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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 사이에 긴장관계가 계속되는 요즘, 문득 한국의 이웃나라이자 필자가 현재 살고 있는 나라인 일본의 정치권력과 검찰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해졌다. 웬만하면 관련된 책이나 사러 서점에 갔을 텐데 불필요한 외출은 자제하자는 올바른 시민 감각을 발휘, 내 집에 머물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법무대신(法務大臣, 한국의 법무부 장관에 상응), 검찰총장"으로 검색하자 두 가지 대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나는 도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東京地方検察庁 特別捜査部), 줄여서 “도쿄지검특수부”다. 권력형 비리나 거대기업이 연류된 대형 경제사건을 전담하는 검찰의 한 부서다. 한때는 정치인이나 대기업 임원들이 무서워 해서 "울던 아이도 뚝 그칠 수사기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졌다고 한다.

 

또 하나는 법무대신이 검찰총장한테 행사하는 “지휘권”에 관한 이야기. 여당 간부가 관여한 것으로 의심된 사건과 관련해서 법무대신이 검찰총장한테 해당 여당 간부 체포를 잠시 미루라고 지휘하며 법무대신 자리를 내놓은 사건이다. 어떻길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파워를 갖춘 이들조차 검찰이라는, 어떻게 보면 행정기관을 구성하는 톱니바퀴에 불과한 부서의 눈치를 보았고, 법률에 규정된 "지휘권"을 행사했다 그래서 내각의 일원인 대신이 사임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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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크게 보면 행정부를 구성하는 부서임에 틀림없는데 법률상 다른 부서와 다르게 취급된단다. 말하자면 "살아 있는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법이 신중하게 권력과의 거리를 두게 한 것이다.

 

검찰청은 법무성(法務省, '성'은 한국의 법무'부'에 해당)에 속하는데, 법무성의 "바깥 부서"가 아닌 “특별한 기관”으로 분류되어 있다. 사실 행정부 조직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국가행정조직법에도 검찰청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검찰청 만큼은 검찰청법에서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검찰을 행정기관으로 의식하는 이가 없는 것 같다.

 

검찰은 범죄 행위를 수사할 뿐 아니라, 피의자를 재판에 회부(공소 제기, 즉 기소)하며, 법정에서는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유죄를 증명한다. 또한 유죄 판결이 나올 경우에는 형을 집행함에 있어서 책임지는 것도 검사다. 이렇게 보면 검찰과 그것을 구성하는 검사들은 범죄 처벌에 대한 나라의 사법 기능에 밀접하게 관여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사법 기능의 일익을 맡는다"는 특성이야 검찰청이 일반 행정 기관과 달리 권력과의 거리를 두고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자리에 있는 까닭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두 번에 걸쳐 이웃나라 일본의 정치권력과 검찰에 대해 “도쿄지검특수부의 탄생" 그리고 "지휘권"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 비리의 온상은 전후복구를 위한 돈뿌리기

 

나라의 온 힘을 동원하여 대미 전쟁을 치른 일본이 패전 후 제일 먼저 애쓴 문제는 '전후복구'였다. 그러나 온갖 산업을 한꺼번에 복구시킬 여력은 없었고 일단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물자, 즉 석탄과 철강을 중점적으로 생산하는 계획을 세운다. 1946년부터 3년 동안 실시된, 일명 “석탄・철강 초중점 증산계획”이다.

 

일본 경제의 복구를 목적으로 한 이 계획을 실시하기 위해 '복구금융금고'라는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정부가 대놓고 나랏돈을 특정 산업 분야에 뿌려주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돈이라면 누구 눈치 볼 필요없이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 업계 회사들은 앞다투어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 접근하였다. 오늘날에 말하는 로비활동이 업계 전체에서 난무하였다.

 

광란 속에서 눈에 띌 정도로 로비 활동이 활발한 회사가 있었다. '쇼와덴코(昭和電工)'라는 회사로, 2차대전 전부터 국내 화학∙소재 산업에서 매우 유력한 지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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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이듬해 2월, 쇼와천황(昭和天皇)이 일본 각지를 순행(巡幸,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는 일)하였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카와사키시(川崎市)에 있는 쇼와덴코의 화학비료공장이었다고 한다. 쇼와덴코의 위세가 보통 아님을 헤아리게 하는 에피소드다. 이런 쇼와덴코가 복구금융금고에 의한 융자를 받으려고 정치인과 관료를 상대로 공세를 퍼붓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 검찰의 고뇌

 

1948년 4월, 2차대전 중 군이 은닉한 물자를 조사하기 위해 국회에 설치된 '부당재산거래조사특별위원회(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에서 이런 의혹이 제기되었다.

 

"복구금융금고로부터 17억 엔(현재 가치로는 그 200 내지 300배 정도) 상당의 융자를 받은 쇼와덴코가 수억 엔 어치의 정치 헌금을 했다"

 

뇌물 수수를 의심한 하타노 아키라(秦野章, 후일 경시총감(경찰의 우두머리), 법무대신 역임)를 수반으로 한 경시청(도쿄도를 관할하는 경찰) 수사2과가 수사에 착수했고, 같은 해 6월 쇼와덴코 사장인 히노하라 세츠죠(日野原節三)를 체포하였다.

 

경찰의 분투도 있어서 수사는 원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보통 뇌물 사건에서 유력한 증거가 되거나 수사 진행의 실마리가 되는 건 피의자의 자백이다. 히노하라 사장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체포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철저히 묵비를 지키고 있었다. 이내 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돌파구는 생각치 못했던 데에서 뚫렸다. 검사 카와이 신타로(河井信太郎)는 회계장부를 읽을 줄 알았다. 그는 쇼와덴코가 복구금융금고로부터 융자받은 26억4,000만 엔 중 1억5,000만엔의 사용처가 명확치 않다는 점을 찾아냈다. 묵비로 일관하던 히노하라 사장을 함락시킬 실마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경찰이 1억 5,000만엔의 행방을 집중 추궁하자 히노하라 사장은 자백하기 시작하였다.

 

조서를 쓰던 카와이 검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사건이 너무 커서 조사하는 수사진이 놀랐다”. 맙소사 쇼와덴코가 뿌린 돈이 정치인 100명 남짓을 포함한 약 1,000명에 달하는 인사들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다.

 

그 중에는 당시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정권의 중추였던 쿠리수 타케오(栗栖赳夫)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니시오 수에히로(西尾末広) 부총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둘은 체포되었고 아시다 히토시 수상(총리)은 총사직(総辞職, 수상을 포함한 각료 전원이 사퇴하며 내각을 해체시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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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상 자리를 내놓은 아시다 히토시에게 모두 3건, 총액 200만 엔의 뇌물 수수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정권 수반 자리는 아시다 히토시와 대립하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로 옮겨갔기에 정치 환경이라는 관점에서는 아시다 히토시를 조사하고 경우에 따라 기소할 수 있기는 하나, 역시 수상 역임자를 일반인 비슷하게 수사 대상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검찰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고 한다. 특히나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에게 간접 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전직 수상을 체포・구속해서 조사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현실적 정치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일련의 수사를 주도해 온 카와이 검사의 결단이 검찰 내부의 의견을 수렴시켰다. 검찰은 중의원 의원의 지위는 유지했던 아시다 히토시에 대한 체포허락청구를 중의원에 제출하였고 중의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다음 날 도쿄지검은 수상을 사퇴한 지 얼마 안 되며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한 아시다 히토시를 체포하였다. 후쿠이 모리타(福井盛太) 당시 검찰총장이 공언했던 “범죄 용의의 확신이 있으면 수상이든 대신이든 검찰의 독자적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밝히며 처벌하도록 노력한다”는 말이 현실이 된 셈이다.

 

 

3. “도쿄지검특수부”의 탄생

 

다음 해, '쇼와덴코 사건'을 계기로 검찰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달라진다. 우선 새로운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이 시행됐다. 그때까지는 수사는 경찰이 주도하며 검찰은 기소 단계부터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정권이나 정치계 거물이 관여한 사건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검찰이 직접 나서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새로 시행된 형사소송법 제191조 제1항이 “검찰관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스스로 범죄를 수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검찰청법 제6조가 “검찰관은 어떠한 범죄에 대하여도 수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새로운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이 시행됨에 따라 소위 말하는 권력형 비리에 대해 수사 착수 단계부터 검찰이 나서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검사도 능력이나 특성에 따라 각인각색. 뇌물 수수로 대표되는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를 유효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능력이나 성격을 갖춘 검사 팀이 움직일 필요가 있다. 1947년에 설치된 은퇴장사건수사부(隠退蔵事件捜査部, 전쟁 중 군부가 빼돌려 숨긴 재산을 조사하는 검찰 부서)를 바탕으로, 카와이 검사 등 쇼와덴코 사건을 주도하던 검사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아 뽑힌 검사들을 중심으로, 정치인이 그 권력을 악용한 사건이나 대기업이 관여한 대형 사건을 전담하는 팀이 꾸려졌다. 이름하여 도쿄지방검찰청 특별수사부, 줄여서 도쿄지검특수부다. 훗날 “울던 아이도 뚝 그칠” 최강 수사부의 탄생이다.

 

하지만 쇼와덴코 사건에서는 그리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무죄 판결이 잇따라 나온 것이다. 이는 뇌물 수수 사건의 특수성에 유래한다. 뇌물 수수가 유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①공무원의 직무에 관련해야 되고(직무권한)

②부정한 금품임을 알면서(뇌물성의 인식)

③주고 받아야 한다(금전 수수 행위)

 

아시다 히토시 전 수상의 경우 3건 모두에 대해 '총 200만 엔을 받아 오오쿠라대신(大蔵大臣, 국가 재정이나 금융을 관할)으로 하여금 쇼와덴코를 유리하게 취급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 행위가 행해질 당시 아시다 히토시는 외무대신, 즉 외교에 관한 직무를 맡고 있었다. 아시다는 나라에 의한 융자에 권한이 있는 오오쿠라대신에게 쇼와덴코를 '연결'시켰을 뿐이고, 이것은 외무대신의 직무권한에 속하는 일 아니다. 이에 따라 아시다 히토시의 행위에 요건 중 ①인 '직무권한'이 결여된다고 보았고, 무죄가 선고되었다(1958년 형법 개정으로 알선수회(收賄)죄, 즉 뇌물을 받는 범죄가 규정됨에 따라 뇌물을 받아 권한이 있는 공무권에게 연결해주는 “알선” 행위도 처벌 받게 되었다).

 

쇼와덴코 스캔들 사건공판에서 무죄가 되어, 보도진에게 기쁨을 말하는 아시다 전 수상.jpg

쇼와덴코 사건 공판에서 무죄를 받은 뒤

보도진에게 기쁨을 말하는 아시다 전 수상

 

후일 수상 자리에 앉는 후쿠다 타케오(福田赳夫) 당시 오오쿠라성 은행국장의 경우, 쇼와덴코 사장 히노하라 세츠죠에게 “연말인사”로 10만 엔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요건 ②인 “뇌물이라는 인식”이 없었다고 해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대략 이런 식으로 “조사에 임한 검사가 놀랐던” 대형 뇌물 사건에 연루된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한결 같이 무죄 판결을 받거나 집행유예되어 버렸다.

 

한편 뇌물을 준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히노하라 사장에 대해서는 1심, 2심 공히 집행유예 없는 징역형이 선고되었으나, 상고심(최고재판소)이 수회(収賄, 뇌물을 받음) 측에 무죄나 집행유예 밖에 받지 않았는데 피고인(히노하라 사장)에 대하여 “실형을 과하지 아니하면 형정(刑政, 형사정책)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단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집행을 유예하는 판결을 내렸다.

 

검찰은 완패당한 셈. 피고나 변호인은 검찰을 거세게 비판했다. “아시다 내각을 쓰러지게 하기 위한 수사다”, “충분한 증거도 없고 유죄의 확신도 없는데 기소했다” 등등. 그러나 국민들은 이 결과를 다르게 보고 있었다.

 

 

4. 국민 정서를 반영한 듯한 아시다 재판 1심 판결문

 

쇼와덴코 재판에서 고배를 마신 검찰이었으나 국민 대다수의 시선은 -"뜻밖에"라고 해도 될까- 고왔다.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아니 정치권력에 대해서 범죄의 혐의가 있으면 공소를 제기하여 법원의 판단을 구한다는 적극성을 지지한 것이다.

 

이러한 국민 정서를 대변하듯 아시다 히토시 전 수상에 대한 1심 판결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아시다가 수상 재임 중인) 쇼와23(1948)년 여름 경부터 아시다 피고인의 신변은 의운(疑雲, 의심이 갈 만한 데가 있는 점)에 휩싸이며 무슨 부정 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국민적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당시 사회 정세 아래에서 만약 검찰 당국이 위와 같은 범죄 혐의가 충분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문에 부쳤을 때, 세상의 의혹은 더더욱 깊어져 검찰 당국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고, 세도인심(世道人心, 세상의 도덕과 사람의 심정)에 악영향은 미칠 거라고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검사가 감연히 공소를 제기하여 법원의 판단을 구한 것은 공연한 태도로서 오히려 상찬받아야 될 것이다.”

 

'판결문'이라고 하면 오로지 법적 논리만을 가지고 냉정하게 시비를 가린다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인데 종종 정서적 내용이 담겨지기도 한다. 아시다 재판 판결문 역시 부패한 정치계 인사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실형 판결을 얻지 못한 검찰이 재판에서 이겼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민은 권력을 이용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부정 행위를 적발하려고 안간힘을 쏟은 검찰을 지지하였다. 도쿄지검특수부는 권력형 비리를 감시・적발하는 최강 수사기관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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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년 후. 그들이 체제를 꾸려 정치권력과 본격적으로 맞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검찰이 법무대신에 의한 “지휘권 발동”이라는 벽에 부딪치며 정치권력 역시 큰 상처를 입은 격렬한 대결. 다음 회에는 도쿄지검특수부와 정치권력이 격한 대결을 벌인 경과를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