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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6년 12월 11일 밤.

 

장국영 뺨치게 잘생긴 한 남자가 거울 앞에 섰어. 이 남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구국을 위한 행동을 하느냐, 상관의 잘못된 판단을 모른 체하고 자신의 영달을 지키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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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중국의 12.12인 시안사건의 설계자 장학량이었어. 마흔이 되기 전에 가슴엔 별을 달고 잘생긴 외모로 무솔리니 딸의 마음도 훔친 그가 시안사건을 설계하게 된 배경과 대반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려줄게.

 

2.

 

장학량은 1898년 6월 4일 만주 지역 군벌에서 위세를 떨치던 장작림의 장남으로 태어났어. 아버지가 마적생활을 청산하고 위안스카이 휘하에서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쌓아갈 때 아들인 그도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무섭게 성장했어.

 

그러나, 1928년 동북의 왕이라고 불리던 장작림이 탄 만주행 기차가 일본군에 의해서 폭발되었고, 장학량은 장개석과 손잡고 조국과 아버지를 위해 일본군과 싸우기로 했어.

 

그런데, 1931년 9월 19일 일본 관동군은 자신들 담당구역 내의 만주철도를 셀프로 폭파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어.

 

“아노! 이것은 대일본 제국에 대한 중국의 심각한 주권 침해 행위이다. 이에 우리는 정당한(?) 군사 행동으로 적의 도발에 맞설 것이다.”

 

관동군은 만주 전역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고 마침내 1932년 3월 1일 만주 괴뢰국을 세우는 몹시도 변태적인 짓을 마무리 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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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버지와 성장의 터전이었던 만주까지 일본에 빼앗긴 장학량은 타도 중국 공산당에 포커스를 맞춘 장개석 설득에 나섰어.

 

“일본! 타도 일본이 우선입니다. 지금 같은 민족인 중국 공산당을 공격 할 때가 아닙니다. 외세인 일본을 먼저 물리치고 공산당을 제거해도 늦지 않습니다.”

 

“자네 혹시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친 거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중국 공산당의 숨통을 끓어놓을 절호의 기회야. 일본은 감히 우리 중국을 어찌하지 못할 걸세. 우리의 최대 적은 중국 공산당이야. 자네가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지만 상관은 나란걸 명심하게나. 안색이 안 좋은 게 좀 쉬어야겠어. 유럽에 가서 좀 쉬다 오게.”

 

3.

 

이렇게 1933년 장학량은 유럽으로 때아닌 안식년 휴가를 떠나게 되었고,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가 맡은 임무는 일본타도가 아닌 중국 공산당타도였어.

 

‘이건 아닌데, 아버지의 원수라서가 아니라 나라의 원수이기에 일본을 먼저 쳐야 하는데…… 어쩌면 결단의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중국 전역은 학생들을 비롯하여 항일운동으로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장학량은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중국 공산당인 홍군의 토벌 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세월은 또 흘러 대장정을 마친 홍군이 시안으로 이동하자, 장개석은 중국 공산당의 공격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 운명의 장소로 갔어. 이 첩보를 접한 장학량의 오른팔인 양후청이 그의 방문을 열어젖혔어.

 

“장군님! VIP가 비행기를 타고 여기 시안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독전 때문이라고 합니다.”

 

“독전이라…...중국 공산당의 끝을 직접 지휘하겠다는 거군.”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제끼시죠?”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둡시다. 내 조국을 사랑하는 사나이의 눈물로 호소를 해보겠소. 그도 이번에는 틀림없이 타도 일본을 외치는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요.”

 

장개석이 시안에 도착하자 장학량은 그를 찾아 눈물의 스피치를 했어.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을 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입니다. 민심을 듣고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신다면 저는 침략자 일본을 공격하는 최선봉에서 하찮은 제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총구의 방향을 돌리실 것을 사나이의 눈물로써 호소합니다.

 

“내가 이래서 직접 비행기를 타고 왔다니까! 또 그 소리인가? 그 끈기와 집착으로 일본 말고 공산당을 때려잡으란 말이야! 국민들이 뭘 안다고 그래! 일본보다 더 나쁜 놈이 공산당이라고! 자네 같은 고위직부터 이런 썩어빠진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공산당 토벌이 이리 늦어지는 것이야. 이번에는 내가 직접 지휘해서 이 홍군의 씨를 말려야겠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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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장학량과 양후청은 결단을 내렸고, 12월 12일 새벽 5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시안사변이 시작되었어. 양후청의 병력은 기습적으로 장개석의 호위대를 제압하고 장학량의 병력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달아나던 장개석을 잡았어.

 

그리고, 시안사변의 설계팀 내부에서도 장개석의 처리를 놓고 의견이 갈렸어.

 

“장개석을 죽여야 합니다. 항일하겠다는 약속만 받아내고 살려두면 결국에는 우리가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일본군과 싸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장개석과 국민당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 국민당의 TF팀을 불러라”

 

다음 날 시안 공항에는 국민당의 장개석 석방을 위한 TF팀이 도착을 했고, 여기에는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이 포함되어 있었어. 그런데 당시의 사진을 보면 그녀의 표정은 몹시도 평온해 보여.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장학량의 모습도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어.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오랜만이군요. 더 멋있어지셨어요.”

 

그랬어. 이 둘은 사실 과거 연인 사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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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음 날 양측이 합의를 마치고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어.

 

“우리는 시안사변을 계기로 타도 일본을 위해 2차 국공합작에 합의했습니다. 전 인민 앞에서 내전정지, 일치항일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장개석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어. 그리고, 장학량은 성공한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제 발로 군법위원회로 걸어 들어갔어.

 

‘됐다. 이제 우리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 개인으로는 아쉽지만 군인으로서 후회 없다.’

 

장학량은 모든 지위를 잃었음은 물론이요. 10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어.

 

장개석이 1949년 대만으로 쫓겨 가면서 중국 본토의 진귀한 보물을 배에 싣고 간 사실은 알고 있지? 그 보물들은 현재 세계 4대 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장개석이 도망을 치면서 보물과 함께 압송해간 이가 바로 장학량이야. 자기의 부인의 옛사랑이자 자신을 납치했던 남자를 잊지 않고, 끌고 가 1993년까지 가택 연금을 시켰어. 남자도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리겠어.

 

가택연금이 풀린 후 한 기자가 왜 장개석을 그때 죽이지 않았냐고 물었어. 그의 대답은,

 

“그녀를 과부로 만들고 싶지 않았소.”

 

어떤 나라의 군인들은 개인의 욕심을 위해 자국민에게 총질하고 모든 것을 차지하기도 하잖아. 장학량이 완벽한 인간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군인으로서의 판단과 커리어에는 박수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장학량은 1995년 동생이 있는 하와이로 건너가 2001년 10월 무려 104세를 일기로 사망을 했어.

 

 


 

 

편집부 주

 

 필자의 책 "찌라시 한국사"에 이어

드디어 "찌라시 세계사"도 출간됐다.

 

필자의 본업과 사연에 대해선

아래의 기사를 참고하시라.

 

 43년 차 좌천된 추심원과 4년 차 작가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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