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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6.금요일


나나


 


지난 2009년 12월 초, 오랜만에 서울에 돌아갔다.


 


도쿄로 가는 길에 들르는 일정이었다. 그랑프리 파이널이 열리는 요요기 국립 경기장 주변에는 암표를 구한다는 내용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그랑프리 시리즈를 통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6명의 스케이터들을 종목별로 초청하여 치러지는 그랑프리 파이널. 올림픽 이전 김연아가 참가하는 마지막 국제대회였다. 경기장 안, 빠리에서 이미 얼굴이 익숙해진 CBC의 팀이 인사를 걸어왔다.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프랑스의 남자 싱글 브라이언 쥬베르가 결장하면서 프랑스 언론들은 모두 출국 직전 그랑프리 파이널 취재를 취소했다. 프랑스 언론 몫으로 비워져 있는 내 근처 자리에 CBC사람들이 나란히 앉았다. 네명이 나란히 앉아 경기를 지켜보면서, 점수 예측을 하기 시작했다.


 


각자 지난 그랑프리 시리즈를 취재하며 이미 자료를 모아둔 상태였으니 프로그램 구성표와 지난 시즌의 성적을 비교하면서 점수를 맞추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4명이 각자 다른 숫자를 말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막상 시작해보니 꽤나 흥미로웠다.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 경기를 아주 망친 토마스 베르너의 점수는 가닥을 잡기가 어려웠지만, 일본이 또다른 자신의 홍그라운드 같다는 조니 위어는 자신감 넘치는 연기를 펼치며 관중들의 호응을 얻어내기 시작했다. 경기장 분위기는 바짝 달아올랐다.


 


그 이후부터는 예측하는 점수가 절묘하게 들어맞기 시작했다. 1-2점 이상 벗어나는 경우가 없었다. 홈 관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받은 다카하시 다이스케의 놀라운 점수도, 아쉬운 실수를 보여주었지만 충실한 프로그램을 선보인 제레미 애봇, 안정감있게 프로그램을 마무리한 노부나리 오다와 에반 라이사첵까지. 이 기세는 심지어 아이스 댄스와 페어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나란히 앉은 네 명은 각자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믹스드 존에 향하면서도, 예상점수를 서로 이야기 하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일종의 약속처럼 되어버렸다.


 


남자 싱글, 여자 싱글, 아이스 댄스와 페어, 시니어 부문은 모두 36팀이 참가하는 그랑프리 파이널이다. 이 예상점수에서 2점 이상 벗어난 선수는 단 한명이었다.



김연아였다.


 



 


김연아를 보면서 긴장할 필요가 있느냐고 옆 자리에 앉은 기자는 웃었다. 나는 연아를 볼때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요. 물론 실수를 할 수도 있지만 실수도 프로그램의 일부인 것처럼 의연하게 대처하잖아요. 넘어지더라도 앗, 어쩌지, 재앙이 일어났다! 이런 느낌은 들지 않아요.


 


제임스 본드의 메들리가 시작되고, 김연아는  빙판을 장악해나갔다. 엄청나고 거대하다는 형용사가 따라붙는 트리플 럿츠와 트리플 토룹을 연결한 3회전 연속 점프, 트리플 플립은 싱글처리를 했지만 이어지는 더블악셀, 스핀과 스파이럴까지 모든 구성 요소는 월등했다. 김연아 직전 연기를 마친 미키 안도 역시 클린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66.20의 시즌 베스트 점수를 얻었으나 속도와 빙판 사용면적, 관중을 압도하는 전반적인 수행의 질을 고려할 때 비교 선상에 두는 것은 민망할 정도였다. 먹이 사슬 분포도의 분류처럼 그건 명확한 차이였다.


 


평상시 점수라면 76점을 넘기겠지만 플립을 싱글처리했으니 아마도 71-72점이 아닐까? 최소한 70점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며 어쨌거나 훌륭한 연기였다며 모두가 믹스드 존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65.64 라는 점수, 쇼트 2위라는 순위가 전광판에 떴다.



어디에서 점수가 사라졌을까? 맨 눈으로 코 앞에서 트리플 럿츠와 트리플 토룹을 보는 순간엔 약간 흔들린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했다. 시차와 오랜 비행때문에 렌즈를 낀 눈에 이상이 생겼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점수였으니 내 눈이 잘못된게 아니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믹스드 존에 나온 김연아는 예상치 못한 다운 그레이드에 대해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고 말을 아꼈다. 당신의 트리플 토룹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라는 류의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10월 트로피 에릭 봉빠르 대회가 열린 빠리 베르시의 기자 회견장에서 "미국 전지 훈련을 가서 트리플 토룹을 배웠다. 한번 시험삼아 하네스(보조기구)를 달지 않고 해봤는데 그냥 한번에 트리플 토룹이 되었다"는 말를 알아 듣지 못해, 통역이 자꾸 말을 반복하는 동안 열심히 받아 적으며 놀라운 표정을 짓던 일본 기자들이었으므로 정말 트리플 토룹에 문제가 생겼는지 궁금했을 지도 몰랐다. 쇼트 세계신기록은 물론 시니어 데뷔 이후 16번의 국제 대회에 참가해서 12번의 쇼트 1위를 차지한 김연아가 아닌가.


 


쇼트 프로그램이 끝나고 프레스 센터에서 아주 오랜만에 정 중앙이 아닌 오른쪽 자리에 자리잡은 김연아는 의연했다. 경기 직전 웜업에서 러츠에서 넘어진 것이 어쩌면 몸에 남아 더욱 긴장하도록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실수도 하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연습에서도 그렇게 크게 넘어지는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어요." 저도 인간이니까 넘어진다는 부분에선 몇몇 기자들이 웃었다.


 



 


시간 관계상이라는 이유로 모든 언어가 우선 일본어로 번역이 되고, 프레스 컨퍼런스가 끝난 후, 한꺼번에 요약해서 일본어에서 영어로 다시 전달되는 시스템이었으므로, 다시 옆에 나란히 앉은 CBC팀은 대체 왜 사람들이 웃었느냐고 물었다. 나 역시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니 실수할 수도 있다, 라는 이야기였다고 설명을 했다. 그들 역시 피식 웃었다. 김연아가 인간이라는 대전제조차 사람들은 대부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에게 쏟아지는 기대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음날,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프리 스케이팅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판정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우리가 할일은 심판이 보고 그냥, 아, 이거구나, 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들의 일을 쉽게 해주는 거에요. 응 이게 뭐지? 라고 들여다 보는게 아니라 그냥 구성표를 보고 연기를 보고 이거다, 하게 하는거요. 더 자연스럽게, 더 물흐르듯이.



연아가 지금까지 추구해 온 것이 바로 그런 것이고, 그게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늘 해야할 일이 더 있다,라고 말합니다.
피겨스케이팅은 빙판 위를 활주하고 점프하는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그 과정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래요, 하지만 얼굴을 붉히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할때 그걸 받아들이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항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항의를 한다 한들 연아의 점수와 프로토콜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 얼굴 붉힘과 노여워하는 것이 뭔가를 바꿀 수 있나요? 우린 더 명백하게 흠없는 연기를 준비할 것입니다.


 



 


12월, 도쿄에서 얼굴을 붉히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으며 프리 스케이팅이 끝난 후 홀가분하다, 어려웠지만 잘 싸웠다고 답한 김연아는, 자서전에서 머리카락 한 올도 흔들리지 않겠다며 자신을 다잡았다.



모든 것이 명백하게 우월한,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애써온 그녀는, 다시 한번 스케이팅으로, 프로그램으로 모든 것을 증명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경우, 해외 언론에서도 성과 이름이 한국식 순서대로 표기가 된다. 김연아라면 유나 킴이 아닌 김연아로 발음되어야 하지 않느냐며, 독일 유로스포츠 해설자들은 금빛의 아름다운 아이라는 뜻을 담아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고 싶어했다. (관련기사 : 오늘 유로스포츠 중계에서 실재로 나나님의 조언대로 '유나 킴'이 아닌 '김연아'라는 호칭과 함께 그 의미는 '금빛의 아름다운 아이'라는 해설이 있었습니다 - 편집자 주)


 


경기장이 아닌 스튜디오 중계임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뚫고 전해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단다. 그들이 내가 녹음해 보낸 파일을 여러번 듣고서야 겨우 제대로 발음할 수 있었던, 한국어를 모국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질투와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받게 했던 이름이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 리스트. 김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