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오늘 뭐 먹지

 

멀쩡한 회사를 그만두고, 통장 잔고 탈탈 털어 떠난 나의 유학은 지인들에겐 꽤 흥밋거리였던 것 같다. 메신저로 안부를 물어오는 지인들의 질문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렇게 원하던 유학 가니까 어때?"

 

1.jpg

매일 오르내리던 언덕길, 브리스톨 파크 스트리트 (Park Street)

 

나는 유학 생활의 대부분을 한적한 도시에 위치한 학교와 기숙사, 그리고 마트로 이루어진 도보 15분 거리 내에서 보냈다. 영국에 와서 고민거리는 단 두 가지였다.

 

‘오늘 뭐 해 먹지'

'숙제 언제 다 하지'.

 

사람이 삼시 세끼를 해 먹는다는 것이 이토록 귀찮은 일인지 몰랐다. 한때 직장 생활의 낙이 부장님들을 따라다니며 종로와 을지로의 맛집들을 누비는 것이었는데, 영국 식당의 가성비는 극악무도했다. 나는 생존을 위해 온갖 유튜브 요리 채널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빌려 집밥 백 선생님께 감사를 올린다. 당신은 비루한 유학생 식탁의 구원이셨어요. 그리고 비비고. 비비고 즉석식품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해외 교포와 유학생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있다.

 

10명이 함께 쓰는 기숙사에 살았던 나는 기껏해야 주방 냉장고의 1/5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쟁여놓는 것은 독채를 쓰는 부자 유학생들이나 누리는 사치다. 매일 마트에 들러 그날 먹을거리를 공수해야 했다. 부모님의 밑반찬들로 차곡차곡 들어찬 고국의 냉장고가 아른거렸다. 인근 마트를 돌며 어디 계란이 더 싼지, 휴지 묶음 세일은 안 하는지를 기웃거리는 것이 매일 저녁의 일과였다.

 

그렇게 원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앞날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미뤄두고 지냈다. 그저 매주 쏟아지는 숙제와 월 생활비에 맞춰 주린 배를 채우는 것에 시간을 썼다. 유학생의 일상은 단순했다. 공부와 먹는 것 단 두 가지만 고민하면 됐다. 영어 에세이 한 편 쓰는데 하루 종일 걸리던 시간이 반나절에서 몇 시간으로 조금씩 줄어들었고, 직장 생활 3년 동안 쌓였던 10kg의 부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단순함의 묘미

 

단순한 일상은 행복하고 충만했다. 직장 생활을 경험하기 전에 유학을 왔더라면, 이런 단순한 삶은 지루했을지도 모른다. 쌓여가는 업무와 카드값, 재테크, 가족 행사, 사내 정치, 인맥 관리, 자기 계발 등에 짓눌려있던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 소박하지만 온전히 나의 하루를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삶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2.jpg

학교-샌드위치 가게-도서관-마트-집, 온종일 1km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삶

 

돈을 벌기 위해 나를 소비하는 하루가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 나를 담금질하는 하루는 ‘생산적’ 그 자체였다. 반경 몇 km의 세상에서, 두 자릿수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학교에서 시키는 공부만 하면 되다니.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 삶이란 말인가! 이래서 어른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지금이 좋은 시절이다.’라고 주야장천 이야기를 했나 보다.

 

물론 마음이 나약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시간을 얻기 위해 대가로 내던지 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지금 듣고 있는 수업의 학비가 지난 3년간 열심히 모았던 결혼자금이라는 생각이 들면, 수업 시간에 졸다가도 눈이 번쩍 뜨였다. 피 같은 내 돈… 대학생 때 부모님 돈으로 다녔던 토익 학원은 데이트하러 땡땡이도 치곤했었는데… 죄송합니다, 어머니…

 

'각'을 풀고

 

첫 학기, 단과대학 300명 학생이 함께 듣는 대형 강의장에 나타난 교수님은 코 피어싱을 하고 강단에 올랐다. 기분 좀 내봐야 캐주얼 정장을 벗어나지 않던 학부 시절 은사님들을 떠올리자니 무척 생경한 풍경이었다. 음… 역시 양놈들이 다르긴 다르구나.

 

일 년을 타지에서 살아보니 이 같은 낯선 순간들이 종종 찾아왔다. 아직도 공공기관 행정업무를 우편으로만 접수해야 할 때. 이혼한 부모님과 그들의 파트너, 그리고 의붓형제들이 함께 모인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되었을 때. 유명 가수 콘서트 키스타임에서 좌우 앞뒤 게이, 레즈비언, 국제 커플, 노부부 등 다양한 커플에 둘러싸여 왜인지 모를 쓸쓸함이 밀려올 때.

 

영국은 문신이 있어도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 코를 뚫어도 좋은 교수님이 될 수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헐벗고 운동할 수 있었다. 뚱뚱하건 등에 여드름이 많던 무상관. 부모님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되고, 선생님은 제자를 잘 가르치면 되며, 운동할 때는 내 몸이 편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이들에겐.

 

유학을 온 나의 생활이 금세 단순해졌듯, 이들의 삶 또한 한국의 그것들보다 좀 더 단순하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단순한 영국의 삶을 살다 보니 한국의 삶이 얼마나 각 잡혀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사회적 이상향에 대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 이미지,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시뮬라크르에 가려 본질을 잊고 살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음식을 먹지 않고 ‘인스타각’ 나오는 멋진 장소를 가지 않아도,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며 보내는 시간이 충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산복과 등산화 없이도 산에 오르고, 대단한 러닝화와 스포츠 웨어 없이 운동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스스로가 남들의 시선에 초연해지고, 단순한 삶을 추구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담백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댑터같은 유학생활

 

대학원 동료 중에서는 학부 졸업 후 대학원을 온 20대 학생도 있었지만 나처럼 경력을 중단하고 떠나온 유학생도 꽤 있었다. 그들에게는 좀 더 절실한 구석이 있었다. 회사 다닐 때와 비교하면 너무도 자유롭고, 늘 꿈꾸던 삶인데 감히 어떻게 불평불만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다짐들이 스스로를 다독이는 자발적 파이팅이라 생각했지만,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배려와 응원으로 떠나온 유학에 대한 압박이기도 했다. 더욱이 직장을 그만둔 큰 기회비용을 치르고 택한 선택이다. 떠나간 것에 미련이 없어야 하지만, 어찌 사람 마음이 그럴 수 있겠는가. 가지 않은 길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자꾸만 기웃거리며 몸과 마음을 헛되이 소비하게 되기 마련이다. 불타는 금요일 저녁이면 SNS에 지인들이 올리는 안주와 소주 사진을 멍하니 확대해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반질반질 윤기도는 참치뱃살, 지글지글 대는 곱창구이, 들깨가루와 깻잎이 산더미처럼 쌓여 보글보글 끓는 감자탕 냄비 너머로 친구들이 사이좋게 모여 사진을 찍어올린다. 나만 빼고. 어딘가 쓸쓸하고 허기가 졌다.

 

3.jpg

유학생 금지곡 –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조용필 12집, 1990)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걸 알았지

눈에 익은 이 자리 편히 쉴 수 있는 곳

많은 것을 찾아서 멀리만 떠났지

난 어디 서 있었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별을 안고 싶어

소중한 건 모두 잊고 산 건 아니었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그대 그늘에서 지친 마음 아물게 해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혹시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후에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면, 이역만리에 가서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는 절대 듣지 마시라. 유학생 금지곡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첫마디부터 구구절절 명치를 연타로 때린다. 용필이 형이 내가 영국 가서 삽질할 걸 어떻게 미리 알고 가사를 이렇게 썼을까. 노래를 듣다보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이렇게 욕심을 부렸나 싶다. 야밤에 괜스레 소주가 당긴다. 영국에서 비싸서 마실 수도 없는 참이슬이.

 

도서관에서 노트북 충전기를 꽂다가 문득, 한번에 들어가지 않고 구멍을 겉도는 어댑터가 유학 생활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나가서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겠지만, 외국의 어댑터는 묘하게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생각보다 불편하다. 살짝 밀었다가 뺐다가 하며 어렵게 맞춰 놓은 어댑터를 지나가는 사람이 툭 건들고 지나가면 여지없이 전원이 꺼진다. 그때만큼 딥빡의 순간도 없다.

 

220V의 한국인이 240V의 영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댑터가 필요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영어 커뮤니케이션부터 외국인으로서 닿지 않는 기회까지, 해외 생활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불편했다.

 

파랑새는 있다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파랑새’라는 희곡을 기억하시는지. 한 남매가 요술쟁이 할머니의 부탁으로 파랑새를 찾아 멀리 여행길을 고생고생하고 돌아왔더니, 정작 파랑새는 집 문 앞에 있었더라는 그 아동학대 동화.

 

직장인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파랑새 증후군 (Bluebird syndrome)이라는 말에 유래가 되며,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하는 이야기로 흔히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원작이 전하고자 이야기는 집 앞에 파랑새가 있었다는 결론이 아니었다. 남매가 환상의 여정 속에서 추억과 숲, 밤의 파랑새를 만났지만 닿을 수 없어 좌절하는 과정이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담은 것이다.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영국은 참 다사다난했다. 브렉시트, BLM 시위, 코로나19 락다운까지 굵직한 사건들을 눈으로 피부로 경험했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해외단신뉴스 한 줄로 스쳐갔을 것들이 내 삶의 한 문단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 덕분에 감히 딴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드릴 기회도 생겼다.

 

이직이 되었든, 유학이 되었든, 창업이 되었든 익숙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이상을 찾아 떠나는 모든 동지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찾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것 분명 어디에도 있다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자의 파랑새를 찾아 나서는 용기가 아닐까 한다. 그것이 혹 무모할지라도.

 

그 여정의 우여곡절은 각자 다르겠지만, 살아있다는 느낌만은 분명 당신을 지지해 줄 것이다. 내가 발견한 나의 파랑새는 그것이었다.

 

30대의 유학

 

20대에 학부 졸업하자마자, 바로 유학길에 올랐다면 나는 어땠을까. 타고나기를 욕심이 많아 무언가를 채우느라 정신없었을 것 같다. 공부든, 사람이든, 여행이든 하나라도 더 담아오려는 데에 골몰했겠지.

 

30대 유학은 조금 달랐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짐은 3단 이민 가방을 2단으로 줄여도 될 만큼 줄어 있었다. 30대 유학은 채워 넣는 것보다 비워내고 가는 것이 더 많았다. 간당간당해진 통장 잔액에 기념품 같은 걸 많이 챙길 여유가 없던 것도 있었지만. 달콤했던, 하지만 불안했던 직장 생활의 긴장을 덜어내고, 단순하고 슴슴한 삶의 맛을 배우고 나는 다시, 여기 한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서의 유학이 내 삶에 얼마만큼의 실익으로 돌아올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앞으로 나아갈 어느 지점에서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줄 수도 있고, 이 글의 제목처럼 어쩐지 정말 X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무뎌진 내 영혼과 펜대를 날카롭게 해준 그 소중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고 싶다. 정말로. 아직은.

 

<계속>



Profile
퇴사 후 떠난 영국에서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