탈린의 의심을 부채질 시켰다. 왜? 바로 루돌프 헤스 때문이었다. 영국본토 항공전이 일어나기 전에 헤스는 영국과 독일이 싸워선 안 된다는 생각에 영국으로 비행기를 몰고 날아가 [평화의 중재자]가 되겠다며 생쑈를 했던 것이다...2차 대전 최대의 미스테리이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스탈린은 영국과 독일이 손을 잡고 소련을 공격하기 전 협상을 하고 있는 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첩보원이라는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의 수차에 걸친 경고와 보고도 묵살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독일 침공계획의 전말이 드러나 있는 작전계획서 까지 입수해 보낸 조르게의 노력이 그렇게 허무하게 짓밟힌 건 좀 아쉬운 대목이다. 뭐, 소련도 41년 5월 15일 날 예방전쟁 개념으로 독일에 선제공격을 계획했었던 대목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돌연 취소대고 독일군의 공격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었다)


 


어쨌든 스탈린은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되기 직전까지 4가지 이유를 제시하며 독일군의 침공위협을 무시했다. 그 이유란?



 


① 소련이란 광대한 영토와 소련의 인구수와 전력을 감안할 때 최소한 침공엔 소련 병력의 두 배 정도의 병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 독일군 전력은 그에 못 미친다.


② 서부 전선에서 영국과 맞서 싸우며, 동부 전선으로 밀고 들어올 만큼 히틀러가 멍청하지 않다.


③ 1941년 5월 히틀러는 발칸반도로 진출해 있었다. 이쪽에 병력을 분산시킨 체 전쟁을 할 수는 없다.


④ 6월에 전쟁을 한다는 건 동토의 땅 러시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생각 못할 것이다. 곧 러시아는 겨울이 될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이런 생각을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다.


 


3. 바르바로사 작전


12세기 후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성인 바르바로사...독일 극우단체들이 신성시 하는 이 민족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은 1189년 3차 십자군 원정을 주도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독일 국수주의자들은 바르바로사가 산에 은둔하고 있다가 언제고 다시 내려와 게르만 민족을 이끌 거라는 전설을 아직까지 믿고 있다(지들끼리 그렇게 믿는 거다). 여하튼 이 바르바로사란 뜻은 붉은 수염이란 의미인데, 동방원정을 주도했던 프리드리히 1세의 인생처럼 히틀러도 한번 동방원정을 해 보겠다고 독일의 소련침공 작전을 바르바로사 작전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1941년 6월 22일 300만의 독일군이 3개 집단군으로 편성되어 일제히 소련 영토로 밀고 들어갔다.


 



 


개전 몇 시간 만에 소련의 66개 항공기지에서 항공기 1,200대가 그 자리에서 박살나고, 340개의 보급품 집적소중 220개가 독일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전쟁 시작 첫 4주 만에 소련군의 319개 단위부대가 붕괴되었고, 소련군 전차 전력의 90%가 상실되어 버렸다(소련군은 지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게릴라 전술을 보며, 전차부대를 조각조각 나누어 운용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부대를 쪼게 놓은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여하튼 소련은 아작이 났다. 스탈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독일군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독일군을 격퇴는 하되 독일본토로의 진격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혀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이 제대로 작심하고 침공해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분노는 분노일 뿐, 그 어떤 해결책도 되지 않았다. 여기서 정말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1941년과 1942년, 그리고 1943년 한 해 한 해 넘어가면서 스탈린이 차츰 [진화]를 했다는 것이다. 1941년에 스탈린은 독일군이 남부 우크라이나의 유전지대와 자원지대를 노린다고 굳게 믿고는 그쪽 방면에 100개 사단을 고정 배치 시켜 놨다. 모스크바가 풍전등화의 위험에 빠져 있는 그 상황에서도 히틀러가 남쪽을 노린다며 끝까지 남부 방면의 수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다음해인 1942년 스탈린그라드의 격전에서 스탈린은 독일군의 주공은 모스크바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독일군의 페이크도 있었지만, 이번엔 거꾸로 모스크바를 지키려 애썼다. 문제는 그때 독일군은 남쪽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두 번의 시행착오 끝에 1943년부터 스탈린은 제정신을 차리고 대독전쟁에 임하게 된다. 음 문제는 그때까지 소련군과 소련국민들은 '개죽음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물론, 베를린 레이스라고 독일로 진격하는 동안에도 개죽음은 계속 되었지만 말이다).


 


1942년 봄까지 소련군 70만 명이 사로잡히고, 310만 명이 죽었다. 당시 독일군의 유일한 골칫거리는 모기떼들의 공격이었을 뿐, 소련군의 반격은 미미하였고, 영미의 군 지도자들은 몇 주, 길어야 몇 달 뒤에 소련은 독일에 무릎을 꿇을 거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나마 희망을 가진 건 동장군의 등장이었다. 1941년의 겨울은 유난히 빨리, 그리고 매서운 추위로 다가왔다. 그러나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해 동계 월동장비에 대한 보급 계획을 짜고, 물자를 확보하자는 참모들의 건의를 히틀러는 묵살해 버린다.


 


- 전쟁이 겨울까지 길어진다는 사실을 병사들에게 알려주는 꼴이 된다!! 전쟁은 올 해 안에 끝내야 해!!


 


결국 독일군은 영하 40도가 오르내리는 동토의 땅 러시아의 추위를 여름 하복으로 견뎌내야 했다. 모스크바 바로 코 앞 까지 진출한 독일군이었지만, 거기까지가 바로 독일군의 한계였다. 그리고 1942년의 봄이 왔다(당시 독일국민들은 동토의 땅에서 싸우고 있는 독일군을 위해서 겨울옷을 보내주자는 운동이 벌어졌다...뭐, 정부기관 주도로 진행된 거지만, 어쨌든 그런 식의 움직임이 있었다. 덕분에 소련 전선에 있는 병사들은 여성용 털 코트나 여우목도리를 하고 전투에 나서는 웃지 못 할 촌극을 연출해야 했다. 당시 히틀러의 측근들은 이런 식으로 국민들의 생각을 통제하고, 유도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 독일군들은 하계 전투복에 여우털 목도리를 둘러메고 싸우는 코미디를 연출해야 했다).


 


4. 강철의 도시 스탈린그라드


1942년의 봄은 소련에게 있어선 [암울] 그 자체였다. 당장 소련인민들은 1941년 전쟁 전 보다 절반이나 줄어든 빵과 고기 배급으로 연명해야 했었고, 소련 철도망의 1/3은 독일군 점령 하에 있었다. 여기에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중공업 생산력은 1941년의 1/4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고, 각종 철광석의 생산량은 1/3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공장을 굴릴 속련 노동자나 수백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1942년 말부터 1943년 그 기적과도 같은 소련 공업력의 회생과 전시경제의 궤도에 올라서던 시기까지는 아직 반년이상이나 남아 있던 그 시점에서 소련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독일의 포화에 맨몸으로 버텨내야 하는 힘겨운 시간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소련은 독일에 대한 반격을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소련 철도망의 주요 집결지인 하르코프를 노리고 돌격을 했었다. 이때 독일의 만슈타인이 이들 소련군들을 '박살' 내 버린다. 아무리 지난겨울에 밀려났다 해도 천하의 독일군이 아니던가?


 


이 하르코프 공방전은 히틀러와 스탈린 두 명에게 엄청난 정치적 득실을 가져다주었다. 히틀러의 경우는 무적의 독일 기갑군이 지난겨울 [실수]로 밀렸다는 걸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되어 주었고, 스탈린에게는 개인의 지도력 자체에 의구심이 들게 만들어 버렸다. 여하튼 히틀러는 하르코프의 승리에 힘입어 1942년 4월 5일 지령 41호를 발표한다.


 


- 소련에 남은 방어 잠재력을 모조리 쓸어내 버리는 것


 


즉, 소련의 전쟁 물자와 공업 생산력, 식량 등등의 주요 공급지인 소련 남부 지역을 쓸어버리라는 것이다. 결국 이 지령은 작전명 블라우(Blur)...청색작전으로 구체적으로 입안되었다.



이 작전은 소련의 기름줄을 말라붙게 만들어 전쟁 자체를 끝내버리겠다는 히틀러의 단호한 의지로 시작된 작전이었다. 소련을 말려죽이기 위해 히틀러는 아스트라한에서 시작해 그로즈니까지 다다르는 지역을 점령한다는 계획인데...한마디로 코카서스 지방을 날로 뚝 떼어먹겠단 계획이라 보면 된다. 그 사이에 볼가강을 배경으로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던 게 바로 스탈린그라드였다.


 


음 스탈린그라드...원래는 볼가강을 끼고 도는 도시였다고, 볼고그라드란 이름이 붙어 있는 동네였다(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900킬로 떨어져 있던, 딱히 내세울 거 없는 그저 그런 쪼그마한 도시였다). 문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볼세비키의 적군과 맨세비키의 백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였던 적백내전 당시 우리 스탈린 아저씨가 이 동네에서 백군의 정예였던 코사크 기병대를...나폴레옹을 무찌른 그 기마병들을 이겨 버린 것이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스탈린은 최고 지도자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이 도시를 자기 이름을 따서 "스탈린그라드"라고 바꾸더니 이 시골 촌동네를 인구 50만 명이 사는 계획도시로 바꿔버린 것이다).


 


5. 부글부글 끓는 솥으로...


히틀러는 일단 [크레믈린 작전]이란 걸 실시하였다. 이 작전은 별게 아니었다.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노리고 있다는 분위기를 계속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남부 코카서스 지방을 휩쓸 병력들이 천천히 전진해 나가고 있었다.


 


1942년 6월 28일 공세는 시작되었다. 공격의 주체는 독일의 최정예 제6군이었고, 그 양옆으로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군 같은 허접한 것들이 측면을 방어 하였다(여기서 제6군이 포위된 건 루마니아 군이 원래 '허접'해서 그렇다는 말들이 많은데, 실상 루마니아 군은 할 만큼 했고, 나름대로 분전을 했었다).


 


어쨌든 7월 말까지 히틀러의 군대는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에 만족한 히틀러는 최종적인 숨통을 끊으려 했다. A집단군은 카즈카즈로 유전지대를 확보하고, B집단군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내 점령하라는 것이다. 이 당시 소련이란 나라는 카즈카즈에서 원유와 식량을 생산한 다음 이를 볼가강을 통해 북부 공업도시로 수송. 이 식량과 원유를 가지고 전쟁 물자를 만들고, 주린 배를 채우는 형국이었다. 만약, 카즈카즈를 점령한 상태에서, 볼가 강 줄기에 자리 잡은 스탈린그라드를 움켜쥔다면 이야기가 좀 요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거기에 더해 스탈린그라드라 동네가 전쟁 터지고 나선 소련군 전차 생산량의 25%를 생산해 내는 병기창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스탈린그라드가 떨어진다는 건 소련으로선....게임종료였던 것이다.


 



 


결국 파울루스의 제6군은 8월부터 천천히 스탈린그라드로 밀고 내려갔다. 당시 소련측과 독일군 측의 병력비는 187,000명대 250,000명...전차는 360대 대 760대, 항공기는 무려 330대 대 1,200대였다. 공격자 측이 병력 상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8월 한 달간의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포진해 있던 고르도프(Gordov)의 62, 64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으며 스탈린그라드로 계속 밀려들어가는 양상이었다. 히틀러는 신이 났고, 스탈린은 어쩔 줄 몰라하며 희대에 회자되는 명령 227호를 발표 하게 된다.


 


명령 227호란 간단히 말해서 [후퇴불가 명령]이었다. 말 그대로 소련군의 모든 병사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단 1미터도 후퇴를 할 수 없다는 명령이었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파울루스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소련군을 스탈린그라드로 차곡차곡 몰아넣고 있었다. 결국 스탈린은 무패의 신장이라 불리던 상승장군 쥬코프를 다시 불렀다. 그리곤 [최고 사령관 대리]란 자리를 내려 줄 터이니 스탈린그라드를 구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쥬코프는 신임 참모총장이었던 바실레프스키와 함께 스탈린그라드를 구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자 문제는 소련군과 스탈린그라드의 결합이란 점이다.


 


스탈린그라드의 50만에 달하는 인구중 상당수가 [꽤 젊은 축]에 들어가는 인구였고, 이들은 자연스레 소련군에 합류해 전투에 뛰어들게 된다. 더군다나 이들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만들던 건?? 그렇다 총이나 대포, 탱크 같은 군수 물자였다. 즉, 이들은 자연스럽게 무장 게릴라가 되었다(지형적인 부분도 중요했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을 낀 상태로 길게 늘어선 상태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강을 배경으로 좌우로 쭉 펴져 있고, 건너편에도 전초기지가 있는 상황! 한마디로 도시공격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포위공격이 영 껄끄러운 조건이었다. 파울루스도 대포 쏘고, 탱크 달리며 치고 들어가는 것 까지는 쉽게 진행했는데, 그 다음이 영 마뜩치 않았다. 결국 항공기와 포병을 동원해 쑥대밭을 만드는 것 까지는 했지만, 역시 마지막은 보병이 들어가 깃발을 꽂아야 하는 것 아닌가? 거기서 사단이 터진 것이다).


 


자 여기서 또 한명의 장군이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추이코프 중장이었다. 이 녀석이 누구냐면, 62군단장이다.


 



 


그 전에 있던 로바틴이란 녀석이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자고 말했다가 짤리고, 이 녀석이 자리에 앉게 된다. 이 녀석이 등장하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왜? 이 녀석은 자기 휘하의 병력들을 전부 10명 단위로 쪼개 스탈린그라드에 골고루 흩뿌리게 된다. 아무리 독일 애들이 폭격으로 스탈린그라드 시민 4만 명을 불태워 죽이고, 때려죽이고 하더라도, 이제 10명 단위로 쪼개 흩어진 이 병력들의 치고 빠지는 전술에 독일군 애들도 지쳐 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보태서 몇 번의 전투로 [학습효과]를 얻은 소련군은 최대한 독일군에 근접한 다음 공격하는 수법으로 독일군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 피아간의 교전 거리는 수류탄 투척거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


 


추이코프가 자기 휘하의 병력들을 몰아세우며 역설한 말이었다. 결국 추이코프의 이 말은 병사들에 의해 그대로 실현되었고, 그가 한 말이 옳았다는 걸 몇 개월 뒤 증명 할 수 있게 된다.(당시 스탈린그라드의 주요 방어거점에 대한 소련군의 방어 태세는 거의 '철옹성' 수준이었다. 반 지하층에 대 전차포, 그 위해 기관총이나 기관포 진지, 그 위에 저격수와 관측병, 지붕에 박격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독일군이 점령하려고 마음먹으면 점령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뺏는 과정 중에 독일군이 숱하게 죽어나갔다는 점이다. 스탈린그라드는 점점 시가전에 특화된 전투 방법들을 몸으로 보여주게 된다)


 


여기까지가 영화 <스탈린그라드>가 시작되기 직전까지의 상황이다.


(목차 제목으로 "솥"이란 말을 썼는데, 당시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솥(Kessel)이라고 말했었다. 그걸 따온 것이다. 걍 참고하라고...)


 


6. 스탈린그라드는 무얼 말하려 하는 영화인가?


1942년 8월 이탈리아의 포토 세르보에서 휴양을 하고 있던 336대대 2중대 1소대 대원들. 포도주 병을 한 손에 들고, 이탈리아 여자들이랑 희희덕거리며, 이 영화는 시작한다. 전임 소대장 옆에서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이들은 대대 집합 신호를 듣고는 연병장으로 향하게 된다. 넓은 공터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역시 바른생활 군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한스 비츠란트 중위를 새로운 소대장으로 맞아들이게 되는 1소대 대원들. 그들은 러시아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러시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당시 독일군이 가지고 있었던 소련에 대한 대략적인 생각들을 알게 된다.


 


- 러시아 놈들을 박살내서, 3일안에 점령하자!!


 


그 들은 그렇게 유유자적 피크닉 가듯이 즐겁게(?) 죽으러 갔다. 거기서 우리의 모범군인은 건방진(!) 소대원이던 롤로와 내기를 하게 된다. 소대장이 죽는데 용천수 두 박스를 걸겠다는 이 녀석에게 소대장은 서로 누가 살 것인지 내기를 걸기로 한다. 음...좀 멍청한 내기이지? 이때 귀가 요상하게 생긴 프리츠가 이 내기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


 


- 죽으면 어떻게 받지??


 


대충 분위기 썰렁해 질 때쯤 1소대 병력들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하게 된다. 처음부터 독일 헌병들에게 개망신을 당한 한스 중위 그 다음날 곧바로 지휘관에게 보고하지만, 별 소득 없이 첫 번째 임무에 투입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가 바로 독일인도 착하고, 나름대로 인간미가 흐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단 걸 느끼게 된다.


 


- 병사들의 잔인함에 이의를 제기 합니다!!


 


한스 중위...스탈린그라드에 오자마자 분위기 파악 못하고 앉아 있고, 그런 그를 비웃는 할러 대위. 영화 전편에 걸쳐 [나쁜 독일군]이미지를 관객들에게 각인시킨 할러 대위는 여기서부터 특유의 비열한 웃음으로 관객들에게 [나쁜놈]이란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 시키게 된다.


 


실제로 영화 전편에 흐르는 군인들을 보면, 감독은 독일군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각자의 상황을 설명한다. 독일군은 나쁜 놈들만 있었던 게 아니다란 사실을 은연중에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영화 자체가 독일인들이 이제 우리도 할 말이 있다라고 말하며 만든 작품이니까....


 


일단 이 영화에는 크게 나눠 세 부류의 군인이 나온다. 잔학무도하고, 같은 독일군에게도 배척 받던 할러대위. 영화상에서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진정한 [무인]으로써의 모습을 보여준 중대장 헤르만 대위. 오발 사고를 낸 디터에게 [만세돌격]을 시킨...좀 잔인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지만, 따져 보면 [군인]으로서의 직분에 가장 충실한 인물 되겠다. 팔 한쪽이 의수라는 설정은 이 녀석이 좀 치열하게 싸웠구나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중에 한쪽 다리마저 썩어 들어가는 상황에서도 전선으로 나가려 하는, 말 그대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군인답게 싸웠던 녀석이다.


 


그리고 오도가도 못 하고 갈팡질팡하던 휴머니스트 한스 비츠란트 중위. 감독은 이 녀석을 주인공으로 삼아 독일군 중에도 이런 녀석이 있고, 대다수의 독일군들은 어쩔 수 없이 잔혹해 졌었지, 따져보면 괜찮은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독일군 상을 그려낸 것이다.


 


여하튼 이 녀석들이 투입된 첫 작전은 공장 건물 안에 짱 박혀 있던 기관총 진지를 공격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전진 도중에 디터는 오발 사고를 냈고, 헤르만은 오발사고를 내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시킨 디터에게 만세돌격을 시킨다. 결국 디터는 죽고 기관총좌는 분쇄된다. 씁쓸하긴 씁쓸한 장면이다. 이어지는 공장 건물 안에서의 시가전은 스탈린그라드 전쟁 내내 독일군이 겪었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 전투는 격렬해서 독일군이 낮에 점령한 시설물이나 구역을 밤이 되면 소련군들이 기습하여 다시 빼앗고, 다시 낮이 되면 독일군이 이 지역을 확보하는 그야말로 물고 물리는 접전의 연속이었다. 이런 물고 물리는 접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중앙 기차역이었는데, 무려 15번이나 그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10월까지 붉은 10월 공장과 바리케이드 공장은 수차례나 주인이 바뀌며 격전을 벌였지만, 전투엔 어떤 진전이 없었다.


 


볼가 강 건너편에서 소련군은 계속 통통배나 나룻배에 병력이나 무기를 실어 스탈린그라드로 보냈지만, 이중 25%는 볼가 강에 가라앉아야 했다. 바로 독일공군의 활약이었다. 문제는 이 스탈린그라드라는 도시 자체의 위치적 특성이었다. 당장 볼가 강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사면이 포위된 마당에 보급이나 병력지원을 위해선 강을 타고 들어오는 수 밖에 없었는데, 제공권이 독일군 손아귀에 있는 상황에서의 도하작전은 죽음을 등에 달고 뛰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 영화 초반에 볼가 강을 건너다 몰살당하고 죽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음 어쨌든, 최초 400명으로 시작한 336대대는 극 중반정도에 이르자 62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독일군의 장기였던 기갑전과 전격전은 스탈린그라드란 도시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원래 시가전 이란 것이 [피를 빨아먹는 진공펌프]와 같은 존재로서 공격자 측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수비자 측이야 홈그라운드란 이점을 십분 살려서 도시의 구석구석에 병력을 분산 시킨 다음에 게릴라전으로 나선다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유사 이례로 시가전이라 불리는 것들...특히 2차 세계 대전 때부터 시가전을 벌리는 측은 그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선 [상당한 각오]와 함께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 번째 방법은 도시를 포위한 체 보급로를 끊고, 도시 자체를 고사시키는 방식이고, 두 번째 방법은 도시 전체를 초토화 시키는 방법이었다. 독일군은 이 두 가지 방법 중 두 번째 방법을 쓰게 되는데, 도시 전체를 맹폭하고, 도시에 한발 한발 내딛으며 여차하면 쓸어버리며 진격을 했지만, 소련군은 이 맹폭을 피해가며 독일군을 괴롭혔던 것이다. 어떻게?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대한 독일군에 붙어서 공격을 한 것이다. 화력지원을 못하게 말이다.


 


여기서 이 전쟁에 대한 [히틀러]의 입장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1942년 11월 8일 날 히틀러의 연설이라고 자막이 나오면, 뮌헨에서 열린 나치당의 전당대회 식장에서 연설하는 히틀러의 목소리가 들린다.


 


- 나는 볼가 강 유역에 있는 특정 도시를 겨냥했다. 우연히도 이 도시는 스탈린의 이름을 땄다. 도시 이름이 목적은 아니다. 그곳은 요충지대 이다. 곡물 3천만톤 기름 9천만톤의 차단이 목적이다....(중략) 난 이 도시를 겨냥해 얻었다. 이젠 소수의 주민만이 남아있다....


 


당시 히틀러와 스탈린, 그리고 스탈린그라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장이 이 두 강대국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이름이 걸려있는 도시를 지키고 못 지키고를 가지고 서로 자존심 대결로 치달았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었고, 히틀러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자기는 이름에 연연해서 도시를 공격한 게 아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실제적인 스탈린그라드 점령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은 이런 주변의 시선에 대한 강력한 반박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이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가 이미 독일군 손에 들어왔다고 선언했고, 소수의 주민들이 현재 미미한 저항을 보이고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실상은 이 라디오를 듣던 한스 부대의 모습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자자, 각설하자. 일단 이 녀석들 상당히 인간적인 군인 이란 걸 강조하기 위해서 소련군과 20분간 휴전을 하고, 그 사이에 부상병들을 옮기자는 제의도 하고, 하수도 사이에 있던 아줌마와 애들은 안 쏘는 모습도 보여주지만, 역시 전쟁은 비참한 법. 결국 이 녀석들 부상당한 동료를 끌어안고 야전 진료소로 갔다가 깽판 쳤다는 이유로 [징벌부대]로 배속 받게 된다.


 



 


징벌부대가 뭘까? 간단히 말해서 죄지은 놈들 모아서 지뢰제거나 통로 개척 같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위험 한 임무에 투입하는 걸 전문으로 하는 부대다. 원래 이런 징벌부대에 있어선 소련군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활발한 활용을 보여주었다. 2차 세계대전 내내 총 442,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을 [형벌대대]란 이름으로 구성해서 써먹었다. 이들은 언제나 쇠사슬이나 줄에 굴비 엮듯이 엮여져서 공격개시선 까지 끌려간다. 그리고 그 뒤편에 중기관총을 배치하고는,


 


- 앞으로 돌격해서 죽던가, 아군의 기관총에 맞아 죽던가 택해라!!


 


그러고 나선 그제서야 무기를 지급해 준다. 그리곤 독일군 진지로 돌격을 시키는 것이다. 이 형벌대대의 1차 공격이 있은 후에 본대가 공격했던 것이다.


한스 중위 일행들은 이런 징벌대대에 투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탄절 아침까지 지뢰를 제거하다가, 결국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군인다워 보였던 헤르만 대위의 설득(?)과 회유에 의해 마린오브카로 향하게 된다 (빵 조각 하나에 목숨 거는 처량한 한스 중위가 보이는데, 그 성탄절날 밤에 독일군은 1,280명의 아사자를 기록하였다...빵조각 하나에 목숨 걸만 하지 않은가?).


 


- 호트 장군을 마중하려면 여기를 지켜 내야 해!!


 


자, 여기서 우리는 호트 장군을 왜 마중 나가야 했는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최고사령관 대리인 쥬코프와 참모총장 바실레프스키는 스탈린그라드를 구하기 위해선 찔끔찔끔 지원해 들어가다가 몰살당하는 그때까지의 방식으론 스탈린그라드를 구해 낼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결국 이때 나왔던 해결책이란 것이 [또 다른 해결책]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 해결책이란 게 다른 게 아니었다. 모스크바 근교에 짱박아 두었던 쌩쌩한 병력들과 여기저기 끌어올 수 있는 모든 가용병력과 장비들을 모아서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있는 독일 제6군을 밖에서 다시 한 번 포위하자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게 과연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을 보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때 쥬코프는 이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선 45일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9월 13일의 일이었다.


 



 


42년 하반기부터 슬슬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소련의 공업생산력에 힘입어 쥬코프는 제6군을 역 포위하는 작전. 바로 [천왕성 작전]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결국 쥬코프는 100만 명의 병력과 14,000문의 화포, 900대의 전차와 1,000대의 항공기를 총집결시켰고, 기온이 더 떨어져 전차가 기동할 정도로 땅이 굳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독일군 역시 이 소련군의 병력 이동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어째야 할지를 고민하는 척(!!) 하다가 다시 전투로 내몰렸다. 히틀러의 11월 8일 연설이 있은 다음날 당시 독일 육군 참모총장인 차이츨로 장군은 마지막으로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자고 말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무시했다. 차이츨로에게 돌아온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나는 볼가 강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흘러 기온은 더 떨어지고, 11월 13일날 쥬코프는 스탈린에게 천왕성 작전의 최종 계획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쥬코프에게 모든 사항을 일임하였고, 쥬코프는 11월 19일 북쪽 측면 공격일로, 11월 20일을 남동쪽에서의 공격 개시일로 잡았다. 스탈린그라드를 쥬코프의 양팔로 감싸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월 19일 독일군의 측면을 방어하고 있던 루마니아 3군에 대한 일제 포격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T-34 전차들이 밀고 들어간다. 루마니아 3군은 그렇게 몇 시간 만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상황은 남쪽의 루마니아 4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손을 써보지 못할 정도로 전선은 급속도로 무너져 내렸다. 독일 공군들 역시 새벽의 악천후를 이용해 공격해 오는 소련군을 저지 할 방법이 없었다(당시 독일공군은 시계불량으로 이륙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절대사수란 엄명을 내렸고, 그 옆에 앉아 있던 괴링은


 


- 하루에 500톤씩 공중수송으로 보급을 해주겠다!! 걱정 말고 싸워라!!


 


이러면서 등을 떠민다. 문제는 25만의 병력을 먹여 살리는 데에도 최소한 600톤의 물자가 필요했는데, 500톤의 물자라니...물론 500톤이란 물자가 날아와도 문제였다. 이 5백 톤의 물자를 실어 나르려면 최소한 10여개의 비행장을 가지고 돌려야 하는데, 이때 스탈린그라드에서 파울르스가 확보한 비행장은 세 군데 뿐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0톤의 물자를 약속한 괴링이었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 중 하나는 이제는 제공권이 소련군 측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6군의 보급을 위해 독일 공군의 수송기가 떴지만, 소련 공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격추되었다.


 


이 공수작전 기간 동안 독일 공군은 총 488대의 수송기를 잃고, 승무원 1천명 이상이 죽어야 했다. 이런 막대한 희생을 치루고 스탈린그라드에 투하된 보급품이 뭔가 좀 실용성이 있는 거였다면 모르겠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을 남겨 두고 독일 수송기에서 떨어진 캡슐에서 나온 철십자 훈장처럼 스탈린그라드에서는 영 쓸모없는 것이 날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행정 착오에 의해 아사 직전의 6군 병사들에게 신품 철모나, 칫솔 같은 황당한 물건들이 떨어지는 게 비일비재 하였다). 그 나마도 12월과 1월의 악천후 기간 동안에는 1일 100톤 이하로 뚝 떨어져 6군에는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미 11월 23일 포위망은 완성된 상황에서 쥬코프는 스탈린그라드 주위를 완전 포위하고 이 원안에 60개 사단과 탱크 1,000대를 포진 시켜 놨다. 완전한 포위망이었다. 이 안에 독일 6군과 제4장갑군의 일부...총 280,000명 가까이가 이 원안에 갇혀 버렸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히틀러는 그가 믿고 있던 전략의 천재 만슈타인에게 불가능한 명령을 내렸다.


 


- 6군을 구출한 다음에 소련군의 반격을 분쇄하고 이전의 점령지까지 탈환 하도록!!


 


만슈타인은 황당했다.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병력이라곤, 겨우 소련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온 제4장갑군 뿐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60개 사단이 포진해 있는 스탈린그라드로 달려가 이들을 물리친 다음에 다시 이전 점령지까지 탈환하라니...만슈타인은 결국 제6군의 구출에만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 제6군 병력의 70~80%만 구출해 내도 대 성공이다.


 


결국 12월 12일 만슈타인은 호트 대장의 제4장갑군을 출동시킨다. 폭풍작전의 시작이었다. 이미 4장갑군 예하의 11 전차사단이 양동으로 소련군의 주위를 끈 상황에서 4장갑군은 열심히 내쳐 달려 나갔다. 만슈타인의 생각은 아주 간단했다. 제4장갑군 으로 탈출로를 뚫고, 제6군은 이에 호응해 제4장갑군이 개척한 탈출로를 따라 탈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탈출로를 여는 작전을 [폭풍작전] 그리고 여기에 호응해 6군이 탈출하는 작전이 [천둥작전]이 된다. 영화상에서 보면, 마치 헤르만 대위가 호트 장군을 마중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상 파울루스는 탈출할 생각이 없었다.


 



 


영화상에서 보였듯이 한때 호트가 이끄는 제 4장갑군은 스탈린그라드 100킬로 전방까지 도달하였지만, 제6군은 탈출할 준비도, 생각도 없었다. 왜? 바로 파울루스의 [소심함]이 문제였다. 탈출로가 대충 뚫린 상황이 되자 만슈타인은 부지런히 파울루스에게 탈출을 종용하였지만, 파울루스는 요지부동이었다.


 


- 총통이 탈출하지 말랬어.


 


만슈타인으로서는 미치고 환장 할 노릇이었다. 결국 자신의 참모인 아이스만 소령을 스탈린그라드로 들여보내 파울루스를 설득하려 했지만,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나올 생각이 없었다.


 


- 봄까지만 버티면 된다. 보급품만 제대로 온다면 해 볼만 하다.


 


결국 만슈타인은 6군을 포기해야 했었다. 소련군을 잠시나마 갈라놨던 4군 역시도 소련군의 협공에 의해 포위당할 위험에 노출되었고, 만슈타인은 4군의 퇴각을 명령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영화상에서 전투를 벌였던 12월 24일 날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파울루스는 어째서 스탈린그라드에 죽치고 앉아있기를 원했을까? 단순히 총통의 명령 때문에? 일단 파울루스란 인간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영화상에서 보면 팍 삭아 보이는 모습에 요란한 군복을 입은 파울루스란 인간은 군인...특히 지휘관으로선 부적합한 인물이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 녀석은 당시까지 독일 군대의 주류로 볼 수 있었던 귀족출신 장교가 아닌 시민계급 출신의 장교였었다. 그렇다고 롬멜처럼 군사적 천재성을 발휘했던 인물이냐면 그 역시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참모의 모습이 바로 파울루스였다. 매사에 꼼꼼하고, 냉정을 잃지 않는 성격 덕분에 유능한 참모란 소리를 많이 들었던 파울루스는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또 알아주는 장군이었다. 그는 실제로 히틀러가 전략적 천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다했던 장군이었다. 그는 베토벤을 사랑했으며, 또한 히틀러를 사랑했었고, 자신의 외모에 까다로웠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 병사들 자체가 포위되기 직전에 탈출 할 수 있음에도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도시를 벗어나 황량한 눈밭을 걸어나갔다가는 소련군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죽을거란 생각에서 안락하게 도시에 눌러앉아 구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속편하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건 조만간 자신들이 구출 될거란 강력한 믿음이 있었을 때까지였다)


 


이런 그가 제6군을 맡게 된 것은 42년 1월 6군사령관이던 발터 폰 라이헤나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였다. 문제는 참모로선 유능한 파울루스였지만, 지휘관의 소양 중 하나인 과감성과 결단력에 있어선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몇 번의 실기 끝에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 된 채 서서히 말라 죽게 된다.


 


43년 1월 8일. 소련군은 개전 이후 최초로 독일군에게 "항복권고"를 하였다. 독일군이 느끼는 심리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언제나 독일군 발밑에서 채이던 녀석이 이제 "명예로운 항복"을 권유하는 입장이 되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 항복권고는 거부되었고, 1월 10일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내의 제6군 병력보다 더 많은 수의 대포를 끌어다가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소련군의 공격으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은 반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건 어떤 최후를 선택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쯤 되자 히틀러는 43년 1월 30일 날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킨다는 전문을 스탈린그라드로 보냈다. 왜 그랬을까? 그렇다...독일의 육군사에서 원수가 항복한 전례는 없었던 것이다. 즉, 파울루스 보고 항복하지 말고 죽으란 소리였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관례를 따르기 보다는 새로운 전통을 세우길 원했다. 파울루스는 항복을 했고, 스탈린그라드에 남아있던 제6군의 잔존 병력 91,000명은 장군 24명의 인솔 하에 항복하게 된다. 불과 2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280,000명을 자랑하던 독일 제6군은 2개월 만에 병력의 2/3를 잃었던 것이다. 훗날 이 91,000명의 독일군 중 다시 조국 독일의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인원은 불과 6,000명이 고작이었다.


 




 


7. 뒷이야기....


영화에서 주인공 한스의 대사 중 기억에 남는 대사가 하나 있다. 스탈린그라드의 격전이 마지막에 다다를 무렵 굼라크 비행장 쪽으로 가 탈출하려는 병사들에게 던진 말이다.


 


- 너희들은 탈영할 자격이 있어


 


스탈린그라드의 그 어떤 대사보다 기억에 남는 대사였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을 견뎌내며, 독일군으로써의 의무를 다한 부하들에게 지휘관이 한 말 치고는 조금 처량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대사였다고 판단된다.


 


빌스 마이어 감독은 스탈린그라드의 설원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찰이나, 전쟁에 대한 의문을 말하기 보다는 독일인 역시 피해자라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들이 밀었다. 전투의 참혹함이나 볼거리는 할리우드에게 밀렸고, 인물간의 긴장감이나 갈등 심리묘사는 영화 홍보 할 때 그렇게 자랑하던 [Das Boot]의 스탭들의 실력으로서도 메꾸기 힘든 간극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단순히 그렇고 그런 독일인들의 자위영화라 말할 순 없다. 이 영화의 미덕은 지금까지 할리우드 입맛에 따라 재단되어진 [숨겨진 진실]을 어느 정도는 벗겨 낸 작품인데다가, 거기에 더해서 스탈린그라드란 [참혹한 전장]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그것이 위선의 탈을 뒤집어 쓴 휴머니즘이라 하여도)으로 그려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평가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독일인의 시각으로 독일에 대한 변명을 하였다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할리우드식의 왜곡과 진실의 호도에 비하면 애교로 보아 넘길 만 한 수준이 아닐까? 적어도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반성은 있어왔고, 그 전쟁에서 가해자임은 인정하면서도 또한 그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였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빌스마이어는 이 영화를 통해서 독일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토가 가망 없는 전투를 끝까지 지휘하려는 헤르만에게 왜 항복을 안 하느냐고 물었을 때, 헤르만은 변명하듯이 이렇게 말한다.


 


- 난 나치가 아니라네...


 


오토는 그런 헤르만에게...아니 독일 국민 모두에게 던지는 한마디를 말한다.


 


- 아뇨 당신들은 더 심해요...못난 장교들!! 책임자가 미치광이 인줄 알면서도 따랐잖아요...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방관자에 대한 질책으로 보기엔 너무 늦은 한마디 같다. 히틀러가 죽은 지 벌써 반세기가 훌쩍 넘어가는데 말이다. 그래도 자기반성과 참회를 수반한 변명은 받아들이기에 수월하다란 걸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