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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5.금요일


필독


 


 




1



 


90년대 들어 지금까지 오렌지군단은 운이 없었다. 분명 실력이 있음에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비운의 역사를 훑어보자.



 


유로 88 대회 우승 후 네덜란드는 다시 강호의 상석을 차지하게 된다. 보통 월드컵에서는 주로 대회가 개최된 대륙(주로 유럽과 남미)에서 우승팀이 나오곤 한다. 1990년 월드컵 개최국은 이탈리아였다. 당연히 2년 전 유로대회의 주인공인 오렌지군단이 강력한 우승후보로 기대를 모았다. 물론 개최국 이탈리아, 그리고 서독도 물망에 올랐다. 네덜란드는 이 앙숙 서독을 16강전에서 또 만나고 만다.



 


이 16강전은 네덜란드 입장에서 매우 아까운 시합이다. 수비의 핵인 레이카르트의 퇴장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격렬한 원수지간의 시합이었는데 그 중 레이카르트와 루디 푈러는 서로 거머리처럼 붙어서는 상대를 괴롭혀댔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독일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루디 푈러.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그러다가 전반 22분 푈러가 네덜란드 골키퍼 반브로이켈렌에게 태클을 걸었다. 불필요하고 폭력적인 태클이었다. 이를 계기로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좋게 두 장씩의 경고를 받아 퇴장 당했다. 여기서 사건이 벌어지는데, 퇴장 직후 레이카르트가 푈러에게 침을 뱉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 것이다.


 



바로 이 장면


 



축구판에서는 이 날을 '산 시로(경기장 이름)의 검은 일요일'이라고 부른다. 검은 일요일 이후의 며칠은 아마 2차 대전 이후 네덜란드와 독일의 민족감정이 가장 악화된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레이카르트의 사과로 사건은 수습국면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과가 단순한 사과가 아니었다.


 



- 루디 푈러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미안하다. 이유가 뭐든 침을 뱉은 건 잘못이니까...



 


푈러는 새됐다. 유럽에서-요즘은 북미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자란 멍에는 쉽게 벗어지는 핸디캡이 아니다. 심중에 인종차별을 품고 있는 유럽 백인들은 많겠지만 뉴스화되고 공론화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푈러가 정말 레이카르트의 피부색을 모욕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레이카르트는 평소에 과묵하고 신사적인 인물로 통했고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레이카르트가...’, ‘괜히 그랬겠냐’하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만약 이게 레이카르트가 꾸며낸 말이라면, 그는 푈러에게 제대로 물을 먹인 셈이다.


 



독일 축구에는 ‘게르만 순혈주의’라는 게 있다. 2차 대전, 유럽을 공포로 물들였던 나치 독일의 아리안 민족주의는 패전 후 철저하게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게르만 순혈주의란 간단히 말하면 정치적, 사회적으로 좌절된 독일인들의 인종주의적 욕망이 축구를 숙주삼아 생존해 있는 현상이다. 전통적으로 독일의 분데스리가만큼 유색인종에 배타적인 리그는 없다. 분데스리가에서 차범근이 당한 견제와 차별은 거의 전설적인 수준인데,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차범근이 아직까지도 레버쿠젠에서 만난 리누스 미헬스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개방적인 네덜란드인, 특히나 나치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네덜란드인인 미헬스가 게르만 순혈주의의 색안경을 끼고 차범근을 끼고 대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대표팀은 오랫동안 게르만 계통의 백인선수들로 채워졌다. 위르겐 클린스만은 독일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흑인 선수를 기용하는 등 파격을 단행했다. 심지어 백인인 클로제가 대표팀에 소집되었을 때 순수 독일인이 아니라 '폴란드계'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으니, 흑인 선수가 얼마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유럽인들이 독일축구의 배타성을 모를 리가 없다. 이러니 모든 정황이 푈러에게 불리했다. 이 사건은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푈러를 따라다니고 있다. 레이카르트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푈러 입장에서는 무조건 잡아떼는 게 상책이다.


 



“난 아직까지도 그때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이다.”


 


또 다른 언급을 보면, 확실히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게 괴롭긴 한 모양이다.


 


“네덜란드를 상대로 여러 번 뛰었지만, 이 저주받은 시합의 기억은 무덤까지 날 따라올 것 같다.”


 



하지만 당시의 16강전으로 되돌아가보면, 네덜란드 손해였다. 레이카르트가 푈러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수비의 중심이 빠지자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위에서 얘기한) ‘금발의 폭격기’ 클린스만이 맹활약을 펼쳤고 결국 네덜란드는 패하고 만다. 이렇게 악연은 계속된다. 결국 서독이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운도 없었다.


 


 




2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의 감독은 미헬스의 제자이자 한국대표팀 감독이기도 했던 딕 아드보카트였다. 그는 미헬스 밑에서 수석코치를 하다가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토털풋볼 2세대 선수’에 이어 이제 2세대 감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아드보카트는 선수로서는 미헬스의 관심 밖이었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오히려 현역 은퇴 후에 미헬스의 눈에 들어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딕 아드보카드의 본명은 더크 니콜라스 아드보카트다. 공식 별명은 ‘작은 장군’. 이런 별명은 얻은 이유는 첫째 정말 키가 작기 때문이고, 둘째 미헬스의 별명이 ‘장군’이어서다. 이 명예로운 별명은 그가 공식 인가(?)를 받은 제 2대 토털풋볼 감독임을 반증한다.


 



한국에서는 히딩크에 비해 저조한 성적을 낸 아드보카트의 능력에 대해 비난여론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아드보카트는 정말 뛰어난 감독이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본프레레가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었을 때 히딩크는 즉시 실망감을 나타냈다. 본프레레는 네덜란드인일 뿐 토털풋볼 계보와는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보카트가 대표팀의 감독이 되었을 때는 “훌륭한 선택”이라며 응원했다. 2006 독일월드컵 스위스전에서 그 노골적인 심판 판정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6강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고 본다.


 



아드보카트는 네덜란드에서 영원한 슈퍼스타 요한 크루이프에게 ‘한 소리’ 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크루이프는 예나 지금이나 기자와 팬들에게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반쯤 코미디언이 된 펠레와 달리 점점 신격화되고 있다. 네덜란드인들은 감독으로서도 초일류인 크루이프가 대표팀을 맡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계속 거절중이다. 아드보카트는 이 점에 성이 난 모양이다.



 


“(엄청난 명성 때문에) 높은 곳에서 밑을 굽어볼 수 있는 그라면 마음대로 지껄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그는 지금까지 네덜란드 대표팀 취임을 두 번이나 요청받았지만, 두 번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나는 두 번 모두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나는 그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드보카트의 입장에선 크루이프에게 억하심정이 있을 법하다. 그는 선수시절부터 미헬스에게 육성되지 않았다. 반면 크루이프는 초 엘리트 코스를 밟은 '바르작스', '슈퍼스타', '예수' 발롱 도르(유럽 최우수 선수), 메헬스의 맏아들이다. 동생은 형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법이다. 형만큼 영광스런 과거도 없으니, 가만히 앉아서 잘난 체만 하는 크루이프가 상당히 고까울 것이다.



 



넌 영원한 서자...


 


 


3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아드보카트호는 뛰어난 경기력으로 우승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8강전에서 우승 0순위인 브라질을 만났다. 74년 월드컵 이후 20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시의 경기는 브라질의 장기적인 침체를 알리는 스타트라인이었던 만큼, 브라질로서는 복수의 기회였다.


 



브라질에는 천재 공격수 호마리오와 베베토가 버티고 있었다. 반면 네덜란드에는 데니스 베르캄프와 마크 오베르마스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토털풋볼 2세대인 오렌지삼총사와 쿠만의 뒤를 잇는 제 3세대 전사들이다. 특히 베르캄프는 크루이프가 처음 맡았던 ‘돌풍의 핵’ 역할을 했다.



 



데니스 베르캄프


 


환상적인 볼 컨트롤 능력, 유령처럼 수비수를 지나쳐가는 돌파력, 득점력을 모두 갖춘 베르캄프는 네덜란드 대표팀과 아스날 F.C.의 히어로였다. 그에겐 두 가지 특이사항이 있다. 하나는 비행기 공포증이다. 그는 비행기 타는 일을 너무 혐오한 나머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비행기 타는 걸 혐오해서 ... 차라리 숄 켐벨(아스날 시절의 동료)의 부인과 외도를 하는 게 더 낫겠다.”



 


이는 켐벨을 모욕하는 말이 아니라, 그런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 것보다도 비행기가 싫다는 뜻이다. 비행기 탑승은 선수생활 내내 그를 괴롭혔다. 2002년 한일월드컵 지역예선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자진 은퇴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게다가 한일월드컵은 대회 도중 비행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야 할 가능성도 높았다.).


 



두 번째는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성격이다. 그는 감정표현이 없고 과묵한 인물이다. 환상적인 골을 넣고 나서 밋밋한 골 세레모니, 혹은 무(無) 세레모니로 한껏 오른 관중들의 흥을 죽이곤 했다. 그를 지도했던 아르센 웽거 감독은 말했다.



 


“오늘날 베르캄프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지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경기 후 매우 조용하고 언론 앞에서 흥미 있는 발언도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방식을 좋아한다.”



 


베르캄프는 최종공격수 바로 뒤를 받쳐주는 2진 공격수, 즉 ‘쉐도우 스트라이커’였다. 필요에 따라 중원으로 빠지기도 했고, 한 발 앞으로 나가 최종공격수 역할도 했다. 그러면서도 공을 골대 안에 쑤셔 넣고야 마는 득점력을 갖고 있었다. 이렇듯 자유로운 포지션 이동 능력은 요한 크루이프의 후계자다운 장점이었다. 이런 ‘쉐도우’의 지원을 받는 스트라이커는 얼마나 행운아일까. 티에리 앙리가 바로 그런 행운의 소유자였다.


 



“데니스는 파트너로서 내가 경험한 최고의 선수다. 그런 선수와 함께 뛴다는 건, 스트라이커에겐 꿈과 같은 일이다.”


 



마크 오베르마스


 


작년(2009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걸출한 레프트 윙어 오베르마스는 데니스 베르캄프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다. 양 발을 똑같은 수준으로 사용했으며(유럽에서는 신기한 스펙이다.) 발군의 스피드로 ‘총알’, ‘로드런너’라는 별명을 얻었다. ‘밉밉’(로드런너가 내는 소리)으로 불리기도 했다.


 



"Meep meep"


 


명언으로는 “포기하면 그 순간이 곧 경기 종료다.”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농구만화 <슬램덩크>의 이 유명한 대사는 원래 오메르마스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네덜란드-브라질의 8강전, 전반은 0:0으로 팽팽하게 끝났다. 그러나 브라질이 후반전에 찾아온 두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 전세는 기울어졌다. 경기 시작 53분, 호마리오가 노장이 된 쿠만을 제치고 득점했다. 두 번째 골도 호마리오의 페인트에서 나왔다. 63분, 공이 호마리오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공을 ‘건드리려고 하는 척했다.’ 오프사이드 위치였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당연히 심판의 휘슬을 예상했고 일순간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호마리오는 가만히 있었다. 베베토가 뒤에서 잽싸게 치고 나와 주인 없이 흐르는 공을 잡았다. 그는 골키퍼를 제친 후 텅 빈 골대에 공을 꽂아 넣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상대 수비진 전체를 속여 넘긴, 호마리오의 천재적인 페인트였다. 오프사이드 트랩은 미헬스가 창안하고 아리에 한이 처음 구현한 기술로, 오렌지군단을 대표하는 무기 중 하나였다. 호마리오와 베베토는 이걸 역으로 이용해 득점으로 연결한 것이다.



 



이 득점 후 그 유명한 '베이비 세리모니'가 나왔다. 요람을 흔드는 동작으로, 새로 태어난 아들을 위한 퍼포먼스였다. 재미있게도 작은 체구와 귀여운 얼굴 때문에 베베토의 별명은 '베이비'다. '베이비의 베이비 세레모니'는 전 세계 축구선수들이 흉내내면서 몇 년간이나 유행했다. 그런데 혹시 네덜란드 선수 중에 이 세레모니를 따라한 이가 있을까?


 


오렌지군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베르캄프의 멋진 골에 이어, 오베르마스의 코너킥을 빈터가 추가골로 연결해 2:2 동점이 되자 경기는 곧 뒤집어질 기세였다. 그러나 브라질의 브랑코가 찬 프리킥이 그대로 골이 되고 말았다. 종료 9분 전이었다. 네덜란드는 사력을 다했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후반전에서만 5골이 폭발한 이 경기는 94년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로 꼽힌다. 네덜란드는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고 명예로운 패배를 당한 경우가 많다. 브라질은 결국 이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운이 없는 셈이었다.  


 


 




4


 



2년 후 유로 1996에서도 네덜란드는 좋은 경기를 펼쳤지만 지단을 중심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프랑스에 승부차기로 패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히딩크의 용병술로 무장한 네덜란드는 최강의 팀으로 거론됐다. 네덜란드는 한국을 5:0으로 대파하고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또다시 만난 브라질에게 역시 승부차기로 패하고 만다. 유로 2000에서는 이탈리아에 승부차기로 패했다.


 



불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베르캄프가 대표팀에서 은퇴하자 실력까지 떨어졌다. 돌풍의 핵이 사라지자 무늬만 토털풋볼이었다. 소용돌이가 없는 오렌지군단의 경기만큼 추한 것도 없다. 늙은 오베르마스와 뛰어난 수비형 미드필더 에드가 다비즈, 화려하게 등장한 스트라이커 반 니스텔루이가 고군분투했지만 네덜란드는 2002 한일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다비즈가 공을 보내봐야 미드필더진이 반니스텔루이까지 연결해주지 못하니 소용이 없었다.


 



반바스텐의 계보를 잇는 네덜란드산 득점기계 루트 반니스텔루이. 양발을 모두 쓰는 정확한 슈팅과 장신을 이용한 헤딩, 순간적인 감각으로 '차면 들어가는' 세계 최강의 화력을 보유했다(과거형을 써서 미안하지만, 어쨌든 전성기가 지났으니.). '공이 있는 곳에 반니스텔루이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한 위지선정을 자랑한다. 나이가 들며 예전의 포스는 많이 줄었지만,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마지막으로 대표팀 멤버가 되기 위해 노력중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여성팬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섹시하게도 '반 밀키 보이(Van Milky Boy)'. '황제'나 '왕'이라는 칭호보다 이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드보카트가 다시 오렌지군단을 맡아 유로 2004를 준비했다. 4강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뒀지만 개최국 포르투갈에게 2:3으로 역전패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이기고 있던 와중에 틀어막기 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토털풋볼은 기본적으로 공격전술이다. 다른 팀도 아니고, 네덜란드가 수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패한 일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드보카트의 후임이 전직 ‘득점기계’인 반바스텐으로 결정된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오렌지색 넥타이에 대표팀 문장까지. 옷차림에 <나는야 대표팀 감독>이라고 써 놨다.


 


반바스텐은 공격적이고 창조적인 플레이로 네덜란드 축구의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연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아르헨티나가 포진하고 있는 죽음의 조를 멋지게 통과하고 포르투갈을 상대로 16강전을 맞았다. 이 경기는 시합이 열린 지역의 이름을 따 ‘뉘렌베르크 난투극’, 혹은 ‘뉘렌베르크 전투’로 불리게 된다.



 



말이 필요 없다. 그냥 다시 한 번 감상하자. 마지막에 보이는 '루저 회합(포르투갈의 데쿠와 네덜란드의 반 브롱크호스트)'은 2006 월드컵 최고의 코미디였다.


 


한 경기에서 16개의 옐로카드와 네 개의 레드카드는 월드컵 최고기록이다. 이렇게 싸워서 0:1로 졌으니, 정말 열불 났을 것이다. 경기 후 반바스텐은 이렇게 말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오늘 경기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최대한 발휘했다. 알고 있는 모든 교활한 트릭, 시간지연 작전을 펼쳤다.”



 


포르투갈의 스콜라리 감독은 당연히 맞받아쳤다.



 


“페어플레이를 논하려면 자기들부터 시범을 보여야 하지 않은가?”



 


이렇게 포르투갈은 독일에 이어 네덜란드의 원수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어쨌든 반바스텐 감독은 추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유임되었다. 사실 반바스텐의 조련은 훌륭했다. 그는 토털풋볼을 제대로 구현할 줄 아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그를 오렌지군단의 사령관 자리에서 끌어낸 이는 다름 아닌 히딩크였다.


 


 




5



 


개인적으로 반바스텐은 명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오렌지군단은 유로 2008 조별예선에서 2006 월드컵 우승팀인 이탈리아를 3:0으로, 준우승팀 프랑스를 4:1로 관광 보냈다. 특히 이탈리아를 3점 차로 이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고 있을 때의 이탈리아는 대단히 공격적이다. 이는 토털풋볼 특유의 ‘떼공격’과 ‘떼수비’ 없이는 불가능한 결과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16강전에서 히딩크가 이끄는 러시아에 뜬금없이 3:1로 완패했다. 이 결과로 반바스텐은 대표팀 감독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잘 가♡ 반바스텐♡


 


히딩크만큼 토털풋볼과 네덜란드 축구의 현주소를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은 없다. 네덜란드의 약점을 꿰고 있는 감독과 함께한 것은 분명 러시아의 행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털풋볼은 원래 <토털풋볼을 하지 않는 상대>를 이기기 위한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토털풋볼로 승리해온 팀은 거꾸로 상대가 토털풋볼을 연마해 나타났을 때 무척 당황하게 마련이다.


 



오렌지군단과 에레디비지에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네덜란드 축구는 너무 세계화된 탓에 오히려 자신만의 특징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토털풋볼은 최종전술이 아니라 기본 전술이 다. 게다가 강팀들은 토털풋볼을 기초체력으로 깔아놓고 거기에 자신만의 강점을 추가한다.



 


히딩크의 러시아는 유로 2008 준결승전에서 이 대회 우승팀인 스페인에 0:3으로 관광버스를 탔다. 현재 최강으로 불리고 있는 스페인 축구는 전통적으로 빠르고 아기자기한 패스를 중요시한다. 스페인에는 “무능한 선수는 자주 달린다.”는 말이 있다. 경기장에서 달려야 하는 것은 선수가 아니라 공이란 뜻이다.


 


토털풋볼이 경기장을 바둑판으로 보고 위치선정과 포지션 이동에 주력한다면 스페인식 축구는 공이 지나가는 ‘길목’을 장악한다. 러시아는 스페인의 패스워크에 완전히 유린당했다. 그렇다면 스페인 축구는 토털풋볼의 천적일까? 그렇지는 않다. 히딩크의 러시아는 토털풋볼 팀이었고, 스페인은 <토털풋볼 +알파>의 팀이었다고 보는 게 옳다(그리고 스페인과 러시아 선수들의 개인 실력차가 너무 컸다.).



 


이러한 현상은 다름 아닌 네덜란드 축구인들 때문이다. 네덜란드 축구는 선수와 지도자 양성에 많은 공을 들인다. 이 시스템에 네덜란드인들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민족성이 더해져 토털풋볼의 설계도가 닥치는 대로 유출되었다.



 


네덜란드 축구가 앞으로도 그 아우라를 잃지 않으려면, 토털풋볼에 또 다른 네덜란드만의 요소를 추가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덜란드 축구가 토털풋볼의 색깔을 조금이라도 잃는다면 참으로 묘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세계축구의 평준화현상과 더불어(1편에서 이야기했듯 이 현상은 토털풋볼 보급과 무관하지 않다.) 네덜란드 국내리그 에레디비지에의 상대적 위상도 조금씩 낮아졌다. 토털풋볼의 등장과 함께 70년대에 급부상한 아약스와 PSV 아인트호벤, 페예노르트 등 세계적 명문팀이 여전히 리그를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이 현대축구의 성지는 잘못하면 15년 쯤 후엔 쓸쓸한 유적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는 계속해서 축구 수출국으로 남을 수 있을까. 네덜란드 축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하는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축구에 있어 ‘네덜란드 관전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