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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에 힘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거대한 괴물은 천천히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누군가 ‘악마가 온다’고 소리쳤다.

- 1차대전 당시 탱크를 처음 목격한 독일군 오토 슐츠 중위의 회고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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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7월 1일, 5개월 간 이어질 '솜 전투(Battle of Somme)'가 시작된다. 첫날 영국군 13개 사단, 프랑스군 11개 사단으로 가볍게(?) 시작된 전투였지만, 11월이 되어선 영국군 51개 사단, 프랑스군 48개 사단으로 규모가 확장된다.

 

영국군 사상자는 전투 첫날에만 5만 8천 명이었고, 전투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는 41만 9천여 명이나 되었다. 프랑스군은 20만 4천 명, 상대편인 독일군은 43만 명에서 60만 명이 죽거나 다친 걸로 파악된다. 제1차 대전의 참상을 말할 때 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솜 전투의 결과다.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치른 연합군은 대략 6마일(9.66km) 앞으로 전진한다. 허무하다면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0.

 

기관총과 중포, 철조망과 지뢰로 만들어진 방어망을 뚫기 위해 각국은 저마다의 머리를 쥐어짜냈다. 그리고 늘 그렇지만 언제나 기괴하고 이상한 것들은 영국이 만들어낸다. 1915년부터 영국은 비밀리에 탱크를 준비했다. (‘탱크’란 이름도 비밀 유지를 위해 만들었던 거다)

 

1916년 9월,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솜 전투를 끝장내기 위해 영국은 비밀무기 ‘탱크’를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영국군 탱크부대 상당수가 이 결정에 반대 입장을 비쳤다. 압도적 수량을 확보한 다음 일시에 확 밀어붙여야 제대로 된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때 영국이 투입할 수 있었던 탱크의 숫자는 고작 50대 남짓이었다. 전투 첫날 끌고 간 전투가 49대. 이중 전투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숫자는 18대 남짓이었다. 탱크는 기계적 신뢰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1916년 9월 15일, 영국군은 이 날을 작전 결행일자로 잡았다. 가지고 있던 모든 탱크를 싹싹 긁어모아, 여기에 10만 병력을 붙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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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탱크를 앞세워 독일군 지역으로 밀고 들어갔다. 영국군 6사단은 당일에만 4천 명, 14사단은 4천5백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첫날 투입된 10만 명의 영국군 중 2만 9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탱크도 별 거 없었네.”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탱크는 나름 ‘훌륭한 성과’를 냈다. 첫 실전이기에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 오판 등을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영국군은 9월 15일부터 22일까지 솜 전역 중심부 3.7킬로미터까지 진격했다. 솜 전투 전기간 동안 독일군은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9월에만 독일군은 13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후 세계는 '탱크'란 새로운 무기체계 개발에 뛰어든다. 

 

 

1. 

 

‘냉정히 말하면 2차대전은 기갑전 발전사’라고 평하는 이들이 있다. 1차대전 씨앗을 뿌린 전투기와 탱크는 2차대전에서는 주역으로 활약한다. 소위 말하는 ‘전격전’이란 게 등장했고(독일군의 프로파간다로 과대포장됐지만, 독일군은 늘 해왔던 기동 섬멸전을 했던 것 뿐이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강철의 대격돌’이라 불렸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과 소련은 거의 1만 대가 넘어가는 전차를 끌고 왔다(성채작전과 뒤이은 반격작전을 보면, 소련은 5~7천 대의 전차, 독일군은 3천여 대의 전차를 투입했다). 

 

이제 전차는 명실상부한 지상전의 ‘왕자’가 됐다. 어지간한 나라들이 저마다 전차를 만들겠다며 뛰어들었다. 전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고 굳게 믿었다.

 

특히 이스라엘은 탱크가 곧 전투력의 상징이라 받아들였다. 워낙 인구수가 적은 나라이기에 한 번 전투에 전체인구의 1%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최악의 사태를 겪은 이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는데 골몰하게 됐고, 그 방책으로 나온 게 ‘기갑부대’와 전차였다.

 

이스라엘 전차부대는 주변 아랍제국들을 유린했고, 이스라엘 군은 전차부대 육성에 모든 걸 걸었다. 전차만 있다면, 이스라엘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신화가 한 번 깨진다. 바로 제4차 중동전, '욤 키푸르 전쟁(Yom Kippur War)'이 시작된 거다. 

 

그동안 이스라엘 기갑부대에 철저히 유린당해 온 이집트가 절치부심 해오며 준비했던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바로 대전차 미사일이었다. AT-3 새거(Sagger)와 RPG-7으로 무장한 이집트 보병들이 이스라엘 전차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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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내놓은 1세대 대전차 미사일인 이 녀석은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 전차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장거리에서 AT-3 미사일이 1차로 전차를 노렸고, 이를 피해서 후퇴하거나 하는 전차들은 AT-3 진지 근처에 겹겹이 배치된 RPG-7이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에서 800여 대 이상의 전차를 잃었다. 

 

제4차 중동전이 끝나자마자 전훈 분석이 이어졌고, 전세계 군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전차 무용론”

 

현대전에서 전차가 쓸모없어졌다고 말하는 거였다.  

 

 

2.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 전차들이 큰 피해를 본 이유는 뭐였을까? 가장 큰 이유는 전차 혼자 돌격한 것이다(닥돌의 문제).

 

전차는 강해보이지만, 의외로 약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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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는 숨을 수가 없다. 덩치가 너무 커서 보병에게 노출되기 쉽다. 게다가 시야도 좁다. 전차장이 해치를 열어서 시야를 확보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적의 포격이나 저격병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매복해 있는 미사일 진지에게는 더 없이 좋은 표적이다. 전차에겐 105미리, 120미리 전차포가 있다고 하지만... 이건 직사화기다. 

 

은폐, 엄폐해놓은 미사일 매복진지를 공격하기엔 한계가 있다. 이런 보병을 잡기 위해선 기계화 보병. 즉, 전차와 함께 움직이는 병력들이 필요했다. 아울러 미사일 진지를 타격하기 위한 곡사화기가 필요했다.

 

4차 중동전 당시 이스라엘 전차병들은 미사일 진지를 발견하면, 아군 박격포 부대에 지원 요청을 했고, 박격포 진지에서

 

“마감탄 떴다!”

 

란 무전을 들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병의 미사일 진지를 타격하는데는 곡사화기만한 게 없었다. 이 때 이후 이스라엘 군은 자주포와 포병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모자라 전차에 박격포를 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전차의 방어력 향상을 고민했다. 대전차 미사일의 탄두가 창이라면, 이를 막아낼 방패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던 거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볼 수 있다. 새로 개발될 제3세대 전차에 복합장갑(Composite armor)을 채용한 거다. 여러 소재를 조합해 만든 이 복합장갑은 대전차 고폭탄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복합장갑의 등장은 이후 3세대 전차의 기준점이 됐다. 이미 그 이전부터 복합장갑에 대한 연구는 있어왔지만, ‘성형작약(Composite armor)’ 탄두를 단 대전차 미사일이 일상화되면서 복합장갑은 필수가 됐다)

 

문제는 지금까지 만들어 낸 2세대 전차들이었다. 대전차 미사일과 대전차 로켓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2세대 전차의 장갑을 살려내야 했다. 아니면? 모두 버려야 했다. 이때 등장한 게 바로 폭발반응장갑, ERA(Explosive Reactive Armou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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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작약탄을 막기 위해선 장갑의 두께를 늘려야 한다. 문제는 이 장갑을 무한정으로 늘릴 수 없다는 거다. 당장 엔진을 돌려야 하지 않는가? 장갑을 늘릴수록 몸이 무거워지고, 몸이 무거워지면 전차가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다. 즉, 무게 증량에 한계가 있다는 거다. 

 

이걸 일거에 해결해준 게 ERA였다. 간단히 말해서 '폭발반응장갑'이라고 하는 물건인데, 성형작약탄은 메탈제트. 즉, 쇳물을 일점으로 날려서 전차의 장갑을 뚫고 들어간다. 이 메탈제트를 폭발로 날려버리는 게 ERA의 원리였다. 폭탄으로 폭탄을 막는 셈이다. 

 

당연히 1회용 방어장갑이고, 한 번 사용하면 같은 위치에 같은 걸 붙여야 한다. 1회용이라고 해서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차무용론이 나오는 상황이었고, 미사일 한 방에 그 비싼 전차가 날아가는 거다.

 

그런데 이걸 ‘효과적으로’ 극복해낼 방도가 나왔다. 1톤 가량만 투자하면 10톤의 장갑을 늘리는 효과를 올릴 수 있기에 기동성에도 크게 제한이 가지 않는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전차는 자신들에게 불어닥친 ‘전차 무용론’을 자신들의 방법으로 극복해낸 거다. 그러나 전차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는 계속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