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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비홍이 자세를 취하자 그 주위로 검을 든 자객들이 포위한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객들이 동시에 검을 휘두르며 황비홍에게 달려든다. 황비홍은 비록 맨손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몸을 날려 공중으로 피하며 화려한 발차기로 한 번에 여러 명을 쓰러뜨린다. 나머지 무사들이 계속 검을 휘두르며 공격하지만 황비홍은 이리저리 여유 있게 피하며 주먹과 발차기로 검을 든 자객들을 모두 한 번에 물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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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비홍>

 

이연걸이 주연한 중국의 유명한 무협영화 ‘황비홍(黄飛鴻, 1991년 제작. 감독 서극)’의 한 장면을 간단하게 글로 표현해 보았다. 이렇게 무림고수가 맨손으로 무기를 든 여러 명의 자객들을 한 번에 물리치는 모습은 무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건 한 마디로 ‘뻥’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이런 류의 무협영화를 보면서 무예가의 꿈을 키웠다. 꾸준히 무예를 수련하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무술의 고수가 되면 영화 속의 고수처럼 맨손으로 여러 명의 악당들을 한 번에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무예 지도자까지 되었지만, 현실에선 맨손으로 무기를 든 여러 명의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다. 여러 명은 커녕 한 명뿐이더라도 상대방이 무기를 들면 그 사람이 아주 운동 신경이 둔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날이 시퍼런 긴 칼로 공격해 오는 상대를 맨손으로 제압하기란 녹록지 않다. 

 

평생 무예를 수련했으니 무기를 든 괴한을 만나면 맨손이라 하더라도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가며 어떻게든 싸워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무예계의 최대 비급(?)인 36계 줄행랑이 최고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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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를 사냥하려다 쪽수에 밀려 도망가는 사자.

 

평생 무예를 수련했음에도 불구하고 맨손으로 무기를 들고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쉽지 않다면 도대체 맨손 무예란 무엇이란 말인가?

 

 

맨손 무예는 아군과 겨루기 위해 발달했다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의 인간이라고 한다. 전기 구석기 시대(약 250만~20만 년 전)의 유적에서도 간단하게 떼어 만든 자갈 돌석기가 발견되고 있고, 70만 년 전에는 주먹도끼(兩面石器, Hand ax)도 발견된다. 

 

인류가 탄생한 그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했고, 생사(生死)를 건 전투에서 도구, 즉 무기를 사용해 왔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맨손무예의 절정 고수라 하더라도 전투에 참가해야 한다면 반드시 무기를 들고 나가야 한다. 적(敵)이 갑옷에다 방패를 들고 칼까지 들고 있는데 맨손으로 무찌르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뿐더러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맨손으로만 싸우는 것이 가능하려면 우선 맨손으로 겨루자는 약속을 해야 한다. 그런 약속이 없으면 생사를 건 전투에서 도구의 인간이 무기를 안 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기를 들지 않고 싸우자는 약속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규칙(Rule)이고 그런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은 맨손무예는 경기 형태라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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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투기 경기 심판이 양 선수에게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경기 형태의 맨손무예는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울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들지 말자는 일정한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계속 지켜질 수 있도록 감시하는 3자, 즉 심판(Judge)이나 관중(Spectator)이 있어야 한다. 맨손으로 싸우자고 약속을 해놓았지만 자신이 불리하면 갑자기 무기를 들고 대항하는 반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맨손무예는 그런 약속을 만들 수 있도록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주로 같은 편끼리 힘과 기량을 겨루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아주 오랜 옛날인 로마 시대에는 격투사 경기 같은 경우는 사람을 마구 때려죽이는 잔인한 맨손경기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건 같은 편끼리 힘과 기량을 겨루기 위해서라기보다 극단적 형태의 오락거리로서 존재했던 ‘경기’이다.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에서 보자면, 맨손무예는 주로 아군끼리 힘을 겨루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너무 심한 부상자가 발생하면 자기편의 전력 손실이 커서 점점 더 안전하게 규칙이 변해갈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눈을 찔러 실명케 하거나 뼈를 부러뜨려 불구를 만드는 등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는 기술들을 반칙으로 정하여 서로를 보호하면서 힘과 기량을 겨룰 수 있게 경기 규칙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맨손무예의 기본적인 발달과정이다. 

 

대표적인 예로 씨름을 들 수 있겠다. 씨름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애용되는 힘겨루기 방법이다. 치고 받는 타격기(打擊技)보다 상대를 잡아 넘기는 유술기(柔術技)가 아무래도 아군의 부상을 최소화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애용된 맨손무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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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씨름(위) / 몽골의 부흐(아래)

 

몽골(Mongolia)에는 나담(Naadam Festival)이란 축제가 있는데, 몽골 전통 씨름인 ‘부흐(Bukh)’와 말타기 경주인 ‘모리니 우랄단(Morinii Uraldaan)’, 활쏘기인 ‘소르 하르와(Sur Harvaa)’의 세 가지 경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말타기, 활쏘기와 더불어 그 시대에 가장 효과적인 전투 방법은 칼이나 창을 쓰는 것이었겠지만, 그런 무기술 경기는 아군들의 전력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군사들의 기량과 용맹함을 배양하는 방법인 씨름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비록 맨손무예는 전투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지만, 맨손무예인 ‘부흐’로 힘과 기량을 익힌 몽골의 용맹한 무사들이 말을 타고 세계를 제패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맨손무예는 기본적으로 전쟁, 내지는 전투무예가 아니라 애초에 규칙이 존재하는 경기형태, 즉 현대적 의미로 본다면 ‘격투기 스포츠’인 셈이다.  

 

 

맨손무예는 전투의 보조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항상 예외가 있듯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맨손무예도 전투를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브라질의 전통무술인 ‘카포에이라(capoeira)’나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 무인들의 ‘가라테(空手)’ 등이 그런 것이다. 

 

적국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기를 몰수당해 부득이하게 맨손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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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카포에이라(위) / 일본(시작은 오키나와)의 가라테(아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무기 소지가 금지당한 오키나와인들은 저항을 위해 맨손으로 무예를 단련했다. 그러나 맨손으로 여러 번 때리다가도 사무라이의 날카로운 검에 한 번만 베이면 끝장이므로 자신들도 한 번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주먹을 최대한 단단하게 단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정권단련이고, 그 결과 오키나와에서 시작된 가라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일격필살(一擊必殺)’이다. 

 

그렇게 강력한 주먹으로 한 방에 사무라이를 때려눕혔다고 해서 그 가라테인이 계속해서 맨주먹으로 싸우진 않을 것이다. 쓰러진 사무라이의 칼을 빼앗아 다른 사무라이와는 가라테인도 역시 빼앗은 칼을 들고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맨손무예인 가라테는 전투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무기가 없는 상태에서 무기를 빼앗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전투의 보조수단이다. 

 

이런 경우는 일본의 정통 무사 집단인 사무라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무라이들은 기본적으로 검술 수련에 집중하지만, 보조과목으로 관절기 같은 유술을 익힌다. 검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을 든 적과 겨루게 되었거나, 혹은 싸우다가 검을 떨어뜨린 경우를 대비해서다. 그럴 경우 일단 칼을 든 상대의 손목을 잡아 칼을 휘두르지 못하게 한 다음 유술로 팔을 꺾어 제압한다.  

 

복잡하게 팔을 꺾는 것보다 주먹으로 한 방 때리면 더 효과적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무라이는 두터운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타격은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튼튼한 갑옷이더라도 관절 부분은 비어있기 때문에 관절을 꺾어 제압하는 유술적인 방법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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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의 모습

 

이렇게 상대를 제압한 유술의 고수도 그다음에는 바로 상대의 검을 빼앗아 들고 다른 적과 싸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시 맨손무예인 (유도, 주짓수 같은) 유술은 전투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검이 없을 때를 대비하여 수련한 전투의 보조수단이다. 

 

중국의 많은 권법(拳法)도 역시 맨손으로 적과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기술을 익히기 위한 기본 수련으로 구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정확한 보법(步法)과 자세를 익히고 공방(攻防)의 기법을 터득하는 권법 수련을 통해 본격적으로 검이나 창 등의 무기술 수련에 들어가는 기초를 닦는 전투의 보조수단인 셈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무기술을 익히기 위한 기본 수련으로 구성된 중국의 권법을 가지고 전문적인 맨손무예의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되기 쉽다. 

 

결론적으로 맨손무예는 전투에서 적을 살상하는 최종적인 목적보다는 기본적으로 맨손으로 싸우자는 약속이 있는 경기 형태이거나 무기가 없을 때,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전투의 보조수단으로 형성된 것이다.  

 

 

맨손 무예는 미래에도 중요한 전투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맨손무예가 경기형태이거나 전투의 보조수단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나 미래에도 계속 중요한 전투수단으로 남을 것이다. 맨손무예보다 훨씬 막강한 검술이나 창술, 심지어는 활쏘기 등의 전통 무기술은 총에 밀려 더 이상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되진 않지만, 맨손무예는 현재도 아주 중요한 훈련과목이다.  

 

맨손무예는 현대전과 같이 총을 쏘고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시대에도 용감하고 강건한 군인들을 키우는 필수적인 훈련코스다. 또한 맨몸으로 겨루는 육탄전은 젊은이들의 호연지기를 키우고 건강하고 정의로운 인간으로 교육하는 중요한 덕목이며, 치열한 격투 경기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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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이 태권도처럼 발차기를 위주로 하던, 권투와 같이 주먹으로만 하던, 아니면 풀 콘택트(Full contact) 형식으로 하던, 격투기 경기를 통해서 선수들에게 강한 정신력과 투지를 배양할 수 있는 중요한 종목이 바로 맨손무예이다. 

 

 

다음 편

 

맨손무예에서 자꾸 실전(實戰), 실전을 말하는데 도대체 어떤 실전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편에서는 맨손무예의 실전에 대해서 논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