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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해부학자들

2010-03-02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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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용무쌍 추천0 비추천0

 


2010.03.02화요일


충용무쌍


 


 


[사진] 포장마차 아줌마의 나체시위, 1989년 7월 명동성당


(저작권 관계상 사진을 링크로 대신합니다.)


 


 


공공장소에 [알몸]이 나타나면 공기가 변합니다. 분위기는 팽팽해지고 시선은 집중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입니다. 젊은 남자의 몸, 늙은 남자의 몸, 젊은 여자의 몸, 늙은 여자의 몸 가릴 것 없이 알몸이 등장하면 다들 긴장하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그 긴장의 맥락과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보는 이들을 움찔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다들 같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알몸만큼 ‘원초적’ 인 표현 방식이 없기 때문이겠죠. 따라서 관심을 불러일으켜 이슈를 만들어야 하는 시위현장에 이 원초적인 양식(알몸)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예고된 일입니다.


 


 



 음반 검열을 주도하는 PMRC에 대항하는 알몸시위, 1993년 RATM


 


 


사실 "알몸시위"는 단순히 효과적인 시위 수단을 넘어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현상입니다. 피에 젖은 모피를 입느니 알몸을 선택하겠다는 환경운동가들이나 동물애호가들의 알몸시위는 해마다 지구촌 곳곳에서 반복됩니다. 유명인사 중에서는 신혼여행 대신 알몸으로 베드인(Bed In)을 선택한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떠오르는군요. 약간 우스개 같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레이디 고디바의 희생도 일종의 알몸시위로 볼 수 있겠지요.


 


 



                        Lady Godiva  by John Collier (1898)


           레이디 고디바의 설화를 모르시는 분은 이쪽 링크를 참조하시길


 


 


그러나 이 알몸시위 라는 게 마냥 효과적인 수단만은 아닌 게 워낙에 원초적인 표현 방식이다 보니 순간의 실수도 바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탓입니다. 시위자가 잠시 아차 하는 순간, 이 도수 높은 표현 방식에 취한 수용자들은 정작 중요한 메세지를 잊게 됩니다.     


 


코드가 스스로 메시지를 묻어버리는 이 상황을 피하려면 정말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특히 여자의 몸을 성적대상으로 소비하는데 아주 익숙한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자의 벗은 몸, 더욱이 젊은 여자의 몸은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변질되기 쉽습니다.


 


시위자가 알몸시위를 통해 전하려던 바가 묻히는 걸로도 모자라 최악에는 의도 자체의 순수성을 위협하기까지 하니, 참 귀하고 좋은 식재료입니다만 칼집 한번 잘못 내는 순간 독극물로 변하는 복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원초적인 표현 양식인 알몸은 칼집 한 번 잘못 내는 순간 말초적인 포르노그래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 참여를 주장한다는 우크라이나의 여성 단체   


  'FEMEN'의 퍼포먼스. 학원내 성폭력 근절이라는 그들의 구호와는


                  상관 없이 이미지는 성적으로 소비된다


 


바꿔 말하면 알몸 중 에서도 젊은 여자의 몸이 가장 큰 파급력을 가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섣불리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도 없지요. 앞서 말했듯이 벌거벗은 젊은 여자의 몸은 독이든 복어나 마찬가지인 탓입니다. 이목을 끌고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 까지는 좋지만 전하고자 하던 바를 왜곡하거나 매장시킬 가공한 위력을 가진 수단, 젊은 여자의 알몸.  


 


 


 



                길거리 스트립쇼’ 알몸 설교 목사 즉심회부(경향신문)


  아무리 그래도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지양합시다


 


 


그런데 이 위험천만한 '독이 든 복어'를 가지고 어느새 10년 가까이 작업 중인 예술가가 대한민국에 한명 있습니다. 익히 남로당을 통해서 소개된 바 있는 최경태 화백입니다.


 


 



[남로당 예술싸롱] SM in Art - 로리타콤플렉스, 욕망과 금기


[남로당 인터뷰] 음란화가 최경태를 만나다


 


 


 



                                            최경태 화백


 


 


그가 민중예술 이라는 이름으로 고개를 내민 90년대는 부지런하고도 바쁘게 흘러가 버렸습니다. 정권은 신군부에게서 문민정부로, 문민정부를 지나 국민의 정부로 넘어갔고 시간은 2000년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민중' 이라는 단어는 급속도로 화석화 되었고 더 이상 판화나 걸개그림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왔습니다. 더 이상 민중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문제제기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진 대한민국. 90년대 민중예술의 막차를 탔던 이들 중 일부는 방향을 바꿨고 일부는 떠났고 더러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독재, 민중, 탈춤, 판화, 집회, 투석, 화염병이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버티고 서있는 거대한 이름, 자본. 자본만은 세월이 흘러 정권이 변하고 사람이 바뀌어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최경태作 코리아 판타지. 캔버스에 유채, 1140호,1992년 (부분)


 


 


최경태 화백은 21세기에 들어 그 자본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작합니다. 물론 20세기 민중 예술적 방법을 계속 고수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이가 선택한 화두는 "섹슈얼리티" 였던 겁니다. 이제 성과 사랑마저 상품처럼 사고파는 자본의 첨단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 그 가운데 서서 최경태 화백은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의 정밀묘사를 통해 고발하고 문제제기를 시도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일조이의 예술적 알몸시위를 시도했던 겁니다. 대한민국의 음습한 치부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작업은 그가 선택한 알몸시위였습니다. 속칭 날라리로 불리는 여고생들의 벗은 몸, 원조교제를 상징하는 교복 입은 소녀, 교태어린 표정으로 다리를 벌린 젊다 못해 어린 소녀들.


 


 



                 2000년 여고생展 팜플렛에 수록된 작가의 자화상


 


 


그러나 그 대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알몸시위와 성토를 사회는 아주 간단히 찍어 눌러버렸던 게지요. 당국은 그를 그저 "음화 전시 판매, 음란문서 제조 교사 판매 반포죄" 로 처리해 버렸습니다. 시대의 고발자나 투사도 아닌 파렴치한 변태로 낙인 찍어 유배 보낸 겁니다. 계속해서 항소 했지만 대법원서마저 기각되었고 마침내 벌금형과 함께 그림 31점이 압류되어 소각 처분 당했습니다.


 


 


============================사건일지=============================


 


○ 2001년 11월 15일: 정식재판 판결 "단순한 누드가 아니고, 여고생의 오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벌금 200만원, 음화 31점 압류 소각 판결.


○ 2002년 5월 3일: 항소심 판결, "피고인의 그림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점이 인정된다" 항소를 기각한다.


○ 2002년 8월 23일: 상고기각, 음화 31점 압류소각, 벌금 200만원 최종판결.


○ 2003년 1월 3일 : 음화 31점 압류 및 소각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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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0년대 중반은 그의 작품 활동에 있어 암흑기였습니다. 예봉은 무뎌졌고 자기 검열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옷을 다 입은 여자를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백에 그림대신 글씨를 쓰거나 SM용구를 등장시켜 사도마조히즘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도. 


 


 



           자기검열에 시달리던 시기 남긴 새디스틱 몽키 연작중 한편


 


 


그랬던 그가 침묵을 딛고 2007년부터 천천히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국내에서 개인전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 외국에서 시범적으로 열었다 다시 서울로, 인사동으로 조심스럽게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겨울인 2008년 12월에는 아다라시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알몸의 여고생들을 그려내 힘든 시기를 딛고 일어섰음을 조용히 알렸습니다.


 


 



                   근작 가운데 수위가 비교적 온건한 한 점


 


 


아다라시 판타지 이후 1년여. 그가 다시 한 번 조용히 모습을 비춥니다. 에로티시즘이라는 맥락에 있어서 서로 방향을 함께해온 조훈 작가와 함께 욕망의 해부학자들 (Erocominist)라는 이름으로 연 합동전시회가 지금 열리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역주행하고 작가와 가수들이 숨죽여 엎드려있는 시기. 이 겨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최경태 화백. "예술은 도덕책이 아니잖아요. 예술마저 도덕이 된다면 어떻게 살아요. 예술은 개기는 것. 사회에 끊임없이 개기는 것!" 이라 밝힌 바 있는 그의 행보가 어디로 이어질지 한번 지켜봐 주십시오.


 



작가 약력 (개인전)


 


1987 한강미술관


1990 도올갤러리(회화) 한선갤러리(목판화)


1992 도올갤러리-“코리아판타지”


1993 금호미술관(회화,목판화)


1996 이공이공갤러리(목판화)


2000 보다갤러리-“포르노그라피”


2001 보다갤러리-“여고생”(포르노그라피2)


2003 쌈지스페이스-“1987부터빨간앵두까지”


2007 PROJECT SPACE 35 (New York)


2007 인사아트센터


2008 웨이방 갤러리 "아다라시 판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