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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모리얼 사피언스 혹은 핑계 인간 

 

기념일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이 있고 일제강점기 민중의 봉기를 기념한 삼일절,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 심지어 철도의 날, 무역의 날, 납세자의 날,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심자는 식목일도 있다.

 

개인 차원에선 대표적으로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생일이 있고, 결혼기념일 따위가 있다. 식품업자의 상술이라고 비판받는 밸런타인데이, 화이트 데이, 삼겹살데이, 짜장면 먹는 블랙 데이, 빼빼로 데이도 빠질 수 없겠다. 기념 못해 죽은 귀신이 붙었나 의심해볼만 하다. 그러고 보니 죽으면 태어난 날 뿐만 아니라 죽은 날까지 추념하니 인간은 가히 메모리얼사피언스다.

 

딱 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기념일이라는 게 뭔가 대단한 절차나 대의명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만들면 되는 거다. 그리고 이 사회의 많은 기념일 중의 대다수는 섹스를 하기 위한 ‘핑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살면서 ‘정보통신의 날’엔 연인끼리 신속하게 연락해서 섹스를 하고, ‘보건의 날’에 안전하고 위생적인 섹스를 한다. ‘어버이날’엔 부모님들이 섹스를 하고 ‘노인의 날’엔 노인들이 섹스를 하고 ‘어린이날’엔 어린이를 만들기 위해 섹스를 하고 ‘바다의 날’엔 바닷가에서 섹스를 하며 ‘체육의 날’엔 아크로바틱한 체형으로 섹스를 한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어떻게든 365일 섹스를 하긴 해야겠는데 오만가지 핑계를 궁리해대다 보니 애꿎은 예수님과 부처님과 심지어 단군 할아버지까지 긁어모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과 개천절이 그 결과다. 그중 ‘섹스’에 가장 최적화된 기념일이 바로 ‘크리스마스’다. 예수님이 이걸 노렸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어쨌거나 예수님은 ‘사랑’이고 부처님은 ‘자비’이며 단군 할아버지는 ‘홍익인간’ 아닌가.

 

비호감 이성에게 적선하듯 자비로운 섹스를 할 수도 있고 못생긴 이성에게 한번 주면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섹스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아무래도 ‘섹스(사랑)’ 그 자체가 아이콘이자 슬로건이다보니 이 땅에서 ‘크리스마스’는 섹스의 날로 대단히 각광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동안 생성된 단백질의 양이 장마철 섬진강댐 방류량과 맞먹는다는 옥수퍼드대 스티붕숭 교수 연구팀 연구 결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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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은 뒷전이 된, 내 친구 삼룡이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호황이었다는 1990년대 초 12월 24일 크라스마스 이브. 요즘은 사회 전반에서 크리스마스라고 딱히 들뜬 분위기가 사라졌지만 그 시절 크리스마스는 실로 대단했다. 모든 사내들은 딱딱하게 돌아다녔고 왠지 모르게 밤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던 때다. 신촌 로타리는 섹스를 하기 위해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선남선녀들로 넘쳐났더랬다. 당시 나이 스물 남짓의 내 친구 삼룡이도 그중 하나였다.

 

삼룡이는 오로지 이 날을 위해 엄마 지갑에 손을 대고 동생 돼지 저금통 배때지를 따는 등, 일 년 동안 그야말로 근면 성실하게 돈을 모았고 손엔 물경 20만 원이라는 거금이 들려 있었다. 순전히 운이 좋아서 어쩌다가 취향이 독특한 여자를 만나 사귀게 된 후, 평소에도 틈만 나면 꾸준히 섹스를 하고 살았지만 정규 시즌 내내 1위를 해봤자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을 못하면 진정한 챔피언으로 쳐주지 않듯,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는 섹스는 평소 섹스와는 격이 다른 거룩한 섹스 아닌가.

 

삼룡이는 모태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다 그렇듯이 짚신도 제 짝이 있는 법. 어찌 저찌 살다보니 신기하게도 딱 짚신을 만났다. 짚신 보다는 게다짝 같이 생긴 게 삼룡이지만 뭐, 그랬다. 

 

삼룡이의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밥 먹을 때 성호를 긋진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길에서 똥을 싸는 따위의 행동을 극도로 혐오했다. 배임‧횡령 같은 범죄를 딱히 혐오하지는 않은 걸로 봐서 ‘범죄’라고 무조건 싫어하는 건 아닌 듯했다.

 

어느 날 데이트 당시 “우리 아빠는 해외를 상대로 무역업을 하는데 왜 우리나라 정부에도 세금을 내야 하느냐”며 대한민국의 조세제도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서 삼룡이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진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다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앞으로 못하게 될까 봐 삼룡이는 대한민국 국세청과 불합리한 조세제도에 대해 탁자까지 내리치며 격분하는 시늉을 했다.

 

90년대 초반 몰락해가던 운동권의 끝자락에서 대학 선배들에게 의식화 비스무리한 교육을 받으며 반사회적인 사상을 키워가던 삼룡이는 어떤 의미에선 같은 반사회적인 사상을 가진 짝을 만나 매판자본주의의 끝판왕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틈타 섹스할 생각에 혁명은 뒷전이었다.

 

3. 목사와의 쇼당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던 것이,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지라 크리스마스 시즌엔 교회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사귀기 위해 삼룡이 또한 금쪽같은 주말을 그녀가 다니는 교회에 출석해야 했다. 다들 찬송가를 부를 때 삼룡이는 입만 벙긋벙긋하며 립싱크를 하는 건 그럭저럭 괜찮았다. 예배가 끝나고 교회를 나설 때 입구에 주르르 도열해 있던 할머니들을 일일이 포옹해야 하는 것도 견딜만했단다.

 

가장 힘들었던 건 주말 예배마다 노란 봉투에 이름을 써서 헌금함에 넣는 것이었다. 삼룡이의 모친은 극렬 불교신자였기에 당신의 아들이 예수쟁이와 사귀려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그런 판국에 “교회 헌금 내야 하니까 돈 좀 줘”라고 할 순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삼룡이 본인도 술 처먹고 노니라 저녁에 아르바이트라도 할 틈이 없었다.

 

이름까지 써서 돈을 내야 하니 천 원단위는 좀 그러니까 만 원짜리 한 장을 넣었지만 가뜩이나 빠듯한 지갑 사정엔 그만한 액수도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애꿎은 동생 놈을 때리고 삥을 뜯는 날이 늘었다. 하루는 동생 돈을 빼앗는데 평소보다 반항이 심하길래 “이 돈 뭐에 쓰게?!”라고 물으니 동생이 머뭇머뭇하다가 “떠... 떡 사 먹을 거야!”라길래 말 같은 소리를 하라며 한 대 더 때리고 빼앗았다고 한다. 삼룡이 동생이 떡 사 먹을 돈은 그렇게 교회 헌금함으로 직행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삼룡이는 크리스마스이브를 중년 아저씨 아줌마들과 함께 보내기가 죽기 보다 싫었다. 어떻게든 여자친구를 꾀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삼룡이에겐 뱀의 혀가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녀를 꾀어내는 건 별반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그녀는 교회 커뮤니티의 평판을 두려워했단다. 크리스마스는 그 동네에서 보통 행사가 아닌데 빠진다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 삼룡이는 정공법을 택했다.

 

다짜고짜 목사님을 찾아가 쇼당을 쳤다.

 

“뫄뫄랑 사귀며 첫 크리스마스입니다. 솔직히 여느 커플들처럼 저 인파 속에 뛰어들어 즐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얼마 되진 않았어도 제 신앙심 또한 엄연히 존재합니다. 이 상충되는 괴리감에 저도 괴롭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예수님께 양해를 구하고자 크리스마스 헌금 10만 원을 미리 내고 죄책감을 덜고자 합니다.”

 

4. 방이, 없다 

 

그렇게 삼룡이와 여자친구는 목사님의 축복 속에 신촌 길바닥을 누비며 첫 크리스마스이브의 흥청망청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수많은 커플들의 좀 있으면 섹스할 거라는 득의양양한 기운이 넘실대는 카페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아트박스랑 알파문고에서 산 소꿉장난 같은 문구용품과 팬시용품을 선물이랍시고 교환하고 크리스마스용 바가지 요금표를 내놓는 닭갈비집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행사의 클라이막스인 섹스를 하기 위해 초저녁에 서둘러 모텔촌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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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2만~3만 원 하던 숙박비가 10만~15만 원인 것은 익히 각오한 터였다. 허나 방 자체가 없었다. 저녁 8시 반에, 장미여관 뒤쪽 그 많은 모텔 방이 다 찼단다. 하얏트, 이구아나, 프린스, 션샤인, 프로방스, 워싱턴, 헐리우드, 이화, 풍차, 홀인원, 테마, 굿타임이 남김없이 다 찼단다.

 

침대방부터 온돌방까지 모텔은 그야말로 미어터져 있었다. 그렇다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커플과 택시 합승하듯 합방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옷 벗고 씻는데 5분, 섹스 3분, 또 씻는데 5분, 담배 한 대 피우는데 3분, 토탈 15~20분이면 되는데 후딱 하고 나가면 안될까요?” 라며 카운터 아줌마한테 테이블 회전율을 들먹일 수도 없었다.

 

신촌 근처를 거쳐 건너편 서강대 모텔촌을 돌아 이대입구를 지나 아현동까지 걸었다. 하룻밤 70만 원의 오성급 호텔엔 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언감생심 계획에 포함조차 못했다. 애시당초 남의 세상, 남의 얘기인 것이다.

 

삼룡이와 여자친구는 서서히 지쳐갔다. 요즘 말로 현타가 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섹스를 해야 하나. 서글픔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뉴타운 지어준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서 이명박 찍어줬다가 결국 입주를 못해 변두리로 쫓겨나는 원주민 신세 같았다.

 

그냥 지하철역이나 공원 화장실로 갈까란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삼룡이는 차마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새끼였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나는 김정호마냥 오로지 육안으로 모텔을 찾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5. 현자

 

그렇게 걷다가 북아현동 고갯길 너머 골목에서 기적과도 같게 허름한 여인숙을 하나 찾았다. 사막 한복판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공동으로 쓰는 수도꼭지가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디귿자 방이 둘러져 위치해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줌마를 찾았다. 여차하면 마당에서라도 해야 했다. 이 너머는 충정로다. 숙박업소가 있을 확률이 더욱 적었다. 여기서 실패하면 합정이나 망원 쪽으로 진로를 꺾어야 한다. 여자친구의 안색이 굳은 지 오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방 있나요?”

 

“5만 원.”

 

“감사합니다!”

 

평소 같으면 5천~7천 원 정도 했을 것이다. (90년대 초였다.) 10배 장사였다. 하지만 오늘이 어떤 날인가. 홀리데이 아닌가. 예수님의 축복이 숙박업자들은 비껴가란 법이 있는가.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의 영업을 강제로 제한해야 하지만 임대료는 건드리면 안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엿장수의 권리는 불가침의 영역이니까.

 

따로 욕실이 없었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는 건 별 의미가 없었기에 그냥 다짜고짜 벗고 누웠다. 이불과 베개에서 퀘퀘한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과정이 어려울수록 성취의 열매는 달다 했던가. 삼룡이는 고생 시킨 미안함이 더해 평소보다 혼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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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헉, 거룩한 헉, 어둠에 묻힌 헉, 주의 부모 앉아 헉, 감사 헉, 기도 헉, 드 헉, 릴 어어... 어어어엌 하아... 딱히 올바른 성교육을 받은 바 없는 이 조선의 90년대 청년은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거사가 끝나자 나는, 아, 아니, 내 친구 삼룡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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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 공급 물량을 늘려야 한다. 숙박비 원가 공개도 필요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섹스할 공간을 못 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방을 못 구한 것은 노력이 부족해서다. 숙박비를 바가지 씌우는 것은 별문제 될 게 없다. 왜냐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나도 숙박업을 하게 될 테니까. 그때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아,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세상이 공정해져서 오늘처럼 맘껏 했으면 좋겠다. 

 

여인숙 창 너머로 빨간 교회 십자가의 네온이 오늘따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손바닥만한 작은 창이었는데도 빨간 십자가가 네 개나 보인다.

 

홀리쉣.

 

 

추신: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이브, 이렇게 보내다간 큰일 난다. 다들 내 사연, 아, 아니, 내 친구 삼룡이의 사연을 보고 추억만 하되 집콕하자. 교회들은 좀 쉬어주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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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면 찌른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