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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택견 지도자이다 보니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택견의 우수성에 대해서 얘기하곤 한다. 그러면 여지없이 들어오는 반문은 “택견이 실전성이 있는가?”이다.

 

여기에 덧붙여 십중팔구로 하는 말은 “긴말 필요 없고 택견으로 MMA(Mixed Martial Art, 종합격투기) 경기에 나가 실전성을 검증해 보라”고 한다. 여기에서 의문을 하나 갖게 된다. 그렇다면 MMA가 실전의 기준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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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만을 쓰는 권투나 발차기를 주로 하는 태권도, 또는 손으로 얼굴 타격을 못 하는 전통무예 경기 등에 비하면 기술의 다양성과 타격 부위가 넓은 MMA가 격투에서 유리한 것은 맞다. 그럼 사용 기술의 허용 범위가 넓은 MMA(이하 종합 격투기)는 정말 실전일까?

 

전통무예든, 종합격투기든 맨손무예는 기본적으로 무기 없이 맨손으로만 싸우면서 눈이나 낭심, 목줄기, 뒷목 등 상대의 급소를 가격하거나 뼈를 부러뜨리지는 말자는 규칙이 존재하는 경기 형태다(이전 편, '맨손무예는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링크' 일부 내용 中). 그러므로 이런 경기 형태의 스포츠는 다분히 개인의 취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경기 형태의 스포츠는 실전보단 취향에 의존한다

 

운동장 양 끝에 골대를 세워놓고 상대편 골대에 누가 공을 많이 넣을 수 있는지 경기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경기는 발만 사용하기로 했고, 어떤 경기는 손만 사용하자고 규칙을 정했다. 

 

그런데 손으로만 경기를 하다 보니 던지는 거리에 한계가 있어 경기장을 좁혀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경기장이 좁아지면 골대도 작아지고, 또 공도 손에 잘 잡힐 수 있어야 하므로 공의 크기도 작아지면서 오늘날의 핸드볼 같은 형태가 될 것이다. 반면, 발만 사용하는 경기는 발로 공을 차서 멀리까지 보낼 수 있으니 자연스럽게 경기장이 넓어지고 골대도 커져서 현대의 축구 경기같이 될 것이다. 

 

이 두 경기의 장점을 다 받아들여 발로 차기도 하고 손으로 들고 뛰기도 하는 다이나믹한 경기를 만들면 지금의 럭비 경기같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축구의 킥킹(Kicking)과 핸드볼의 드로잉(Throwing)이 혼합된 럭비가 셋 중에 가장 좋은 경기이고, 사람들에게도 훨씬 인기가 많을까? 현재 세계에서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대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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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무예도 마찬가지이다. 실전 전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경기를 위한 스포츠인 것이라면 결국 자신의 취향에 따라 경기 규칙을 선택하고 즐기게 되어 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맨손무예가 더 뛰어나고 좋은 격투 스포츠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구기 스포츠와 달리 격투 스포츠는 서로 치고받으며 겨루는 것이니까 구기 스포츠와는 다른 케이스다. 경기 규칙을 떠나 보다 실전에 가까운 것이 좋은 무예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실전? 맨손무예에서의 실전은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실전이라 함은 실제 전투, 죽을 때까지 끝장을 보는 전투를 말하는 것일 게다. 맨손무예에서 그런 실전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 존재할까?

 

 

맨손무예만으로 실전을 논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당신의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맨손무예의 고수인 당신은 무기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강도를 잡기 위해 맨손으로 대처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라면 우선 야구방망이나 골프채 등 일단 눈에 보이는 단단한 물체를 들고 대처할 것이다. 총기 소지가 가능한 미국이라면 총부터 들 것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맨손무예의 달인이라 말할 수 있는 ‘전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마저도 자택에 도둑이 침입하자 산탄총을 들고 쫓아갔다.

 

▲도둑이 들자 산탄총을 들고 도둑을 쫓아가는 전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존 존스 영상.

 

다른 예를 들어보자. 조폭들이 조직의 이권을 놓고 상대 조직과 패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조직의 행동대장이 종합격투기 챔피언 출신이다. 그러면 그 행동대장은 사시미칼과 야구방망이로 무장한 상대 조직을 제압하기 위해 맨손으로 싸움에 임할까? 

 

강도의 경우도, 조폭의 싸움도, 생사를 건 실전에서 누가 맨손으로 싸울까? 우리가 소위 맨손무예의 실전이라 말하는 죽을 때까지 맨손으로 싸우는 일은 언제, 어느 경우에나 가능할까?

 

필자의 직업은 택견 선생이지만 취미생활은 검술(劍術)이다. 젊어서부터 진검(眞劍)으로 베기 수련을 즐겨했다. 대나무를 자르다가, 대나무 값이 비싸 신문지 여러 장을 둘둘 말아 딱딱하게 만들어 베기를 했다. 신문지가 모자랄 때는 의상실에서 나오는 두루마리 원단의 중심에 있는 딱딱한 종이 막대를 활용해 베기 수련을 했다. 

 

칼을 조금 세밀하게 구분하면 크게 ‘도(刀)’와 ‘검(劍)’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는 칼이 약간 휘어져 있으면서 한날로 되어 있어 주로 베기에 강하고, 검은 일자로 쭉 뻗어 있으면서 양날로 되어 있어 주로 찌르는 기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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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왼쪽)와 검(오른쪽) 

 

필자가 수련했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도법(刀法)으로 베기 위주의 수련이었는데 40대쯤부터는 진검 수련이 조금씩 싫어지기 시작했다. 베기에 용이한 시퍼런 칼날이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너무 잔인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면서 베기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조선의 풍속화가, 1745~미상)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를 보게 되었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며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나 읊조리며 살리라’는 화제(畫題)에 당비파를 연주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선비 곁에 검이 한 자루 놓여있다. 그런데 그것이 필자에게 그냥 팍하고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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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포의풍류도,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개인소장.

 

그날 이후로 필자는 도법에서 검법으로 바꿔서 수련을 했다. 그랬더니 필자와 베기 수련을 같이 했던 친구가 필자에게 빈정거리듯 말했다.  

 

“이보게, 검은 고대 무기야! 검과 도가 실전에서 붙으면 당연히 도가 이길 테니, 이젠 자네가 날 이길 수 없을 걸?!”

 

그때 필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검을 들고, 자네는 도를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울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은데, 검보다 도가 센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앞으로는 진검을 들고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일 일이 없을 텐데 검과 도의 실전력을 논하는 것이 의미 없는 것처럼, 어떤 규칙도 없이 맨손으로 죽을 때까지 싸울 일이 평생 없을 텐데 목숨을 건 격투에서의 실전력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이냔 말이다. 

 

 

맨손무예에서의 실전이란

    

전통무예 택견의 지도자인 필자는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젊은 격투기 선수와 붙어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나 만일 그 선수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늦둥이 딸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다면 그때는 결과를 알 수 없다. 

 

근력이나 스피드에서 뒤지면 볼펜을 움켜쥐고 얼굴을 찍어버릴 수도 있고, 옆에 놓인 유리컵을 얼굴에 던져 타격을 준 후 강력한 발차기로 낭심을 가격하고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제압해 버릴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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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필자가 꼭 이긴다는 것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라 모든 싸움의 결과는 일단 붙어봐야 안다.  

 

무예를 수련한다는 것은 항상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접했을 때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그 용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실질적인 기량을 키우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맨손무예는 도구의 인간에게 있어 최강의 전투술은 아니지만 사악한 적과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용기와 기량을 배양하는 아주 중요한 종목이다. 

 

그러므로 맨손무예에서의 실전이란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맨손무예가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잘 싸우는 것을 말한다 

 

축구 선수가 평상시 공을 잘 다루다가도 경기에서 헛발질만 하면 안 되고, 피아니스트가 평소에는 잘 연주하다가 무대에만 올라가면 삑사리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맨손무예는 그 무예가 정한 규칙에 의한 경기에서 잘하는 것이 실전이다. 

 

체육학과 출신인 필자가 학교 다닐 때, 코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연습을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이란 말이었다. 

 

축구선수에게는 축구경기가, 피아니스트에게는 무대가 실전이다. 그러니 태권도선수에게는 태권도경기가 실전이고 권투선수에게는 권투경기가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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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선수가 미국 진출 후에 지난 19일, 처음으로 타이틀 방어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 칼리스타 실가도(콜롬비아)에 승리하여 최 선수는 세계복싱협회(WBA) 여자 슈퍼페더급 8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MMA경기는 MMA선수들의 실전일 뿐이다. 

 

필자 연재의 댓글 중에 종합격투기선수가 태권도대회에 나가도 이긴다는 글이 있었다. 마침 그 선수의 출신이 발차기 위주의 무술이었다면 동네 태권도대회에서는 어느 정도 빛을 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문적인 태권도 선수들의 경기에서는 절대 예선 통과도 못한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도 전문 카포에이라(capoeira) 대회에 나가면 예선 통과를 못하는 것처럼.

 

2003년 미국 뉴욕시 퀸즈 칼리지(Queens College Fitzgerald)체육관에서 뉴욕장사 씨름대회 특별이벤트가 열렸다. 미국의 프로레슬링 선수들과 우리나라의 씨름선수들이 겨뤘는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5-0으로 완승을 했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알아주는 프로레슬러들로, 어떤 레슬러는 250kg이 넘는 어마어마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한국의 씨름 선수들에게 맥없이 넘어갔다. 거구의 미국 프로레슬러들이 힘이나 기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실전은 씨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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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롯데캐슬배 뉴욕장사 씨름대회에서 경기하는 윤성규 선수와 미 프로레슬링 선수 오말이튼(255kg).

 

인간이 우주 공간의 허공에 떠있지 않는 한 주변에는 항상 지형지물이 있기에 절대로 맨손으로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실전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맨손무예에서의 실전이란 자신이 속한 무예의 틀에서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많이 본 당신이 끝까지 ‘주위에 어떤 물체도 없고, 땅도 아주 평평한 넓은 마당에서, 살인죄도 적용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고 두 사나이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붙는 상황이라면 어떤 맨손무예를 익힌 사람이 이길까?’가 계속해서 궁금하다면 필자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그 사나이들이 어떤 맨손무예를 익혔든 싸움을 한다면, 싸움을 많이 해본 사람이 이긴다. 태권도 경기에서는 태권도를 잘하는 사람이 유리하고, 권투에서는 권투를 익힌 사람이 유리한 것처럼 싸움은 싸움을 잘(well+frequently)하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칼럼기사를 재미있게 본 독자들 중 이전 편, <맨손무예는 전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링크>를 안 본 독자들은 두 기사를 같이 읽으면 더 흥미진진하게 기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