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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지만, 그 과정이 치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취업시장은 그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인분 같은 1인분을 주문하듯, 세상은 경력사원같은 신입사원을 원했다. 일 년 넘도록 내 회사인 듯 내 회사 아닌 곳에서 인턴만 세 번을 했다. 결국 최종합격을 받아 든 곳은 65번째 지원한 회사였고, 10번째 면접을 본 회사였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소원이었던, 그냥 회사도 아니고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건물 드높은 회사에 입성했다. 목에 달랑거리는 정규직 사원증만으로도 가슴 벅찬 첫 직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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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벅참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찐 한숨이 나오는 순간들도 쌓여갔다. 상사가 A4용지에 쓱쓱 그린 그림을 피피티 슬라이드로 만들어 내는 요술 지팡이가 된 기분이 들 때. 훌륭하게 마무리된 행사에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가, 난데없이 다과 음료 배치로 핀잔을 들을 때. 결재가 급한데, 하하 호호 길어지는 임원들의 티타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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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자 설문조사에서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퇴사 사유는 ‘조직/직무적응 실패’다. 입사 3년 차, 퇴사를 결심하고 유학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3년 차 신드롬’이나, ‘직장인 사춘기’같은 단어와 함께, 좀 더 진득이 적응을 시도해보는 것에 대한 조언이 많았다. 그러나 단순히 상사 혹은 조직문화가 안 맞는다고 생각없이 밥벌이를 차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음… 매우 적다.

 

‘직장인 사춘기’라는 단어 안에는 퇴사 결정을 미성숙한 충동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있다. 하지만 퇴사는 필연적으로 매우 복합적이며 계산적이다. 저마다의 공식으로 잔류와 퇴사 사이에서 치열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본다. 다름 아닌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결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주변 퇴사 경험자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퇴사의 궁극적인 이유는 현재의 유지와 지속이 최선이 아니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이행했던 나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부속품이로소이다

 

첫 직장에 입사했을 때, 초등학교부터 영어를 공부해서 토익 800~900점은 기본으로 하는 신입을 보면 위기감을 느낀다던 차장님이 있었다. 아마 지금 90년대생 사원 대리들도 10년 후에 신입사원을 보며 위기를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신입들은 초등학교부터 코딩 교육을 받아 프로그래밍쯤은 우습게 하는 사람들일테니까. 해외 영업직도 아닌데 영어가 유창한 신입을 보며 느꼈던 나의 윗세대의 서늘함을, 개발직도 아닌데 프로그램을 척척 짜내는 신입을 보며 나도 느끼게 될 것이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사라진 전자사전, PMP, 디지털카메라가 스마트폰 하나로 전부 흡수되는 것을 목도한 밀레니얼 세대는, 이대로 멈춰 서서 시키는 일만 하다가는 불꽃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회사의 동력이자 기둥이자 미래가 되겠다 말하고 입사했지만, 정작 내게 쥐어진 일은 다른 사람을 데려와서 한 달만 가르쳐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회계사, 변호사, 기자 전문직도 대체할 수 있다는데, 내 업무영역은 아무리 봐도 알파고 족속들에게 너무나 쉽게 함락될 것 같았다. 일반 사무직 회사원들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불안감은 ‘대체 가능성’이다.

 

나름 성실히 대학 생활을 보내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회사에 들어왔지만, 이렇게 작은 한 줌의 능력으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일해서는 대체 불가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한 직원이 고위 임원이 되면 ‘회사원 신화’라는 말이 붙는다. 그만큼 회사 일만 열심히 해서 높은 자리까지 성장하는 것이 어렵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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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톱 모델 한혜진 씨가 “배곯지 않기 위해선 굶어야 한다”라고 고충을 말하는 것을 보며 공감이 됐다. 다들 그렇게 산다. 외국계 재무팀 후배는 미국 회계사 공부를 하고, 제조업 인사팀 친구는 노무사 공부를 하고, IT 회사 선배는 데이터 분석 자격증을 공부한다. 도대체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것들은 어찌나 많고, 새로운 자격증은 세상 끊임없이 만들어지는지.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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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울 것이 없어서 퇴사한다는 부하직원에게 부장님은 ‘여기가 회사지, 대학교냐’라고 일갈을 날린다. 맞는 소리다. 회사에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나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사 직원으로 여기서 벌 돈이 빤했다.

 

선배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연봉 테이블이 대충 견적이 나온다. 임원에 도달하지 못했을 경우 20년 후에 내가 받고 있을 월급의 숫자들을 넣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자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사기당하지 않고, 가족들이 크게 아프지 않으며, 자식이 유학을 떠나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간다면 수도권 어딘가 집 한 채 할 수 있을 정도. 음, 요새 집값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불가능이다. 망할. 아무튼 은퇴 후에도 아마 자식이 다 크지 않았을 테니, 계속 돈을 벌어야겠지? 그렇다면 20년 후 퇴사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져 있다. 하나뿐인 집 담보대출받아 치킨집을 차리는 수밖에.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앞으로 먹고 살 길이 구만리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정된 20~30년 동안 최대한 돈을 벌 것인가.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 회사는 나 혼자 특히 일 잘한다고 성과급이 드라마틱하게 나오지 않는다. 내 돈 들여 대학원을 졸업해도, 외부 교육을 들어 전문성을 향상해도 회사는 내 월급을 인상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담당 직무 외 포토샵, 동영상 편집 등 추가적인 역량이 있어도, 앞으로 나한테만 관련 일 다 시킬까 봐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공짜로 신문기사 키워드 검색하는 프로그램을 짜볼까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회사는 소프트웨어 월 사용료 아껴서 날 주지 않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될 일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켜보고만 있었다.

 

배수의 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시간이 이어졌다. 고민은 점점 더 단순하고 처절해져갔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내 업무는 특성상 운전기사 딸린 고급 차를 타고 와서, 조금 일하고 많이 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일하다 보면 조금은 억울한 날들도 있다. 강연 대상과 행사 주제를 사전에 열심히 설명해도, 그냥 평소 강연하던 이야기로 한두 시간 떠들고 몇 백만 원씩 받는 그들. 몇 주간 팀원들이 철야 근무하며 준비한 자료보다 잘 차려진 한식당의 메뉴판을 조금 더 유심히 보며 식사 대접받고 가는 그들.

 

물론 임원, 고문, 사외이사, 특강 연사 등 대단한 전문가들과 일하다 보면 배우는 점이 많다. 그들이 툭 던진 한마디에는 값비싼 통찰과 경험이 묻어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저렇게 되냐는 것이었다.

 

내 경험만 가지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해외 유학이다. 대부분 그 옛날 다들 어렵던 시절에 외국에서 공부를 해온 사람들이다. 얼굴이 좀 익으면, 외국 유학 생활 중 김치가 먹고 싶어 얼마나 애달팠는지, 영어를 익히기 위해 얼마나 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 에피소드 하나씩 꺼내놓는다.

 

지난 연재 글에 ‘유학은 이제 가성비 안 나오는 시대’라는 요지의 댓글이 달렸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모든 유학생이 사회 지도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회 지도층이 유학을 다녀온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국내 30대 기업 임원 24%, 30대 그룹 총수 63%, 후계자 90%가 유학파다. 21대 국회의원 중 대학원 석사 이상 학력자가 60%가 넘고, 17%가 해외 유학을 다녀왔다. 

 

나의 퇴사와 늦은 유학은 어떻게 직업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는가 현실적인 고민의 결과였다. 내가 처한 모든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혹 무모해 보일지라도. 물론 퇴사의 셈법에 오랫동안 가져온 유학에 대한 로망이라던가, 30대를 맞이하는 조급함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거창한 이야기였다. 한 줄로 줄이자면 나도 퇴사하고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는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냉혹해진 현실에게 처맞기 전까지는. 재취업 과정이 녹록지 않을 것임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웬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가 등장해 그 난이도를 헬게이트로 만들어 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입학-군대-대학졸업-취업’으로 이어진 표준 트랙을 달리던 나는 응당 결혼이라는 다음 목적지로 달려가던 중 경로를 틀었다. 새로운 30대의 감상은 마치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갑자기 내비게이션에서 길이 사라지더니, 차 아이콘이 길 없는 흰 바탕에 붕 떠 있는 기분이다. 경로변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경로 이탈이었던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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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