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0.3.2.화요일


나나


 


편집자 주 -


본 기사는 프랑스 최대의 스포츠신문 레퀴프의 파스칼 기자가 쓴 김연아 특집 기사를 딴지 프랑스 통신원 나나님이 번역한 것이다. 나나님은 이전 트로피 에릭 봉빠르 때부터 파스칼 기자를 도와 통역 및 코디네이팅 업무를 담당했으며, 본 기사 역시 나나님이 자서전 내용을 비롯 여러가지 정보를 불어로 번역해서 제공한 것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스타


 


김연아는 아무 흔들림 없이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피겨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제 열 아홉, 그녀의 아우라는 거대하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의 시즈카 아라카와의 금메달 이후 4년, 아시아는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부문에 있어서 그들의 우월성을 각인시켜왔다. 하지만 그녀의 뒤를 이은 것은 같은 나라 출신의 곡예사, - 유일하게 트리플 악셀을 뛰는 여자 스케이터 - 마오 아사다가 아닌, 황홀하게 매혹적인 한국의 김연아였다. 현 세계 챔피언. 열 아홉, 모든 재능을 가진 그녀는 이 최고의 저녁을 위해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의 삶


김연아는 경기도의 공업도시 부천에서 자라났으나 그녀의 꿈을 충족시키기 위해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났다. 그녀의 꿈은 5회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미국의 스케이터, 미셸 콴처럼 되는 것이었다. 1990년 9월에 태어난 그녀는, 일찍이 남다른 그녀의 재능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네스에 의존해 첫번째 트리플 점프(토룹)을 뛴 이후, 12살에 모든 트리플 점프를 익혔고, 14살에 컴비네이션 점프를 완성했다. 16살의 김연아는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서 아사다 마오를 제치며 챔피언이 되었다. "그들의 라이벌리에 의해 연아는 스스로 성장했습니다. 연아의 어머니와 연아는 시간을 두고 마오의 스케이팅을 철저하게 분석해냈어요." 84년과 88년 올림픽에서 두번의 은메달을 따낸 그녀의 코치, 브라이언 오서가 밝혔다.


그녀가 토론토에서 전지훈련을 받던 때였다. 데이빗 윌슨의 안무를 받은 직후, 브라이언 오서와 김연아는 처음 만났다. "처음에 우린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땐 제가 아직 스케이팅을 계속하고 있었던 때니까 연아에게 어떻게 스케이팅을 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줄 수 있었어요." 그 만남이 있은 뒤 2주가 지나, 김연아는 직접 그에게 찾아가 코치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3번의 거절 이후, 브라이언 오서는 그의 스케이팅 커리어를 마무리했고, 2006년이 끝나갈 즈음, 십대 소녀 김연아는 토론토에 정착했다. 기계처럼 가차없이 정확한 신뢰도의 기술을 갖추기 위해,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완성형의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브라이언 쥬베르도 브라이언 오서의 지휘 아래 그녀의 훈련 동료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없이는 불가능 했을 일


두개의 다른 이미지를 믿어서는 안된다. 쇼트 프로그램에서의 복잡 미묘한 듯한, 신비롭고 섹시한 본드걸과 청명하게 빛을 발하는 프리 프로그램의 그녀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토론토의 오서에게 처음 갔을 때, 그녀는 절반 쯤은 우울한, 행복하지만은 않은 그녀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데이빗 윌슨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사실 전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에요." 이 자수 성가한 스케이터는 말했다. "피겨 스케이팅이 제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캐릭터를 꺼내준 셈이에요. 지금은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게 정말 좋아요. 제가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또 다른 측면은 그녀의 이름에 담긴 정체성 그 자체이다. 여권을 만들 때의 실수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유나 킴이 되었지만 사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금빛의 아름다운 소녀, 라는 뜻을 지닌 김연아이다. 2008년 김연아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스텔라'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지금껏 매일 그녀의 훈련을 지켜본 그녀의 어머니는 목요일 저녁, 퍼시픽 콜레시움의 경기장에서 그녀의 아버지 곁에서 눈물을 삼켰다.


 


오서는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 "아주 매섭고 정확한 안목과 훌륭한 아이디어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감탄하고 귀 기울이는 아주 드문 피겨맘 중 한 사람에요. 연아 어머니는 연아가 견디고 참아낼 수 있다는 걸 알아요." 


 


 


한국, 다이애나 비와 같은 위치의 김연아


 


(프레스 컨퍼런스가 아닌) 단독 인터뷰에서 김연아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의 에이전트는 김연아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도 주의깊게 관찰한다. 그녀의 대답은 에이전트의 통역을 거쳐 굉장히 짧고 무미건조해진다.


 


대한민국에서의 그녀는 한층 더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는 국민여동생으로서, 모두의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다. 보디가드 없이는 아무데도 갈 수가 없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에는 다이애나 비와 함께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브라이언 오서는 묘사한다.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그녀는 도디를 능가한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그녀는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 중 2009년 한해 가장 고소득을 올린 선수이다. NHL리그에 소속된 아이스 하키 선수를 제외한다면. 그녀의 수익은 2009년 한화 88억, 그녀는 그녀 스스로 캐나다에서의 훈련 비용을 해결한다. 2007년 이후, 그녀는 그녀 이후의 어린 스케이터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을 포함 20억원이 넘는 액수의 기부와 후원을 지속해왔으며 올림픽 직전 아이티에 1억원을 기부했다. 김연아의 아우라는 다만 피겨 스케이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를 보면, 카리스마와 유혹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직은 낯선, 미지의 나라출신이기 때문에 신비롭고요." 독일의 전설적인 피겨 스케이터 카타리나 비트는 말한다. 앞으로 또 얼마동안 이 스타는 빛을 발할 것인가? 김연아, 비트의 오마주를 받는 건 영광이고 또 그녀를 반하게 할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이 올림픽 챔피언은 다음달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그녀의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나설 것이다.


 


"그 다음에 두고 볼일이에요. 지금은 단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요. 제가 그토록 원하고 꿈꿔왔던 올림픽 챔피언으로서의 순간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