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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돌아왔을 당시 콜롬비아는 이랬다

 

한국전 종전선언과 함께 참전용사들은 고국 콜롬비아로 돌아왔다. 이들의 가슴은 빛나는 훈장으로 장식되었다. 언론은 연일 귀국 환영 행사에 참석한 영웅들을 찬양했다. 그러나 축제도 잠시였다. 참전용사들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사회는 혼란했다. 당시 콜롬비아의 자유당과 보수당, 양당의 보복적 폭력은 극에 달해있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1953년 6월 군부는 쿠데타에 성공하였다. 쿠데타의 주인공은 한국전에 참전한 로하스(G.Rojas Pinilla) 장군이었다. 한국전 참전 장교들은 국방부 장관 등 주요 관직에 진출하였다. 장기 폭력 사태에 지친 대중들은 군사정권을 지지했다. 군부가 사회질서를 회복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고메즈 보수정권은 그렇게 군부에 의해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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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하스(G.Rojas Pinilla) 장군

 

군사정권은 무엇보다도 사회 안정에 주력했다. 특히 국내에서 확산되는 반정부 게릴라 진압에 사활을 걸었다. 여기서 이 게릴라들이 생겨난 배경을 잠깐 짚자면 이렇다.

 

1940년대 후반, 폭력적인 보수 정권의 독재체제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자유당의 급진개혁세력으로서 많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떠오르던 정치인 가이딴이 1948년 암살된 것이 기원이 되어 조직적인 반정부 게릴라 조직이 탄생했다. 여기에는 당시 많은 콜롬비아 지식인들의 지원이 있었다.  

 

 

이렇게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잊혀졌다

 

로하스 정권은 시위대와 반정부 게릴라 조직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하였다. 반공주의는 정부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통제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공주의 깃발 아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국내 게릴라전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시위대와 게릴라 조직을 향해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한국전의 경험은 게릴라전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중들은 이들의 폭력적 행동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공적은 기억 속으로 멀어져갔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로부터 점점 잊혀져갔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한국전쟁 참전을 포함해서 어떠한 부분에서도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오로지 군장성 및 장교들에게만 참전의 대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일반 병사들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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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참전용사들

 

참전용사들이 사회로부터 점점 잊혀지면서, 현재 대부분의 콜롬비아인들은 콜롬비아가 한국전에 참전했던 역사 자체를 모르고 있다. 참전용사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군 관련 업무 담당자 및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정도나 알고 있을 뿐이다. 

 

인터뷰 해보면, 대부분의 참전용사들은 정부와 사회로부터 자신들이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피해 의식이 많다. 정부로부터 어떠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대중들에게는 결국 비난만 받으며 사회로부터 잊혀진 그들로서는 느끼는 감정으로는 이상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총구를 자국민에게 돌리게 한 로하스 군사정권도 국내 질서 회복의 대안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적 혼란은 더욱 심화되어 국가기관이 붕괴될 직전까지 놓이게 되었다. 결국, 1957년 또 다른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새로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 세력은 군사평의회를 결성하고, 양당(자유당, 보수당) 지도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다. 

 

우리나라의 군사정권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겐 쿠데타를 새로 일으킨 세력이 정권을 문민세력에게 넘기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며 물러나는 모습이 의아할 것이다. 콜롬비아의 경우, 라틴아메리카 지역 국가 중에서도 문민정부의 전통이 강한 국가이고, 역사적으로 양당제가 견고하게 뿌리내린 대표적인 양당체제 국가이다. 

 

나름의 정당정치 체제가 견고히 뿌리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우리의 경우와는 결을 달리한다.  

 

 

정치적 독점체제 탄생과 다양한 게릴라조직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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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 대표 Laureano Gómez(왼)와 자유당 대표 Alberto Lleras Camargo(오)

 

이렇게 양당 지도부는 문민정부를 다시 만들었고, 1958년 정치 협약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정치 협약체제를 ‘국민전선(Frente Nacional)’이라고 불렀다. 이후로 16년 동안 지속된 이 체제의 핵심은 4년마다 양당이 번갈아 가며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다. 협약체제의 형성과 함께 양당의 보복적 폭력은 사라졌다. 그리고 외형적으로나마 평화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양당 엘리트의 협약은 결국 특권세력의 정치적 독점을 의미했다. 이것은 배타적 민주주의체제였다. 대중의 정치참여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대중들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장이 또 다른 방식의 정치참여로 선택되었다. 결국 반국민전선운동의 전개와 함께 혁명적 게릴라조직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게릴라조직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FARC(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 – Ejército del Pueblo)과 민족해방군 ELN(Ejército de Liberación Nacional)는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를 위협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FARC는 콜롬비아뿐만 아니라 남미 최대 규모의 게릴라 조직이다. 1964년 좌익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형성되었다. 초기부터 반미주의를 표방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념을 상실한 채 마약범죄 조직과 공생관계를 유지하였다. 콜롬비아에서 세계적인 마약 카르텔 부상과 함께 마약 생산과 운송을 담당하며 자금을 축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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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무장혁명군 FARC(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 – Ejército del Pueblo)

 

역대 콜롬비아 정권들은 FARC 그리고 ELN와 협상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게릴라조직의 정부에 대한 불신은 매번 협상 실패로 돌아왔다. 1990년대부터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의 지원 하에 반마약-테러정책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협상과 압박이라는 이중전략을 통해 게릴라조직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2016년 FARC와 평화협상 체결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FARC와 평화협정은 체결되었으나,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았다. 

 

 

콜롬비아의 평화는 아직 멀리 있다 

 

평화협정을 할 당시 FARC의 지도부는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으로 콜롬비아 정부가 추진한 게릴라 소탕 작전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고, 조직유지를 위한 비용면에서도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조직 내부에서 지도부와 중간보스들과의 갈등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부는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정치참여에 대한 보장을 통한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 등의 이권을 약속받고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지도부 중 일부는 총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약 거래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중간보스들은 평화협정을 반대했다. 그리하며 이들은 FARC를 일탈하여 제2의 반군 ELN와 협력하거나 멕시코 등 인근 국가 마약 카르텔과 동맹을 맺으며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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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군 ELN(Ejército de Liberación Nacional)

 

FARC 다음가는 규모였던 반군 ELN은 평화협상을 거부한 채 여전히 정부를 위협하며 테러 등의 범죄를 자행하고 있으며, FARC에서 이탈한 인력들을 받아들이며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고, FARC의 공백을 이용하여 제1의 게릴라 조직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와 FARC가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협정이행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이 또 다른 내전을 예고하고 있다.

 

1958년에 자유, 보수 양당의 정치 협약체제 ‘국민전선(Frente Nacional)’이 탄생하고, 4년마다 정권을 교체하며, 양당이 서로 권력을 갖는 시기가 16년 뒤에 끝을 맺었고, 지금의 콜롬비아는 지속적으로 보수성 정권이 등장하고 있다. 좌익 게릴라 활동으로 콜롬비아 국민들이 정치적으로 보수화 경향이 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으로 접어들며 라틴아메리카지역에서 좌파정권의 확산 속에서도 콜롬비아만은 우파 보수정권이 유지되었다.

 

다시 한국전쟁 당시로 돌아와 보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콜롬비아 사회는 폭력 사태로 매우 혼란했다. 강압적인 보수정권 아래 반정부게릴라운동이 형성되며, 피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콜롬비아 정부는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자신의 조국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왜 머나먼 타국의 자유를 수호해야 하는 지 알지 못한 채 수천 명의 청년들이 한국전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귀국 후, 조국의 명령에 의해 국내에서 확산되는 반정부 게릴라 진압에 동원되었다. 

 

그 이후, 이들은 암흑 속으로 사라져갔고, 희생의 대가는 굶주림을 채워줄 빵 한 조각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이 90세가 넘도록 기다리고 있는 수십 년 전 정부가 약속한 연금 소식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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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콜롬비아군에 관한 기록 - 5100명 참전 / 213명 전사 / 448명 부상 / 28명 포로.

현재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보은 차원으로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에게 의료 및 후손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차경미(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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