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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나 시계를 등급별로 분류해서 나눠놓은 표가 인터넷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서고연포카서성한중경외시로 줄줄 이어지는 익숙한 대학 이름이나 파텍 필립부터 시작해 바쉐른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등 낯선 브랜드 이름만 줄줄 이어지다가 한참 밑으로 가야 IWC나 오메가 같은 그나마 익숙한 이름의 고급 시계 브랜드들이 나오는 시계 등급표를 보다 보면 이 표는 뭘 의미하는지 이런 걸 왜 만들었는지 잘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야구 잠바에 대학교 이름을 새겨놓는 걸로도 부족해서 고등학교 이름까지 새겨서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대체 이런 건 누가 왜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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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등급 분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청년세대(특히 남성)가 그런 분류 문화를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다. 청년세대-특히 남성-들은 왜 이렇게 등급에 민감해졌으며 사회가 정해놓은 등급 분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기가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온라인 게임의 세계관이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본다.

 

문화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서는 사회나 국가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만이 아닌 코카콜라와 팝, 헐리웃으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 컬처의 힘 덕분이다. 원나라의 몽골족이나 청나라의 만주족이 결국 대륙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건 그들의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하고 오히려 한족의 문화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를 접한다는 것, 즐긴다는 것은 그 문화가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마블의 영화를 즐기다 보면 마블과 헐리웃의 세계관에 익숙해지게 되고, 방탄소년단의 팬이 되면 케이팝 아이돌의 세계관에 익숙해지게 된다. 세계관에 익숙해지게 되면 사고방식이 그 세계관에 영향을 받게 된다.

 

주변에서 혹은 매체를 통해 내가 만나게 되는 지금의 청년세대 들이 가장 가깝게 느끼는 문화는 게임이다. 변방의 문화로 시작한 게임은 산업의 규모로 보나 소비 인구로 보나 완전히 주류의 문화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우디르급 태세전환’이나 ‘신박하다’ 같은 게임을 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하고 있다.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게임 내에서의 문화를 세계관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다.

 

모든 창작물이 그렇듯이 게임도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 MMORPG라는 장르의 게임은 다른 장르의 게임에 비해 큰 영향력을 미친다. 다른 게임도 그렇지만 MMORPG는 가상체험이라는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게임 안에 또 다른 인간 사회가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안에서 수없이 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 안에 화폐가 있고, 인간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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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험을 통해 게이머는 그 게임 안에 통용되는 질서를 일부 내면화하게 되며 이렇게 내면화된 사고방식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 세계의 사고방식에도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청년세대라 불리는 90년 대생들의 사고방식은, MMORPG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선 90년생들의 특징 혹은 시대정신을 ‘공정’이라고 했지만, 그 공정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정과 달리 MMORPG의 영향을 받은 공정이다. 물론 모든 90년 대생들이 다 이렇다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른 세대보다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는 의미다.

 

이런 90년 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meritocracy)에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 능력에 따라 대접을 다르게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공정한 일이다.

2.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공정’한 절차 (우리나라의 경우 시험 성적)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3.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아도 과분하지 않으며, 능력이 모자란 사람은 가혹한 대접을 받아도 괜찮다.

 

능력에 따라 평가받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일견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들의 주장은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능력에 대한 평가가 수많은 외부요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환경과 조건이 능력과 평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다.

 

어렸을 때 미국에서 3~4년 동안 살다가 돌아온 사람과 한국에서만 쭉 자란 아이가 같은 영어 시험을 보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은 공정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살다 온 아이는 교육의 기회라는 측면에서 차원이 다른 혜택을 봤기 때문이다. 또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공부할 시간도 없이 아르바이트를해야 했던 아이와 넉넉한 환경에서 필요한 사교육을 충분히 받으며 공부한 아이가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 또한 공정하지 않다. 3루에서 태어난 아이와 타석에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아이가 같은 기준으로 결과에 따라 능력을 평가받는 것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차이는 깡그리 무시하고 시험 성적에 따라 평가하기만 하면 공정하다고 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공정은 MMORPG에서 통용되는 질서와 유사하다.

 

1. MMORPG 내에서 레벨에 따라 능력과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만큼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높은 레벨 캐릭터가 낮은 레벨의 캐릭터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높은 레벨을 획득하기 위해 들인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부정한 방법(일종의 해킹이나 치팅)을 통해 레벨을 올리는 행위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행위이며, 규탄받아 마땅하다.

 

3. 하지만 현질(현금을 통해 능력치를 올리거나 좋은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레벨이나 능력치를 올리는 것은 룰의 일부이며 공정한 일이다.

 

4. 세상에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없으며, 이타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겉으로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는 위선자들이다. mmorpg는 즐기기 위한 가상공간으로 현실과는 달리 이타적인 행위가 의미가 없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이 존재하기 어렵다. 현실은 mmorpg와는 다르며,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mmorpg 세계관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런 사람들은 역겨운 위선자에 불과하다. 조국이나 윤미향의 예에서 보듯이 누군가가 위선자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면 이들은 분노하는 척 기뻐하며 호응한다. ‘어차피 저 새끼도 똑같아’라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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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른 섭(서버)이나 게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자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선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자신에게 벌어질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가 처한 현실에 무관심하다. 오로지 자신의 현실에만 관심을 가진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는 생각은 최순실의 딸만 가진 생각은 아닐 것이다.

 

6. 누군가(주로 언론) 판을 깔아주지 않으면 분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공정을 부르짖던 청년세대가 조국의 딸과 나경원의 아들 입시 부정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달랐다. (부산에서 태어났다던 아들의 출생과 관련된 소견서를 왜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발행한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임회사가 정해준 룰에 따라 운영자의 운영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다. 해도 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하면 안 되는 것의 구별을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의 판단에 맡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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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동아일보 사주인 김재호 씨의 딸이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 DNA를 찾습니다> 라는 신입사원 공고를 통해 동아일보 사주의 딸이 기자로 입사한 것은 그 DNA가 진짜 DNA였냐? 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으레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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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에 MMORPG 세대가 주장하는 공정의 모든 특징이 드러나 있다. 여태까지 언론에서 부르짖은 혹은 그들이 주장한 공정이라는 개념에 따르면 이것은 비판받아 마땅하거나 최소한 철저히 검증을 받아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조국 장관의 딸 경우와는 달리 별다른 저항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나경원의 아들 김현조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언론에서 조국 장관의 딸을 취재하듯 철저히 취재해야 하는 게 공정한 거라고 주장하고 촛불집회를 했어야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조용히 넘어갔다. 이게 공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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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청년세대’가 주장한 공정은 결국 언론에 의해 조장되고 부풀려진 청년세대의 배 아픔에 불과하다. 실제로 조국 장관의 경우를 제외하고 공정이란 말이 의제로 부각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최근에 마이클 샌델 교수가 쓴 ‘공정이라는 착각’이라는 책이 나오기 전까지, ‘공정’은 씹다 버린 껌처럼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능력주의는 얼핏 보면 공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얼핏 보면’이라는 특징 때문에 능력주의는 다른 것들보다도 훨씬 해로울 수 있다. 능력이 진짜 그 사람의 능력인지, 능력에 대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뤄졌는지, 능력을 쌓는 과정은 공정했는지, 그들의 능력주의는 이런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고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기 마련이다. 전공의들의 파업과 의대생들의 국시 거부를 생각해보자. 세상에 어떤 파업이 이렇게 관심을 받은 적이 있으며, 수험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 어떻게 협박이 될 수 있는가?

 

<전교 1등 의사 vs 공공의대 출신 의사>라는 역겨운 문제는 그들이 얼마나 능력주의에 찌들어 있으며, 능력주의가 얼마나 어이없는 허상이고 사회에 해로운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다. 정세균 총리가 의대생들에게 재시험 기회를 줄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해는 간다. 나라의 행정을 총괄하는 입장에서 의료공백이 크게 우려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변곡점이며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지난번 파업 때 많은 사람들이 봤듯이 의대생들은 자신들을 의사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많은 특권이 주어졌으며, 그 특권을 바탕으로 그들의 의견이 과잉 대표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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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대협 페이스북>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특정 세력에게 과잉 특권을 주는 사회는 반드시 무너졌다. 이는 mmorpg식 공정과 달리 진짜 공정함은 그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시험을 거부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은 자들을 재시험을 보게 해주는 것은 사회 전체의 건강함을 무너뜨릴 수 있는 행위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mmorpg 세계관을 가진 이들, 능력주의가 공정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잔뜩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저런 행위를 용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옳다고 믿게 둬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능력주의는 글러 먹었다. 능력주의는 공정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이 자기가 있는 자리로 올라올 수 없게 만들려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포장한 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