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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목요일


필독


 


 


 


 


 



 


 





0


 



세리에A의 경기는 이중적이다. 이탈리아인들은 가장 거칠면서도 가장 수비적인 축구를 한다. 경기 자체는 전혀 역동적이지 않은데 선수들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상대를 밀어붙이고, 싸우고, 피를 본다. 이탈리아 축구를 보았을 때 떠오르는 단어들은 많다. 근성, 투지, 정열, 끈기, 증오. 그리고 노골적인 틀어막기와 비겁한 플레이. 신기하게도 이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한데 만나 묘한 매력을 완성한다. 자비와 정정당당함 따위는 한 푼어치도 없어 뵈는 미남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엔 변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승부를 보는 이탈리아인들의 관점은 단순하고 극단적이다. - 과정이야 어찌됐든 ‘이기면 된다.’





 


 


1



 


우리는 국사를 직선적인 연대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국에 중앙집권의 역사가 길고 또 한반도에는 대체로 단일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체제는 체제의 흥망과 변화만 주목하면 파악이 가능하다. 체제가 바뀌면 말을 갈아타면 그만이다. 고려로 쭉 이어지다가 이성계부터는 조선시대다. 단순명쾌하지 않은가.


 



한국처럼, 역사가 기록되어온 시간에 비해 국사 배우기가 편리한 나라는 드물다. 중국과 일본만 봐도 국사 가르치기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오호십육국(다섯 오랑캐국가 + 16개 국가. 이는 단지 표현일 뿐, 실제로 한족 외의 이민족은 다섯 이상이었고, 국가의 수 역시 16개가 넘었다.) 시대만 해도 한국사 전체보다 몇 배 힘들다. 국가별 왕조와 국내외 상황, 각각의 전쟁사, 외교사, 교류사와 그 결과까지 이해해 커다란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동아시아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삼국지에서 다루는 시대는 60년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족과 이민족이 그리고 한족끼리 투쟁해온 삼천년 역사의 방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의 경우는 그래도 인류문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사의 복잡함이 비례를 이룬다. 역사 대부분을 봉건시대로 보낸 일본의 경우는 각 영주가 다스리는 영토가 나라(國)로 불리며 독립되어 있었다. 자연히 열도 내에 있었던 나라와 세력의 수만큼 역사가 병렬 배치되어 있다. <열도 내의 세계사>라고 생각하면 된다.


 



국사 배우기 어렵기로 따지면, 유럽에서는 이탈리아를 능가할 나라가 없다. 로마제국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로마의 역사도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지만, 정작 문제는 제국 붕괴 이후다.


 



로마를 무너트린 세력이 동고트족(오스트로고트 : 게르만족의 일파)이라고는 하지만, 로마(서로마) 멸망이 동고트족의 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로마는 내부모순에 의해 자체 붕괴했다. 동고트족은 역시 다른 게르만족 일파인 반달족등에 밀려 서진(西進)하고 있었다. 한편 게르만족 전체가 흉노족에 쫓겨 서진중이었다. 이것이 로마 붕괴시점과 타이밍이 맞았던 것이다.


 


사실 고트족은 이전에도 로마시내를 점령한 적이 있었다. 국방에 애를 먹던 로마는 서고트족(원래 고트족은 하나였지만 나중에 서고트-동고트로 분화함) 남자들을 통째로 용병으로 고용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렸다. 그리고서는 약속했던 땅과 식량, 급여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핏값을 체불 당하자 서고트족 왕 알라리크는 뚜껑이 열렸다. 서고트족은 지상최고의 도시 로마를 함락해버렸다.


 



로마 함락을 묘사한 그림


 


그런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다. 고트족은 도시란 걸 어떻게 운영하는지 몰랐다. 상수도를 흐르던 물은 한 달이 넘자 죄다 썩어버렸고 고트족들은 심신이 지쳐버렸다. 청량한 노천을 그리워하게 된 서고트족은 별다른 소득 없이 로마를 떠나 이후 현재의 스페인으로 옮겨간다. 현재 스페인의 왕가와 전통 귀족가문은 이들 서고트족이 그 뿌리다. 서고트족을 뒤따라 서진해 이탈리아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세력이 동고트족이다.



 



서고트족의 이동경로


 


이렇듯 고트족은 서로마문명의 잔해를 적당히 주워 담을만한 세련된 문화수준을 갖지 못한데다가, 군사력도 이탈리아반도의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정도가 못됐다. 한마디로 이후 이탈리아의 정세는 개판이 된다.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이 이탈리아를 한 번 삼켰다가(재정복이라고도 하는데, 동로마의 입장에서는 본토수복이었다.) 물러나기도 했고 서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쉽게 말하면 게르만 무장 세력이 로마를 계승한답시고 만들어낸 가상의 제국. 프랑스와 독일 및 그 주변국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군주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허울뿐인 영예를 누렸다.)이 역시 ‘본토수복’이라는 구실로 이탈리아를 노렸다.



 


여기에 아랍세계가 이탈리아 공략에 가세했다. 이는 당시 신흥종교로, 강력히 발흥하고 있던 이슬람의 팽창주의와 연관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섬과 해변은 지중해에 들끓는 해적들의 약탈 루트이자 아지트가 되었다. 폭력적인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탈리아는 중세를 맞게 된다. 결국 이탈리아엔 십수 개의 도시국가가 들어차게 된다.



 



1494년 이탈리아 반도의 판도


 


이렇게 보면 중세의 이탈리아에 사는 게 무척 괴로울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단 로마문명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게다가 반도면서 동쪽과 가깝다. 중세시기 세계문명의 표준이랄 수 있는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 해운을 통해 문명과 문명이 충돌되어 영리한 2차문명이 발생한다. 따라서 이탈리아인들의 생존법은 매우 선진적인 동시에 지나치리만큼 영악해진다. 그 생존법이란 간단이 말해 무엇인가.



 


그것은 안정적으로 먹고 사는 것. 그리고 ‘이윤’이다.



 


이는 고도의 집단이기주의로 발전한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는 도시국가이기도 하지만 은행이기도 하고 유럽 전체에 지점을 둔 현대적 의미의 다국적 기업이기도 했으며 해적집단이기도 했다. 베네치아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다른 도시국가도 마찬가지다.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들 간의 유대감 따위는 없다. 플로렌스 공화국(공화국이었지만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의 입김이 가장 셌다.), 밀라노 공국, 사보이 공국, 제네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 나폴리 왕국 - 모두가 모두의 경쟁자였다.



 


1000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이탈리아는 피도 눈물도 없는 투기장이었다. 도시국가들은 서로의 이익에 따라 필요에 따라 배신하고 연합했다. 빈틈을 보인 도시나 국가는 국물도 없이 빨렸다. 시오노 나나미의 <베네치아 사람들> 연작을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한 도시국가의 수백 년 역사가 얼마나 풍부한지를. 이 국가들이 얽히고설킨 천년의 역사는 단일왕조사에 익숙한 우리에겐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마키아벨리의 냉혹한 정치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 프랑스 왕실로 시집가 왕비가 된 까뜨린(까뜨린 드 메디치)은 처음 프랑스인들 눈에는 사자무리에 던져진 사슴처럼 보였다. 부유한 상인가문의 딸이 왕실을 어떻게 해 보려는 거친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처지가 되었으니. 그러나 앙드레 모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는 “프랑스 궁정에 음모와 모함, 독살을 가져왔다.” 까뜨린은 몇 년 만에 굵직한 정적들을 ‘의문사’로 깨끗이 정리했다.



까뜨린 드 메디치의 초상화. 이 초상화는 화가가 무진장 노력한 결과물이다. 굉장한 추녀였다고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는 위와 같은 에누리 없는 환경에서 형성된 중-근세 이탈리아인들의 성향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인본주의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방식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이탈리아인들의 풍부한 기술과 상업으로 쌓은 재력이 가세해 역사적인 문화현상으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중-근세 이탈리아인들의 성격을 정리해보자. 우리 편은 옳다. 우리의 이익이 나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대신 ‘조폭의 의리’는 확실하다. ‘우리’끼리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공화제 도시국가가 괜히 많은 게 아니다.). 성스러운 전쟁, 비열한 전쟁은 없다. 이기는 전쟁이 옳은 전쟁이다. 우리 편과 남의 편의 구분을 확실히 해야 한다. 우리 편은 진리이며 남의 편은 때로는 도구이자 때로는 적이다.



 


이는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사고방식에도 유전자처럼 남아있다. - 경쟁이란, 이기기 위해서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하는 것이다. 이제 세리에A의 팀들과 이탈리아대표팀이 그려내는 풍경을 떠올려보라.




 


 


2



 


역사란 아이러니다. 르네상스는 유럽의 봉건주의 붕괴를 촉발시켰고 유럽의 나라들은 근대적 민족국가로 이행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늦게 근대민족국가가 되었다. 이탈리아가 사보이 왕가의 지배 아래 통일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갑작스런 민족주의 열풍은 안 좋은 결과를 낳았다. 사람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기 힘든 법이다. 이탈리아는 통일된 지 백 년도 안 되어 파시즘의 발생국이 되었고 2차 대전에서 패전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역사는 퇴적물이기도 하다. 누적된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 기독교의 기저에 무속적 기복신앙이 깔려있는 것처럼, ‘민족국가’ 이탈리아도 기저에는 도시 단위의 집단주의가 들끓고 있다. 축구에 있어서 국내리그가 성장할 수 있는 제1의 배경은 바로 지역감정이다. 세계 3대 리그를 보면 알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의 잉글랜드, 라 리가의 스페인, 세리에A의 이탈리아. 그런데 지역감정의 형태가 국가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잉글랜드의 지역감정은 전통적인 마을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의 경우 계층에 따른 거주구역으로 나뉜다. 그러다보니 거리가 가까울수록 앙숙이 많다. 스페인의 경우 종족 단위로 되어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카스티야족의, FC 바르셀로나는 카탈루냐족의 팀이다. 이천수가 잠깐 뛰었던 레알 소시에다드는 바스크족의 팀이다. 이탈리아의 지역감정은 도시의 단위로 갈린다. 이는 도시국가의 지리적 역사와 거의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한때 독립국, 독립도시였던 곳이 지금 세리에A 팀들의 연고지다.



 





2009-10 시즌 세리에A 클럽팀 지도. 위의 1494년 지도와 비교해보라.


 


세리에A는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도시들이 백오십년의 세월을 넘어 연장전을 벌이는 대리전쟁터이다. 따라서 세리에A의 스타일도 중-근세 이탈리아인들의 경쟁방식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세리에A의 팬과 선수들은 우리가 한일전을 대하는 것 이상의 증오와 복수심으로 무장한 채 경기장에 들어선다.



 


당연히 중요한 것은 경기 자체가 아니라 승부의 결과다. 1:0으로 이기나 3:0으로 이기나 이긴 건 이긴 거다. 오히려 적은 점수 차로 이겼으니 더 실용적이다. 화려한 플레이는 사치다. 이탈리아인들이 재미없는 수비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기 이왕 이길 거면 인색하게 이기는 편이 더 기분 좋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이기면 상대편도 더욱 열이 받을 것이므로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탈리아 대표팀의 ‘영원한 주장’ 파울로 말디니는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축구는 0:0 무승부, 혹은 상대의 실책으로 인한 1:0 승리다.”


 



파울로 말디니


 



이탈리아 축구에서는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지 않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 서로 복작복작 붙어있는 도시국가에서 본진이 털리는 것은 곧 멸망을 뜻한다. 꼭 역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승부에 대한 집착이 어느 선을 넘게 되면, 이겼을 때의 쾌감보다 졌을 때의 절망감이 더 커지게 된다. 이탈리아 축구가 그렇다.



 


<이기면 장땡>이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비겨야 한다.>는 마음. 이것이 '카테나치오'의 심리적 배경이다.




 


 


3



 


악명높은 수비전법 카테나치오는 이탈리아어로 ‘빗장’을 뜻한다. 그런데 정작 카테나치오를 고안한 사람은 이탈리아인이 아니다. 카테나치오가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엘레니오 에레라’라는 인물이 인테르 밀란의 감독이 되면서부터다. 에레라의 국적은 프랑스였는데, 그렇다고 프랑스인이라고 부르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엘레니오 에레라


 



엘레니오의 아버지 페드로 에레라는 스페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였다. 페드로는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혀 조국에서 추방당해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다. 엘레니오는 19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엘레니오는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이주했는데, 여기서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그러니 사실은 무국적자나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철학과 기질은 그에게도 유전된 모양이다. 엘레니오는 현역선수시절 무려 열 개의 팀을 떠돌았다.


 



은퇴 후 감독이 되어서는 16년 간 아홉 개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클럽 팀을 옮겨 다니다가 1960년 마침내 인테르 밀란에 정착했다. 엘레니오는 현역시절 수비수였고 감독이 되어서도 수비축구에 집요하게 집착했다. 그는 팀을 옮길 때마다 수비 포메이션을 바꿔가며 실험을 거듭했다. 아마 가장 완벽한 수비 포메이션을 찾아내고자 하는 학구적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인테르 밀란에서 화룡정점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 점은 무엇일까. 바로 ‘스위퍼’ 혹은 ‘리베로’다.


 



엘레니오는 수비수들의 숫자와 위치만으로는 완벽봉쇄라는 그의 모토에 2%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 한 명의 키 플레이어다. 이 선수를 스위퍼, 리베로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 4-3-3 포메이션으로 선수를 깔아놓는다. 하지만 중원의 셋 중 둘은 언제든 수비에 가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 6-1-3 포메이션이 된다. 그런데 중원을 이렇게 텅 비워놓을 수는 없으므로, 전방의 셋 중 둘이 뒤로 물러나 전체적으로는 6-3-1이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까지는 극도로 수비적인 경기방식일 뿐 카테나치오가 아니다.


 



카테나치오는 스위퍼(리베로)에 의해 완성된다. 스위퍼는 수비라인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상대 공격수의 동태를 파악한다. 상대 공격수가 1차 수비벽을 돌파하면, 그의 위치와 루트를 추적하고 있던 스위퍼가 나타나 상대 선수나 공을 말 그대로 ‘스윕(sweep)’, 즉 치워버리는 것이다(스위퍼는 청소부라는 뜻.). 말하자면, 스위퍼 한 명을 이용해 가상의 2차 수비라인을 만드는 전술이다.


 



축구에서 스위퍼와 리베로는 원래 동의어였다. 지금도 거의 동의어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둘의 미묘한 차이를 골라내기 위해 굳이 구분해보기로 하자. 리베로는 이탈리아어로 ‘자유’를 뜻한다. 말 그대로 자유로운 포지션이니까. 그런데 왜 이탈리아가 아닌 독일을 ‘리베로의 고향’이라고 하며, 베켄바워를 원조 리베로라고 하는 걸까. 그건 역시 이탈리아 축구의 속성 때문이다.


 



독일은 70년대 들어 카테나치오를 모방했다. 아무래도 이탈리아식 수비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개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필요와 때마침 나타난 베켄바워라는 선수의 재능이 만나 스위퍼가 리베로로 진화하게 된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보통 스위퍼가 공격에도 참여할 때 리베로라고 부른다. 리베로는 ‘공격형 수비수’이다. 수비의 최종 단계이자 공격의 시발점이다. 만약 어떤 선수가 리베로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수만 있다면 그는 굉장한 전력이 된다. 당연히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뛰어난 시야와 대담성, 공격과 수비의 타이밍을 잡아내는 절묘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을 만나 2:3으로 분패했을 때 홍명보의 존재는 독일 축구 관계자들에게 일종의 충격이었다. 시합이 끝나고 마테우스는 말했다.


 



“아시아에 저런 선수가 있었단 말인가.”


 



바꿔 말하면, 아시아에도 리베로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얘기다. 덧붙이자면 이 시합에서 홍명보는 ‘베켄바워의 후계자’, ‘2대 리베로’인 마테우스를 눈앞에 세워두고 골을 터뜨렸다.


 



독일과 달리 이탈리아의 센터백에겐 우리 집 문에 ‘빗장을 거는’ 일이 전적으로 중요하다. 상대에 골을 내줬을 때 이탈리아 선수들과 팬들이 느끼는 모욕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위치이동이 자유롭다고 해서 공격에 참여하는 건 사치다. 자유는 더 완벽한 수비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리베로'가 이탈리아적이지 않은 이유다.


 


 




4


 



인테르 밀란 로고


 



카테나치오를 장착한 인테르 밀란은 수많은 1:0 승리를 거두며 세리에A를 평정했다. 재미없는 축구를 하면 욕을 먹어야 정상인데 이탈리아인들은 엘레니오 에레라의 축구에 열광했다. 카테나치오는 즉시 다른 팀들에게 모방되기 시작해 세리에A의 기본 전술이 되었다.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이식된 것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기질도 카테나치오 보급에 한 몫 했다. 상대선수를 엿 먹이는 지능적인 반칙과 절묘하게 '반칙을 당하는' 술수는 이탈리아 선수들의 장기다. 카테나치오는 공격의 동선을 끊기 위해 머릿수와 기술뿐 아니라 반칙도 얼마든지 활용한다.


 



그렇다면 공격하는 측도 머리를 쓰게 된다. 수비벽을 뚫기 힘들다면 페널티킥과 프리킥을 얻으면 된다. 자연히 맞지 않았는데도 장렬히 넘어지는 헐리웃 액션이 발전하게 된다. 프리킥, 코너킥 상황에서 이탈리아 대표만큼 강력한 팀은 없다. 정상적인 공격에 의한 득점이 힘든 만큼 특수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야 하는 세리에A의 환경에서 단련된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우리 대표팀도 코너킥에 이은 헤딩골로 한 점을 내줬다.


 



카테나치오는 전술적으로도 무척 비겁하지만 심리적으로도 고약한 수법이다. 수비로 일관한다. 상대는 공격이 좌절될수록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시합이 풀리지 않으니 답답하고 짜증이 난다. 그러다보면 수비에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카테나치오 포메이션은 역습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 이 빈틈을 놓치지 않고 역습해 잽싸게 득점한다. 상대의 실책에 의한 골이거나 헐리웃 액션으로 따낸 패널티킥 득점이라면 금상첨화다.


 



상대팀은 열이 받는다. 더 열 받으라고 모욕하고 조롱한다. 세리아A 경기를 보면 수비수들이 상대 공격수에 찰싹 달라붙어서 무어라 중얼거리는 장면이 자주 눈에 띈다. 100% 욕설이라고 보면 된다. 상대 선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거친 행동을 하면 바로 드러눕는다. 물론 심판이 안 볼 때는 이쪽에서 때린다. 상대팀은 분노할 뿐만 아니라 한 점을 만회해야 하므로 더 열심히 공격하게 되고, 더 많이 빈틈을 노출하게 된다. 그럼 다시 역습한다.


 



2006 월드컵 결승전, 이탈리아의 마테라치는 프랑스의 지단을 쫓아다닌 끝에 그에게 맞는 데 성공했다. 퇴장 당한 지단은 나중에 마테라치가 자신의 누이와 어머니에 관한 욕설을 했다고 말했는데, 욕설의 구체적 내용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음란했던 걸까.


 



그렇게 이기면 좋으냐고 묻는다면 이탈리아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응.”


 



상대에게 분통터지는 패배를 안기는 것. 이탈리아 축구에선 이것이 진정 통쾌한 승리다. 반대로 적에게 맛본 굴욕은 벼르고 별러서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조추첨을 앞두고 이탈리아 대표팀 관계자들은 ‘만나고 싶은 팀’으로 한국과 북한, 가나, 덴마크를 꼽았다. 모두 국제대회에서 이탈리아에 승리했던 팀들이다. 쓴 맛을 봤는데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히려 만나고 싶어한다. 복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5


 



모두들 이탈리아축구는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세계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세리에A에 열광하고 이탈리아 대표팀을 사랑하는 걸까. 그것은 축구가 본질적으로 싸움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기고 싶은 열망과 패배에 대한 공포가 세리에A만큼 생생하게 드러나는 싸움판은 드물다. 22명의 수컷들이 몸과 몸을 부딪혀가며 으르렁댄다. 이 진흙탕은 너무 솔직한 나머지 순수하기까지 하다.


 



 






페어플레이와 평화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리에A는 현대축구의 오염원(原)이다. 그러나 나는 이탈리아 축구가 정화(淨化)되길 바라지 않는다. 필드를 적시는 그 탐미적인 폭력이 사라진다면, 무척 아쉬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