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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에서 무기력하게 드러누워 생각해본다. 지난달 쓴 공채 지원서는 모두 서류 광탈. 영국 석사 졸업예정자, 경력 2년, 인턴 3번, 영어, 중국어,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까지 갖췄는데, 신입사원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무래도 신입사원하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분명 올해 영국에서 만 30살 생일파티를 했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곧 32살이 된단다. 난 아무래도… X된 것 같다.

 

대차게 퇴사하고 시작한 유학생 시절, 딴지에 팬데믹 시대의 혐오와 연대에 대해서 논하고 미래 학교 교육의 변화를 촉구하는 글을 썼을때만 해도 가슴이 참 웅장했었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고국의 취업시장은 코로나로 꽝꽝 얼어붙어있다. 내 계획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당장 밥벌이부터 걱정해야하는 암울한 처지. 한없이 작아진 나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30대 실업 청년의 참담한 고백에 딴지 편집부 담당기자는 눈치 없이 신이 났다.

 

당신은 정말이지 X된 것 같군요. 당신의 X됨은 ‘망했다’나 ‘큰일 났다’ 같은 그 어떤 다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진정한 ‘X됨’인 것만 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 X됨의 기승전결을 담아 새 연재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웃지도 울지도 못할 그의 제안에 그저 깊은 한숨을 나올 뿐이다.야이편집부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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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생 뉴질랜드 소녀 베니(BENEE)의 노래 ‘Supalonely’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난 망했어, 난 루저야 (I know I fucked up, I’m just a loser).”

 

노랫말과는 다르게 흥겨운 템포로 외치는 이 노래를 요즘 듣고 있자면 현실에 초탈해지며 외려 매우 흥이 난다. 그래서 나도 발랄하게 어쩐지 X된 것 같은 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의 X됨 연대기에는, 기껏 어렵게 취업해놓고 몇 년 만에 퇴사하는 ‘요즘 것들’의 속사정이, 퇴사가 아른거리는 이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가, 그리고 같은 고민에 처해있는 이들에게는 이심전심이 될지 모르겠다.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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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했던 월급과 명함이여

 

3년 전, 나는 ‘졸업생=임용고시생’ 등식이 성립하는 사범대를 졸업했다. 애초에 교직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했던 나는, 운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했다. 나는 신림이나 노량진에서 고생하는 동기들에게 여유 있게 베푸는 쪽에 가까웠다.

 

고시 공부나 취업 준비에 지친 친구들에게 고기를 사주고, 때때로 동아리 후배들 회식에 양복 차림으로 가서 멋지게 카드 슬래시를 선보이던 날들. 사촌 동생, 조카들에게 명절 용돈 챙겨주며 집안 어른들 앞에서 어깨 으쓱할 수 있던 날들. ‘우리가 시간이 없지, 돈이 없냐’ 하면서 직장동료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미친 듯이 말 달리는 야간 할증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그 찬란했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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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돌이켜보면 20대에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과 명함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그러나 어느 순간, 탄탄함을 잃고 늘어지는 뱃살과 총기를 잃게 하는 그 달콤함이 싫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그 나이, 서른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나같이 충만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에 쫓겨 영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나의 통장 잔고는 60만 원. 심지어 아직 교통비와 휴대전화 요금이 빠져나가기 전이다. 하루 세 번 양치 열심히 했는데 생겨 억울한 충치 치료비와 재취업을 위한 각종 자격증 응시료로 계획과는 다르게 잔고가 매우 위험 해지고 있다. 분명 유학에 후회가 없었는데, 앞으로는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이 샘솟는다.

 

이젠 당장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다음 달 대출 원리금을 갚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삼 서울 가는 광역버스가 원래 이렇게 비쌌나 싶고, 생각 없이 사용하던 LTE 무제한 요금제를 꼭 써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그나마 자기소개서 쓰기 괜찮은 집 앞 카페가 아메리카노 2,500원이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 와중에 카페 갈 여유가 있네 하시는 타박하실 분도 있겠지만, 코로나19를 틈타 동네 도서관이 보수 공사 중이라 공짜로 공부하러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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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먹는 것이 익숙해져야 하는 30대 백수의 삶

 

‘기침과 사랑, 그리고 가난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코로나19 때문에 파티룸을 빌려서 저녁 식사를 한다던가, 1인 5만 원 참치집에서 모임을 할 때는, 나의 귀국을 축하해주는 이들 앞에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될 때가 있다. 영국에서 소주를 못 먹었더니 술이 많이 약해졌다는 핑계를 대며, 지하철 막차에 탑승하기 위해 뛰어가며 자리를 벗어나곤 한다.

 

그래도 귀국 후 만난 대부분의 지인은 감사하게도 밥과 술을 사준다. 어느새 대리/과장급이 된 또래 친구들과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한 동료들은 예전보다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제 주된 밥상머리 이야기는 부동산과 주식이다. 확실히 요즘 30대에는 주식이 유행인 것 같다. 나도 예전에는 주식 열심히 했었는데… 유학자금으로 전량 매도한 뒤 너무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안 되어서 이제는 대화에 낄 수가 없다.

 

그렇게 얻어먹는 자리를 마친 뒤,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친구 뒤에선 기분은 묘하다. 예전이었다면 응당 2차 계산을 하거나, 최소한 편의점에서 숙취해소 음료라도 사 왔을 텐데. 지금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서 있을 뿐이다. 나서는 가게 문을 잡아주며 민망하지 않으려 너스레를 떤다. 아이고, 이렇게 고학력 백수 밥 사주셔서 감사합니다요. 제가 꼭 조만간 자리 잡아서 보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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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부모님 집에서 먹고 자며 내 앞가림만 하면 되는 처지에, 사실 가난이라는 단어를 쓰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 과거에 비해 상대적인 허전함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저 서른 살 넘은 백수 자식이 되어 부모님 퇴근 전에 설거지와 빨래를 마치고, 저녁상을 차려드리며 죄책감을 덜어보는 것이다.

 

흐릿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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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직전, 동문수학한 친구들과 리버풀로 여행을 떠났었다. 머지강(Mersey)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게 한강변인지, 머지강변이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친구가 찍어준 흐릿한 내 사진이 왜인지 맘에 들었다.

 

비틀스의 도시에 왔지만, 코로나19로 그 어떤 라이브 뮤직바도 문을 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머지강 비틀스 동상 옆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캔맥주를 마셨다. 낯선 도시의 어두운 강변이 조금은 무서웠지만, 친구들과 건배하며 애써 무서움을 이겨냈다. 그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골목골목 처마 사이를 달려 숙소로 돌아왔고, 서로 흠뻑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나는 한바탕 웃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흐릿한 사진 한 장이건만, 그 안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렇게나 많이 담겨있다. 그리고 글에 담기지 않는 온도와 습도 그리고 내음까지도. 그러나 흐릿한 사진 한 장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꺼내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일 것이다.

 

내 영국 유학 생활도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모두에게 내보일 수 있는 전리품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결국 남들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되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이다.

 

다시 한번 구직 시장에 뛰어들며 불확실한 미래를 마주하는 요즘,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나를 내보여야 하는 시간이다.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나를 포장하여 내보이고, 값이 매겨지고, 쉽사리 선택받지 못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래도 두 번째 도전하는 구직활동이니 조금 나을까 싶었는데, 애달픈 마음은 처음과 다를 바가 없다.

 

저도 생각없이 퇴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지금은 모두가 살기 퍽퍽해진 바람에 잠잠해졌지만, 코로나19 사태 이전 퇴사는 커다란 사회적 화두 중 하나였다. 중소기업, 대기업, 심지어 공공기관까지 신입직원 일 년 내 퇴사율이 두 자릿수를 넘어서는 시대. 밀레니얼 세대는 직장인이 부러운 취준생, 퇴사를 꿈꾸는 직장인, 취준생으로 돌아간 퇴사자가 뒤섞인 동년배들과 살아가고 있다. 90년대생 밀레니얼에게 퇴사와 이직은 60년대생 베이비부머의 정서와는 다르게, 나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일까. 의외로 퇴사를 이야기했을 때 주변에서 말리는 사람 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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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