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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여행을 가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사람과 자연의 마주함이 다르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마주할 때는 상대방의 말과 표정을 주의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반면 자연을 마주하는 것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주의 깊음이다. 사람을 마주하면 상대방을 알 수 있지만 자연은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우주가 열리는 밤하늘과 자연이 내는 소리만이 가득한,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다시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어느 낮선 곳에서 홀로 밤을 보내면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자신보다는 타인을 바라봐야 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자신만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아주 작은 짐승의 발걸음은 늑대나 멧돼지, 곰의 움직임 같고, 나무 열매가 떨어지거나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폭탄이 떨어지거나 태풍에 나무가 흔들리는 것 같이 들린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문명생활에서는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없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자연도 잠에서 깬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다 일어나기를 반복했고 잠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몸은 가볍다. 공기가 좋아서거나 맑은 물로 밥을 지어 먹어 그렇다는 흔한 도시 농담, 문명의 농담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그럴싸한 말이 있다.



 “정말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그 순간에 머물고 싶다. 지금 이곳 그리고 저기”



벤 스틸러 주연의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대사다. 이 말 역시 문명의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경험해 본 사람은 수긍할 만한 말이다.


밤새 신경을 곤두세우며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지만 깨어날 때와 잠들 때는 다르다. 불안감으로 깨어날 때 기분 좋지 않다. 하지만 다시 잠드는 그 순간을 생각해보라. 잠들기 전 아주 짧은 순간 평온해진 마음 상태여야 잠이 들 수 있다. 그 순간. 아마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순간에 머물렀던 그 순간이 영화 대사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연초에 담배와 술을 끊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한 몸 만들려 하거나 영어, 컴퓨터, 독서 등 자기계발을 한다는 새해 다짐, 많이들 하실 것이다. 그것도 좋지만,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가지는 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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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스틸러 감독, 주연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원제: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에 글을 써봤다. 영화 소개와 더불어 무심코 지나칠지 모르는 장면과 의미에 대한 깨알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며,


월터의 비밀 속으로 가보자. 



* 줄거리


16년간 LIFE지의 사진 편집을 해온 월터 미티. 그에게 LIFE지가 폐간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LIFE지의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은 삶의 정수를 담아낸 자신의 최고 작품이라며 LIFE지 마지막 호 표지 사진으로 자신이 보낸 필름 중 25번째 필름으로 하라는 편지와 함께. 하지만 숀이 보내온 필름에는 25번 째 필름이 사라진 채 월터에게 보내진 것이다. LIFE지에서의 마지막 작업이 될지도 모르는 사라진 25번 째 필름을 찾기 위해 월터 미티는 숀 오코넬이 보내온 다른 필름을 단서로 숀을 찾아가게 되는데...




25번 필름은 사라진 채 24, 26, 27번의 세 장의 필름이 월터에게 전해진다. 영화는 필름 번호 역순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각각의 필름은 영상과 대사로 채우지 못했던 부분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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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필름을 단서로 사진 작가 숀 오코넬을 찾아가는 것처럼, 이 글에서는 필름을 단서로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알아보자.



필름 #27 워터게이트(Water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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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의 여정이 시작되게 하는 25번째 필름은 미국 수정헌법 25조를 의미한다. 월터가 분수대에서 사진을 보는 장면과 복부에 총탄을 맞아가면서 찍었다는 숀의 편지로 쉽게 유추해 낼 수 있다. 분수대가 문(gate)처럼 열려지는 장면과 워터게이트에서 유래한 “Smoking gun“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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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모킹건(smoking gun) : 연기 나는 총이란 뜻으로 범죄 또는 특정 행위나 현상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미국 닉슨 대통령의 탄핵 소추가 진행 중이던 1974년 7월 14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로저 윌킨스(Roger Wilkins)의 글에서 스모킹 건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그 글에서 로저 윌킨스는 당시 사건을 조사하던 미 하원 사법위원회의 최대 관심사가 '결정적 증거 확보'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Where’s the smoking gu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위키백과 -



수정 헌법 25조는 대통령의 승계를 규정하며 대통령이 직무상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대처법을 규정한다. 수정헌법 25조와는 달리 일반 노동자의 해고에는 아무런 안전 조치도 없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워터게이트를 통해 대통령직을 사퇴한 닉슨과 달리 성실한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월터의 실직을 비교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임기와 권한을 법으로 보호하면서 노동개혁법이라며 노동자의 일자리 권한을 없애려는 2016년 헬조선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워터게이트를 의미하는 25번째 필름이 월터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했다면 '삶의 정수'는 월터의 여정을 의미한다. “왜 여기까지 올라왔나?” 히말라야에서 월터를 마주한 숀의 대사다. 영화의 시작과 맞닿아있다.


월터는 집에서 그곳까지 갔다.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 영화는, 시계 초침 소리가 의미 없이 반복되는 공간에서, 가계부를 작성하고 있는 월터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잘 정돈된 실내와 회색빛 방안의 색채를 통해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월터의 지난 삶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다.



필름 #26 안데르센과 영화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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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월터가 헬기에 올라타는 장면이다. 월터가 헬기에 올라탄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으로의 탑승이다.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는 두려움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월터의 표정은 영화 속의 표정만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관계를 접했을 때의 관객의 표정까지 담아낸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자유를 상징하는 청바지를 입은 여인의 환송


이 장면은 동화 같은 여정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들을 등장시킨다. 엄지손가락과 술집의 술잔이다. 26번째 필름에 담긴 조종사의 엄지손가락은 안데르센의 엄지공주를 의미한다. 날개 달린 요정왕자를 만나 날개 달게 된 엄지공주가 요정나라로 떠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 엄지공주의 이야기와 달리 월터의 여정은 헬기 조종사를 만나고 그의 헬기에 올라타면서 시작된다.


신발처럼 생간 술집 맥주잔은 월터의 여정이 영화가 끝나더라도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로 안데르센의 ‘분홍신’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월터의 여동생을 핑크레이디라 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린랜드에는 여덟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라는 조종사의 말은 그림형제의 ‘백설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린랜드 인구가 고작 여덞명 일 리 있겠는가. 이십여 만 명은 산다고 한다.


배에 올라타기 전에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은 인생의 한 단면을 보게 한다. 올라갈 수 있지만 언제든 내려올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벤 스틸러만의 유머코드를 담았다. 뛰어든 바다에 상어가 있었던 것이다. 헬기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드는 월터의 모습과 상어의 등장은 여정의 위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 죠스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향한 유머다. “스티브 당신 헛다리 짚었어.” 정도의 벤 스틸러식 유머코드인 것이다. 스필버그 또한 원작인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를 영화화하고 싶었다 한다.



필름 #24 몬드리안의 직선과 자연의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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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지 사옥에 있던 몬드리안의 그림을 지나치며 출근하는 월터의 모습을 통해 월터의 공간은 몬드리안의 직선이며 단조로운 색상의 세상이라 정의한다. 그의 집과 라이프지의 사무실, 특히 폐간 소식과 인력 구조조정을 발표하는 간부들과 직원들이 함께하는 공간은 몬드리안의 수평과 수직직선만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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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적인 월터의 세상


월터의 장난감이었던 스트레치 암스트롱은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을 상징한다. 그것을 아이슬랜드 소년이 가지고 있던 스케이트보드와 바꾼다. 곡선의 세계를 향한 일종의 준비물이다. 우주비행사의 꿈과 아이들의 자연 세계와 교환한 것이다.


처음 마주하는 아이슬란드의 곡선의 풍경을 마주하는 월터는 헬기를 타던 표정보다는 조금 더 두려운 표정을 짓는다. 자연의 곡선은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준다. 접촉이다. 월터는 손에 돌덩이를 묶어 광활한 곡선의 세계를 접촉한다. 유연하면서도 익숙했던 어린 시절의 월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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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번 필름은 곡선이 자연에만 존재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월터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의 삶에도 곡선이 존재했다. 숀 오코넬이 찍은 24번째 필름은 월터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겨준 피아노의 흠집을 찍은 것이다.


피아노는 곡선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사를 하는 장면에서 새로운 집에 피아노가 들어가지 못하는 장면은 곡선을 담아내지 못하는 월터의 현실이기도 하고 피아노를 파는 장면은 새로운 곡선의 세계로 여행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정의 끝. 삶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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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해석 안 했다. 어떤 문장은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어? 영어 실력이 부족하냐고? 들켰네.


LIFE지의 모토와도 같은 여정을 거치며 월터는 25번 필름을 찾기 위해 히말라야에 도착한다. 눈표범을 찍으려 기다리던 숀에게 월터는 25번 필름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



 “당신이 깔고 앉아 있잖아?”



25번 필름은 숀 오코넬이 선물한 지갑에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LIFE지의 표지 사진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월터가 찾아낸 삶의 정수라는 표지사진은 영화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이 글은 다른 사진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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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가 실직 수당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사원증을 내려놓는 장면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붉은 글씨의 'LIFE'라는 글자는 언제라도 월터가 자신의 삶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삶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혼자 여행을 가면 잠들기 어렵다.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가 강하면 강할수록 신경은 모든 것에 집중한다. 숨소리, 심장 소리, 움직이는 소리 등 자연이 내는 소리뿐 만 아니라 자신으로 인한 소리까지 괴롭힌다.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인적도 불빛도 없는 곳에서 편안히 잠드는 방법 중 하나는 술 마시고 취한 채 잠드는 방법이 있다. 혼자 낮선 산속에서 두려움 없이 잠을 청할 때 많이 사용했던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당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무거운 눈꺼풀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결과다.


당신 마음먹은 대로 그런 순간 언제라도 마술같이 튀어나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런 방법 하나 장착하면 당신 생활이 바닥이라도 기름 친 것처럼 매끄럽게 하루하루 버텨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아름다운 순간에 머무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추천하는 방법 하나 있다.


'삶'을 내려놓는 거다. 그리 쉬운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 순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혼자 여행을 떠나라. 삶을 내려놓을 수 있는 좋은 곳을 찾아라. 월터처럼 혼자 여행을 떠나 사진작가 숀 오코넬처럼 삶을 내려놓을 곳을 찾아라.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라.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한국 제목보다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의 원작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원작의 제목처럼 비밀스런 당신을 만나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2016년이 시작됐다. 경제 상황은 지난 해 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실업문제도 그렇다. 처음으로 실직을 결험하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여전히 취업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낙담하지 말자. 인생 굴곡 험한 줄 알지 않는가. 


반복적인 일상으로 외로움을 겪고 있거나, 실직하게 되거나 취업하지 못한 수많은 너님들이 해야 할 일은 낙담이 아니다. 당신과 세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당신이 깔고 앉아 있는 지갑에 돈이 아니라 비워진 지갑만큼 당신의 "삶의 정수”를 채웠으면 하는 생각이다. 세상과 당신을 마주해 보라. 이 추운 날 그러라는 말은 아니다.


날씨 좋은 날. 그러기 힘든 분들은 영화라도 보기 바란다. 


꼭 그랬으면 한다. 끝.




P.S.


영화 내용 중 월터가 아버지 잃고 파파존스에 취직한 것과 LIFE지 직장상사와 월터가 싸우기 시작하며 떨어진 쓰레기차에 적혀있는 “Hendricks”는 바바라 헨드릭스의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 생각하게 된다. 부모의 역할을 자본이 대신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려 했으나 무리인 것 같아 뺐다. 영화가 편집됐나?








꼭그래야하나?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