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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2.금요일


필독


 


 


 


 





불교계가 축구선수들의 '기도 세레머니'를 걸고 넘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축구협회에 기도 세레머니 제지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미디어에서는 ‘축구장에 종교논란’ 정도로 보도가 되었고 네티즌들은 주로 종교평화위원회에 찬동하는 분위기다. 이런저런 게시판에서 기도 세레머니에 대해 반감을 표한 네티즌들이 많았다.



 


기독교. 아니 ‘개독’.



 


내가 이 노골적인 표현을 접할 때마다 쾌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물론 나는 이 말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는 점을 인지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 개신교의 주류세력이 종교의 자격을 잃은 모습이 역겹다. 예수의 사랑을 가장한 집단이기주의가 싫고, 대형교회들이 친일, 재벌집단에 동조해 정치세력화한 모습에 분노한다. 그래서 나는 비겁하지만 ‘개독’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는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이 ‘개독’을 입에 담는 모습을 좋아한다.



 


내겐 종교가 없다. 일부 축구선수들이 골 세레머니를 기도로 대신하는 모습은 날 즐겁게 해주지 않는다. 재미있지도 않고 역동적이지도 않다. 나는 세레머니를 통해 나타나는 과격한 승리감에 동참하고 싶다. 축구는 대리전쟁이다. 기도는 필드의 원초적인 맛을 확 떨어뜨린다. 야생의 폭력을 대리 체험하는 환상에서 관중을 일순간 이탈시킨다.



 


그런데 나는, 기도 세레머니를 닥치고 봐야 한다. 보고싶지 않으면 안 보면 된다. 그래도 닥쳐야 한다. 이유야 말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다. 당사자가 기도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번 동계올림픽 빙속 해설자였던 제갈성렬이 하차한 배경엔 종교평화위원회가 있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주님의 은총' 운운한 것을 두고 종교평화위원회가 강력한 불만을 표시했고, 제갈성렬은 네티즌들이 지적했듯 복합적인 자질문제가 아니라 실은 '종교적 실수'로 물러난 것이다.


 


사실 제갈성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해설자는 시청자와 선수 사이에 있다. 그의 언어는 선수들의 몸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일차적으로 규정한다. 성적은 선수 개인의 노력과 재능이 만들어낸 것이다. 금메달은 선수의 것이다. 그걸 '주님이 허락'했다고 하는 건 선수에 대한 모독이다.  


 


이 멘트는 시청자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제강성렬은 금메달을 따는 주체가 '선수'가 아닌 '우리'로 판단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 선수의 목에 금메달이 걸릴 때마다 "대한민국이 이겼다." 이때 선수는 국가의 일부, 혹은 도구가 된다. 이 집단주의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한국이 종교국가도 아닌데 특정종교의 신이 은총을 허락했다가 말았다가 해도 되나?


 


제갈성렬이 좀 안되긴 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흥분상태에서 그런 실수를 할 법 하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선수와 시청자, 국민들의 종교적 자유가  침해될 수 있음을 전제했으니, 제갈성렬이 하차하는 건 맞다. 하지만 골 세레머니는,


 


선수 개인이 개인으로서 하는 것이다.  


 



추억의 브랜디 채스테인 세레머니. 미국 국가대표였던 브랜디 1999년 미국여자월드컵에서 상의를 과감히 벗는 이 세레머니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일약 대스타가 되었다.


 


축구에서 득점이 발생한 후, 경기의 흐름이 끊기는 순간 선수들에겐 감정표현과 개인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는 내 골이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럼 하는 거다. 제갈성렬은 타인과 집단(국가)에 대해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투하했다. 골 세레머니는 선수가 자신의 골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전혀 다르다.


 


종교평화위원회의 목적은  타 종교에 평화의 손을 내미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는 남들이 자신들의 기분을 해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이기적인 평화인 것 같다. 스님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경기에서 기독교식 기도가 등장하는 모습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다. 하지만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타인의 개인적 권리가 침해되도 되냐는 거다.  


 


종교평화위원회 측에도 소정의 논리가 있다. <선수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듯이 시청자들의 종교의 자유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바보같은 소리가 없다. 나의 자유란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불쾌하게 느껴지는 타인의 취향을 인내하는 데에서 나의 취향도 존재할 수 있다.


 


기도 세레머니는 누구의 종교적 자유도 침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는 골을 넣고 좋아서 방방 뛰는데, 누구는 경건히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모습은 아이에게 종교의 자유란 어떤 개념인가를 설명하는 데 좋은 소재이지 않을까.


 


아마 종교평화위원회는 월드컵에 출전하는 기독교인 선수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거 같다. 16강에 탈락하려는 위기의 순간, 박주영 골! 열광의 도가니속에서 박주영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 불쾌할 수 있는데, 종교적으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이 불쾌함을 '종교의 자유'를 들먹이며 사회적 문제로 치환해서는 안 된다. 이건 졸렬한 거다.


 



 


제갈성렬 하차 건으로 <어 이거 통하는구나>하는 자신감이 붙었을 것도 같고. 그런데 개인의 권리란 교단이나 위원회 등 집단의 목소리에 의해 강제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종교평화위원회는 그냥 병신같은 짓을 한 거다.


 


종교평화위원회의 스님들은 그렇다치자. 네티즌들도 나름 이 스님들을 지지하는 논리가 있다. 그런데 그 논리란 게 고작


 


- 축구는 단체운동이다. 혼자서 어시스트 하고 골을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동료들이 기회를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골은 팀 전체가 만드는 것인데 동료들을 제쳐두고 자신의 신에게 감사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수준이다. 김연아도 스케이팅 연기 전에 성호를 긋긴 하는데 그건 혼자 하는 스포츠이므로 상관없단다.




 



그런 식대로라면 안정환은 2002 월드컵을 전후해 골을 넣으면 결혼반지에 입을 맞추는 낭만적인 퍼포먼스로 ‘반지의 제왕’이라는 (좀 간지러운) 별명을 얻었다. 동료들이 만들어 준 기회를 아내에게 돌렸으니 참 이기적인 선수 아닌가? 그런데도 이에 불만스런 글이나 [안정환 반지키스 논란] 따위의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안정환이야 골을 넣는 데 아내의 내조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그렇다 치자. 90년대를 풍미한 브라질의 명공격수 베베토는 더 파렴치하다. 베베토는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후 요람을 흔드는 동작의 '아이 얼르기'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얼마 전 아이을 낳은 걸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골을 가능케 했던 동료들의 노력과 브라질축구의 인프라, 국민들의 성원을 무시하고 그 영광의 순간을 축구가 뭔지도 모르는 제 자식에게 바치다니. 게다가 전세계의 시청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그런데도 천치같은 동료들은 베베토의 세레머니에 동참했다. 뿐만 아니라 이 세레머니는 전세계에서 수년 간이나 유행했다.


 


국가대표는 국가를 대표하므로 특정 종교 세레머니를 자제해야 한다는 논리도 있다. 그러니까 국가대사에 임하는 선수가 왜 부부사랑을 과시하고 아이자랑을 하냐는 거다. 참, 김연아도 국가대표씩이나 돼서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스포츠가 선교도구로 쓰이면 안된다고도 한다. 공공재가 선교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면, 개인적 기쁨을 과시하는 장소로 쓰여서도 안 된다.


 


     


다양한 악덕의 현장. 특히 1분 12초에 주목.


 


많은 이들이 기도 세레머니에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기독교가 싫기 때문이다. 반대논리가 분분하지만 논리야 감정적 필요로 만들어내는 것일 뿐. 시청자에게 불쾌감을 주므로 제지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래서 발생한다. 불쾌감, 느껴라.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값이다. 기도하는 꼴이 싫으면 싫다고 말해라. 하지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는 말자. 타인의 존재와 태도, 행동방식이 내 마음에 안 든다고 제한되기를 바라는 건 유아적이다.


 


나는 월드컵에서 우리 선수들이 골을 넣고 기도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건 내 사정이다. 내게 이명박을 쥐새끼라 부를 자유가 필요한 것처럼,


 


필드에 기도의 자유를 허하라.


 









 


 


ps. 위의 브라 노출 세레머니 이미지에 대해 : 브랜디 채스테인을 미아 햄으로  잘못 표기했다가, `Lezzy`, [노리도리]님의 지적으로 정정했다. 조공짤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