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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NBA를 지배한 시카고 불스를 이끌었던 필 잭슨 감독은 매 시즌이 시작될 때마다 그 해 시즌의 컨셉을 정하고 이름을 붙여 선수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1997~1998년 시즌을 앞두고 선수단이 모인 첫 미팅 자리에서 그가 선수들에게 나누어준 핸드북 첫 장에는 ‘THE LAST “DANCE”?’가 쓰여 있었다는데, 그렇게 이름 붙여진 ‘라스트 댄스’시즌에 시카고 불스는 두 번째 쓰리핏(3-peat, 한 팀이 세 시즌 연속으로 우승하는 것)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올해, 당시의 시카고 불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마이클 조던 : 라스트 댄스>가 넷플릭스(미국 현지에서는 ESPN에서 선공개)를 통해 대중에 공개되었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NBA 인기가 최전성기였던 1990년대, 그 인기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그가 이끌었던 시카고 불스 왕조의 마지막 시즌 비공개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인만큼 관심은 뜨거웠다. 90년대 NBA를 추억하며 아직까지도 당시 뛰었던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는 사람이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마이클 조던 : 라스트 댄스>는 우리나라에서도 큰 화제를 모았다.

 

두산 베어스의 라스트 댄스

 

코로나19로 인해 종목을 막론하고 전 세계 프로리그가 단축, 파행으로 운영되었던 올해, 한국프로야구는 일정이 다소 늦춰지고 관중 입장이 제한되긴 했지만 리그 전 경기를 모두 소화하고 시즌을 마쳤다. 지난 9월, 포스트시즌 진출과 최종 순위를 놓고 리그 후반 경쟁이 점차 고조될 무렵부터 두산 베어스를 다룬 기사에 낯익은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라스트 댄스’였다. 이후 정규 시즌을 3위로 마친 두산이 한국시리즈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하기까지 수많은 뉴스와 기사에서 ‘두산 베어스의 라스트 댄스’가 거론되었다. 왜 두산 베어스의 이번 시즌이 라스트 댄스로 불리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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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댄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시카고 불스의 97-98 시즌은 시작 전부터 시카고 불스 왕조의 마지막 시즌으로 예견되고 있었다. 90-91, 91-91, 92-93 시즌 3연패 후 갑작스러운 마이클 조던의 은퇴로 우승 공백기를 겪은 시카고 불스는 조던 복귀 후 95-96, 96-97 시즌을 우승하며 두 번째 3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팀 내부 상황은 그닥 좋지 않았다.

 

불스 왕조를 이끈 필 잭슨 감독은 이미 다섯 번이나 팀을 우승 시키고 두 시즌 연속 우승이 현재 진행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년 전에 자신을 감독 자리에 앉힌 크라우스 단장과의 갈등으로 3연패에 도전하는 97시즌에도 계속 지휘봉을 잡을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1년짜리 재계약을 맺었지만 ‘이번 시즌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조던은 조던대로 시즌 후 은퇴를 기정사실화했으며 팀 내 2인자인 스코티 피펜은 팀 기여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연봉으로 구단에 오만정이 다 떨어져 있어서 트레이드 요구까지 불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니까 시즌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감독을 포함한 팀 내 주축들이 모두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하고 있었던 셈. 필 잭슨이 97-98 시즌에 이름 붙인 라스트 댄스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졸라 잘해왔지만 이번 시즌이 끝이야. 그러니까 똘똘 뭉쳐서 막판 신나게 함 놀아보자’는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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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라스트 댄스’를 정의해보자면, ‘왕조라 불릴 만큼 여러 시즌 동안 리그를 지배하고 있던 팀의 중심 선수들이 특정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날 것이 확실시될 경우 그들이 함께 뛰는 마지막 시즌을 일컫는 말’ 정도가 되겠다.

 

이번 시즌 두산이 그런 정의에 부합한다는 말일텐데, 과연 그랬을까.

 

왕조의 조건

 

한국 프로야구사에 언급되는 역대 왕조 가운데 첫 번째는 단연 80~90년대의 해태 타이거즈다. 83년 첫 번째 우승을 시작으로 97년까지 15년 동안 아홉 번 우승한 해태 왕조는 시기를 좁혀 86년부터 93년까지 여덟 시즌 중 여섯 번을 우승했고 특히 86년부터 89년까지는 4년 연속 우승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한국프로야구 최강팀의 위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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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한국시리즈 우승팀, 준우승팀, 한국시리즈 MVP

 

 

두 번째로 언급되는 왕조는 삼성 라이온즈다. 80, 90년대에는 해태에 밀려 콩라인에 머물렀던 삼성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5시즌 중 무려 열한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그중 일곱 번 우승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4년 연속 우승함으로써 해태 타이거즈에 이어 한국프로야구에 유이한 리그 4연패 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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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리그의 왕조를 거론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준은 연속 시즌 우승 기록이다. NBA에서 쓰리핏을 특별하게 쳐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어느 종목, 어느 리그, 어느 팀이든 한두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면 다른 팀들의 집중 분석과 견제를 당하기 마련인데 주축 선수들의 부상 이탈 같은 변수까지 고려했을 때 3년 연속 우승부터는 달성 난이도가 ‘어나더레벨’수준으로 높아진다(우승 한 번 못하고 10, 20년을 보내는 팀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3년 연속 우승 정도면 이견 없이 왕조라 불러주는 게 이 바닥 국룰, 한국프로야구 통틀어 4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건 해태와 삼성 뿐이고, 그 밑으로는 3년 연속 우승팀도 없는 것을 볼 때 당시 해태와 삼성은 자타공인 반박불가 왕조 시절이었다 하겠다.

 

그 밖에 왕조로 거론되는 팀이 있다면 98년도부터 2004년까지 일곱 시즌 동안 네 번 우승, 2003, 2004년 연속 우승을 기록한 현대 유니콘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세 번 우승한 SK와이번스가 있는데… 3년 연속 우승 정도면 왕조로 인정해주는 게 이 바닥 국룰이라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3년 연속 우승 못한 팀에게 왕조 칭호를 부여했을 경우 반드시 논란이 일어난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런 쪽으로 별 관심없는 분들이야 뭘 그런 걸 갖고 키보드 닳도록 싸우고들 있냐 하겠지만 원래 프로 스포츠라는 게 그깟 어른들 공놀이에 목숨 거는 판 아니겠나. 지금이야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지만 메시냐 호날두냐 가지고 밤샘 토론도 가능한 게 이 바닥이라는 말씀.

 

암튼 현대 유니콘스, SK와이번스와 더불어 ‘이 정도면 왕조다’, ‘3년 연속 우승도 못하고 무슨 왕조냐’는 논란에 휩싸이는 팀이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게 바로 두산 베어스 되시겠다.

 

두산 베어스는 왕조였나

 

두산 베어스는 2015년부터 2020년 올해까지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야구에 관심이 1도 없는 분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국시리즈는 그해 프로야구 챔피언을 가리는 결승 무대다. 두산은 올해까지 6년 연속으로 결승에 올라 우승 아니면 준우승을 했다는 말이고 두산 팬들은 지난 6년 동안 남의 잔치 구경하는 일 없이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미친듯이 속 쓰려 하고 있을 몇몇 팀의 팬들이 떠오른다)

 

1982년에 시작된 한국프로야구 39년 역사에서 6년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팀은 왕조 시절 삼성 라이온즈와 07~12년 SK와이번스, 그리고 15~20년 두산 베어스 뿐이다. (오히려 해태 타이거즈는 4연패는 했어도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은 하지 못했는데 대신 한국시리즈의 진출한 아홉 번 모두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기아 타이거즈까지 더하면 11회 진출, 11회 우승인데 이쪽이 더 ㅎㄷㄷ한 기록이긴 하다) 아무리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지만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또한 해당 기간 동안 리그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지표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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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을 더 늘려서 이야기 해보자. 2015년이 아니라 2013년부터 계산하면 8년 동안 두산 베어스는 2014년 시즌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시즌 내내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비록 연속 시즌 우승은 15, 16시즌 2년 연속뿐이고 7번의 한국 시리즈에서 세 번 우승하는 데 그쳤지만 이 정도면 왕조급 단기 임팩트로 손색이 없다. 게다가 두산이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15~20시즌 동안 두산을 제외하면 2년 연속이라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팀은 단 한 팀도 없다. (2015년 한국 시리즈 상대팀 삼성이 2013년부터 3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15~20년을 기준으로 하면 삼성 또한 2015년 단 한 번 뿐이다) 그나마 같은 기간 연속이 아니라 두 차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팀으로 범위를 넓혀도 두산을 제외하면 NC뿐이다.

 

여전히 3년 연속 우승 기록이 없다고, 한국시리즈에 올라 놓고서 우승보다 준우승을 더 많이 했다고 ‘에이~ 왕조까지는 아니지’하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2000년부터 2020년까지 두산은 리그 최다인 12회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네 차례에 불과했다. 타이거즈의 11회 진출, 11회 우승 기록의 대척점에 콩산, 아니 두산이 있다) 적어도 201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프로야구를 가장 압도적으로 지배했던 것은 두산 베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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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2000년 이후 한국 프로야구를 삼성, SK, 두산의 시대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2000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21년 동안 삼성과 SK, 두산 중 어느 한 팀도 한국시리즈에 오르지 못한 해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 삼성이 2015년 이후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고 있고, SK가 9위까지 성적이 곤두박질쳤으며 두산 주축 선수들의 대규모 이탈이 예상되는 내년 시즌이 22년 만에 삼성, SK, 두산 없는 한국시리즈에 되지 않겠냐는 예상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왜 2020 시즌이 두산의 ‘라스트 댄스’였나

 

최근 6년간 두산 베어스의 퍼포먼스가 왕조급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뭐 땜에 두산의 올시즌을 라스트 댄스라 불렀나.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딱 두 가지 이유다. 이번 시즌이 끝나고 두산의 주축 선수들이 대거 FA(free agent, 자유계약선수)로 풀릴 예정이라는 것과 모기업 두산그룹의 재정 상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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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 다이노스의 우승을 끝난 2020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6차전의 두산 선발 라인업이다. 이 중 3루수 허경민, 중견수 정수빈, 2루수 최주환, 유격수 김재호, 1루수 오재일까지 외국인 선수 페르난데스를 제외한 8명의 선발 야수 가운데 다섯 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가 된다.

 

*자유계약선수(FA)란 단순히 말하자면 ‘마음대로 팀을 옮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선수’를 뜻한다. FA가 된 선수들은 보통 가장 큰 금액을 제시하는 구단을 선택하지만, 제시 금액의 차이가 아주 크지 않을 경우 다른 조건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더 적은 몸값을 제시한 구단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우승 가능성이 큰 팀, 고향 팀, 자녀 교육여건이 더 좋은 지역의 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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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참고로 6년 연속 한국시리즈의 시작이었던 2015년 한국시리즈 1차전의 선발 라인업이다. FA가 되는 2020년 한국시리즈 주전 야수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의 이름이 겹친다. 겹치지 않는 최주환은 선발은 아니었지만 2015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두산 선수로 포함되어 있었다.

 

시즌이 끝나면 6년 간 팀의 주축이었던 야수 다섯 명이 한꺼번에 자유계약선수가 되는 2020년, 거기에 선발 투수진에 속한 이용찬과 유희관도 FA로 풀릴 예정이었다(이용찬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 유희관은 부진 때문에 한국시리즈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시즌 시작 전까지만 해도 둘다 팀 선발진의 주축이었다). 가히 팀의 기둥 뿌리가 뽑힐 수준이라 하겠다. 게다가 야구에서 포수, 2루수, 유격수, 중견수는 ‘센터 라인’이라고 해서 팀 수비의 핵심으로 보는데 두산은 센터 라인 네 명 중 포수를 제외한 나머지 세 포지션 주전이 FA 대상자다. 내야로 치면 포수 빼고 모두가 FA. (뒤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포수는 이미 지난 시즌을 앞두고 FA로 빠져나갔다)

 

대개 프로야구 선수의 연봉은 개인 성적과 팀 성적에 비례한다. 두산은 6년 동안이나 정상급 성적을 거두었고, 이는 당연히 주전급 선수가 좋은 성적을 내준 덕이 가장 컸다. 따라서 시즌이 끝나고 FA가 되는 선수들의 연봉도 대부분 꾸준히 올랐다. 이 정도 연봉 수준의 선수들이 한꺼번에 FA로 풀리면 아무리 지갑이 두둑한 구단이라도 부담이 된다. 그런데 두산은 모기업이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두산 베어스는 지난 몇 년간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두산 그룹은 정반대였다. 수년 째 자금난에 시달리면서 구조조정과 계열사 매각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가 올해는 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회생안을 내놓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는 채권단 압박에 시달려야했다. 그룹이 도산하게 생겼는데 야구단이 웬말이냐며 두산 베어스까지 매물로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코로나19 사태로 관중 입장 수익마저 거의 나오지 않아 시즌 중에는 구단 운영이 어려울 정도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두산 베어스는 결국 2군 구장을 매각해 운영 자금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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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두산이 FA가 되는 선수 한 명 당 평균 수십억을 들여서 대부분을 붙잡을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럴 여력이 되지도 않거니와 만에 하나 그럴 경우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모기업 자금 지원에 의존하는 국내 프로야구 구단 특성상 그룹이 망하네 마네 하는 마당에 수십억 FA 계약을 하는 야구단을 곱게 볼 리 없을뿐더러 하루가 멀다하고 계열사 임직원들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건 용인할 수도 없고 용인해서도 안될 일이다. 일부 두산팬들은 그래서 2020 시즌 중 두산 베어스가 자금 여력이 풍부한 다른 기업에 매각되길 바라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준우승으로 끝난 라스트 댄스 그러나

 

수 년간 팀을 이끌어온 주축 선수들이 함께 하는 마지막 가을 무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두산 선수단은 결연한 의지를 내비치며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LG와 KT를 꺾고 한국시리즈 무대에 섰지만 NC다이노스에 2승 4패로 패하면서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2018년 시즌 후 FA로 두산을 떠나 NC의 간판 선수가 된 양의지가 우승 세리머니로 집행검을 뽑아올리는 얄궂은 상황이 연출됐다. (양의지는 2020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됐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 개 팀에서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선수는 양의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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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의 2020 시즌을 라스트 댄스라 표현하는 기사를 보며 코웃음을 치는 이들도 분명있었다. 애초에 3연패에 도전하는 팀도 아니었다는 점, 결과적으로 마지막 시즌에 우승을 하지도 못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비록 두산 베어스의 라스트 댄스가 시카고 불스와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빛나는 지점이 있다. 지난 6년 동안 두산은 계속해서 핵심 전력을 잃어가면서도 한국시리즈 무대에 올랐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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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연속 한국시리즈의 시작점이었던 2015년 한국시리즈 1차전 라인업을 다시 보자. 2015년 한국 시리즈 우승 당시 팀 타선을 이끌었던 김현수는 2016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2018년 시즌을 앞두고 국내 프로야구에 복귀했지만 팀은 LG로 옮겼다. 2015년 당시 주전 중견수였던 민병헌은 2017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얻고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했다.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은 SK에 패하면서 2년 연속 준우승이라는 아쉬움을 삼켰지만 더 큰 아쉬움은 팀의 기둥 양의지가 시즌 종료 후 NC다이노스와 FA 계약을 맺으면서 팀을 떠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산은 계속해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화수분’이라는 별명답게 내부 선수 육성에 탁월한 성과를 냈고, 외국인 투수들의 활약도 좋았다(상대적으로 외국인 타자 덕은 많이 보지 못했다). 외부로 유출된 FA 보상이나 트레이드로 영입한 선수들도 두산 유니폼을 입고서는 이전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냈다. 두산이 우승한 2019년, 양의지의 백업 포수였던 박세혁은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팀을 한국시리즈에 직행시켰고 양의지의 보상 선수로 데려온 이형범은 불펜에서 활약하다 시즌 중반부터 팀의 마무리 투수를 맡으며 한국시리즈 우승에까지 기여했다.

 

3연속 우승을 하지도 못했고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나갔지만 그중 세 번은 우승에 실패했으며, 라스트 댄스라 불렸던 이번 시즌 또한 결국 준우승으로 마감했지만 두산의 지난 6년은 그렇기에 충분히 위대했다.

 

어떤 이는 이 글을 보고 ‘글 쓴 사람이 대단한 두산 팬인가보다’할 수도 있겠다. 실은 그 반대다. 준플레이오프에서는 LG를 응원한 나는 플레이오프에서 KT를 응원하고 한국시리즈에서는 NC가 이기길 바랐다. 두산의 상대팀만 응원했던 거다. 그토록 두산이 싫었던 이유는 ‘거참 징글징글하게 잘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마뜩잖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리그에서 한 팀이 계속해서 잘나가면 다른 팀 팬들의 공공의 적이 되는 게 이 바닥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다.

 

두산 왕조는 정말 올해가 마지막일까

 

두산의 내년 시즌 성적을 벌써부터 예측하기란 어렵다. 두산 베어스가 FA를 신청한 7명의 소속 선수 가운데 몇 명은 붙잡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유격수 김재호는 여전히 수준급 기량을 선보이고 있지만 내년이면 서른일곱이 되는 나이 때문에 타팀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며 본인 또한 잔류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투수 유희관 또한 뚜렷한 하향세로 현재 FA 시장에서는 비교적 매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다. 두산 구단은 나름대로 2군 구장 매각 대금의 일부를 선수 영입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고 외부 유출되는 선수에 대한 FA 보상 금액까지 확보하면 몇몇 선수 정도는 잡을 만한 여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누가 남고 누가 떠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두산이 내년에도 올해와 비슷한 전력을 유지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본다. 다시 한 번 화수분 야구를 선보이며 전력 공백을 메우기에는 이번에 유출되는 전력의 크기가 너무 크고(야수 다섯 명 중 세 명만 떠나도 그렇다), 즉시 전력으로 키워 올릴 내부 자원도 이제는 거의 고갈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FA가 되는 선수 중 누구를 붙잡고 어떤 선수를 보상 선수로 데려올 지, 내년 시즌 외국인 선수들은 얼마나 활약할지, 떠나간 선수들의 빈자리를 채울 내부 자원이 공백을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지 등 변수는 많다. 변수에 따라 5강 싸움은 가능하겠지만 올해와 같은 우승권 전력은 아닐 것이다.

 

만약 두산이 미라클 두산이라는 별명처럼 또다시 기적을 발휘해서 내년에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해도(만약 그렇다면 한국프로야구 최초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다), 선수단 구성에 있어서 기존 왕조의 지속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왕조의 내리막이 모기업 자금난으로 가속화된 이전 사례가 있다. 해태 타이거즈는 줄곧 여의치 않은 구단 사정에도 불구하고 리그를 호령하다 97년 우승을 마지막으로 암흑기를 겪었다. 98년부터 기아에 매각된 2001년까지 주축 선수들을 현금트레이드로 내보내며 구단을 운영하다보니 성적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97년 이후 타이거즈가 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년이었다.

 

최근 몇 년간 두산 베어스 구단의 자금 사정이 당시 해태만큼 어려웠다고 볼 수는 없지만 모기업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핵심 선수를 FA로 잃어가면서도 꾸준히 최정상권 성적을 유지하는 것을 보며 그 시절 해태가 떠오른 것은 사실이다.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대단했다는 의미다.

 

2020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NC다이노스였지만 내게는 패배가 확정된 후 NC 선수단에 박수를 보냈던 두산 선수들의 마지막 모습이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왕조의 자격에는 누군가 이의를 제기할지 모르겠으나 왕조의 품격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던 한 시대의 마지막, 화려한 우승으로 끝맺음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더 멋진 모습으로 기억될 두산 베어스의 라스트 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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