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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세기, 그러니까 붓다가 세상을 떠난 지 약 백여 년 후, 인도 바이샬리에 700명 이상의 승려가 모여서 랩배틀을 벌였다. 그 결과, 불교는 두 개의 큰 축으로 분열한다.

 

쪼개진 두 축의 성향은 이 또한 인간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한쪽은 붓다 당시의 룰(rule)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보수파(상좌부, Sthaviravādins)였고, 한쪽은 시대에 맞게 룰을 변형해야 한다는 진보파(대중부, Mahāsāṃghikas)였다. 이들이 싸우게 된 계기는 10가지 룰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이 중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승려는 금, 은 및 화폐 등을 받을 수 있다.”

 

라는 조항이었다.

 

이 랩배틀은 일단

 

“승려가 어디 감히 돈을 직접 받는가. 승려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자그마한 옷과 거주처, 그리고 식량 뿐이어야 한다.”

 

라는 엄근진 보수파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의 불교사는 그렇지 않게 흘러갔다. 최근 혜민스님의 ‘풀소유’ 논란에서 빚어진 것처럼, 승려의 재산 축적 행위는 이후 2000년 간 불교도 내외부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다.

 

 

옛날 옛적의 사원경제 시스템

 

과거, 그러니까 불교가 여전히 인도의 메인스트림을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고 있을 때, 승가(僧伽, saṃgha, 승려들의 수행 공동체)는 원시 공산주의와 비슷한 형태의 공동체였다. 승려는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소유만 할 수 있었고, 수행자 개인 혹은 승가로 보시(報施, 물품·음식·재화 등을 승려나 사찰에 기부하는 것)된 것은 모두 공평하게 분배한다. ‘생산’이라는 단계가 없긴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룰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했다. 화폐 경제와 시장 중심의 경제가 활성화되자, 신도들은 과거처럼 집을 통째로 지어서 보시하거나, 음식을 만들어서 보시하는 것보다 화폐를 선호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먹고 살고 바빠졌고, 수행자 또한 그들과 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화폐를 직접 받는 것을 선택했다. ‘사유재산’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곗바늘을 확 돌려 200여 년 전의 한국불교 상황을 보자. 조선 후기 사원경제는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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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승려의 하드캐리 덕분에 왕실의 하사 또는 백성들의 펀딩으로 '재산(노비, 토지, 물자, 건물, 음식 등)'이 발생한다. 그 후, 사찰의 효율적 경영과 수행자의 본분을 둘 다 지키기 위해 ‘이판승(理判僧 : 밥 먹고 수행만 하는 승려)’과 ‘사판승(事判僧 : 사찰의 행정적 소임을 담당하는 승려)’으로 분리된다. 여기에 ‘일일불작이면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일하지 않는 놈은 처먹지도 말라”(주 : 필자가 직접 들은 감동실화)라는 원칙이 통용되며 공동 노동으로 재산을 유지해 나간다.

 

사찰이라는 거주지를 중심으로 공동생활을 해나가려는 방법으로써 고안된 것이었다. 수행자의 공동생활은 붓다 시대부터 유지되어온 소중한 전통이자 원칙이었으며, 불교가 수난을 맞이했던 시대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택하던 전략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중 생활을 벗어나서 홀로 거주하며 수행하는 건 어느 정도 짬밥을 인정받아야만 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오고,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이 끝나는 현대사의 굴곡진 상황에서도 이러한 시스템의 큰 틀 자체는 꽤 잘 유지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의 물결이 한강의 기적을 따라 세워졌음에도, 적어도 90년대까지는 여러 바리에이션이 나오긴 했으나, 이것이 유지되어야 할 전통이고 한국불교의 고유한 색채라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를 넘기면서 상황은 변한다.

 

 

승가가 해체된다. 시스템이 무너진다

 

앞에서 슬쩍 지나간 문장을 되새겨보자. ‘한 승려의 하드캐리 덕분에’라는 문장이다.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불교는 법당에 앉아 있는 불상보다 스님의 영향력이 더 크다. 신도들 사이에서 “부처님 보고 절 가냐? 스님보고 절 가지”라는 말이 떠돌 정도다.

 

승려 한 명 한 명의 개인기를 개발하는 것이 수행 생활의 퀄리티에 몹시 중요하다. ‘누구는 참선을 잘하고, 누구는 경문을 잘 읽고, 누구는 염불을 잘하고, 누구는 탱화를 잘 그리고’라고 이 바닥 내외에 소문나는 것이 승려 개인으로서나, 사찰 전체로서나 중요했다. 그래서 풍족한 사원경제를 유지하던 사찰들은 이러한 ‘스타 승려’를 반드시 한 명 이상은 보유하고 있었다.

 

20세기~21세기로 접어들어도 ‘스타 승려’를 중심으로 한 보시는 이어졌다. 그런데, 그 양상이 조금 바뀐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을 간 승려들을 서울의 부잣집 신도들이 계를 만들어 후원하던 전통이, 21세기에는 동국대에 유망한 젊은 스님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승려들의 공동 거주는 잘 지켜졌지만, 점점 더 승려 개인이 사찰을 건너뛰고 ‘개인 신도 커뮤니티’를 결성해 나가는 방식이 많아진다.

 

사찰 내부에서의 ‘분배의 정의’ 또한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의식주에 소요되는 비용이 증가한 것과 더불어(누더기처럼 보이는 승복 한 벌이 사실은 몇백만 원이라는 것을 알면 놀라는 사람이 좀 있다. 고오급 빈티지 누더기다),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 조계종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돈의 흐름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경상도 승려와 전라도 승려의 불교 의식이 달라 함께 법회를 볼 수 없었다’는 기록까지 있을 만큼, 한국불교는 ‘다양’했다. 그런데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조계종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화가 일어났다. 조계종은 일선 사찰에서 취득한 모든 재산을 중앙으로 올려보낸 후, 다시 사찰로 분배하는 경제 시스템을 만든다.

 

돈의 단위가 커지자, ‘슈킹’의 단위도 커진다. 전에는 승려 개개인이 신도로부터 보시받은 돈을 사찰에 납부하지 않아도 귀여운 정도였다(액수가 그만큼 작았다). 그러나 이제, 조계종의 중앙권력을 차지하는 경우, 어마어마한 예산(조계종 중앙 종단의 예산만 1,000억 원을 돌파했다)을 단독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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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전통이 또 한 번 변질된다. 90년대 초, 쇠파이프든 스님들이 조계사의 기왓장을 날려 헤드샷을 맞추던 뉴스를 기억하시는가. 문도(門徒), 한 사찰을 중심으로 유명한 스승과 많은 제자가 똘똘 뭉치는 계파주의가 종단 내부의 정치 투쟁에서 중요한 축으로 자리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계파주의에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원래는 수행을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잘 가르치고, 잘 배우고, 성실하게 맡은 바 역할를 다 하라는 취지였고, 그것이 한국불교의 다양성을 살리는 기능을 했었다. 그런데 ‘경제적 독점 지위’라는 콩고물이 걸리면서 종단 내부의 정치 투쟁의 조직으로 변질되었다. “사찰에 들어온 모든 재산은 공동하게 분배하자”라는 원칙은 유명무실해진다.

 

동시에 승려가 삶을 영위하는 위한 모든 방면에서 비용이 발생한다. 예컨대, 승려가 출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수계산림(뉴비 스님 훈련소)을 하기 위해선 개인이 사찰에 비용을 내야 한다. 그 밖에 승진 시험, 연수, 각종 교육에도 다 비용이 있다(오히려 사찰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부분도 있다). 탁발을 할 수 없으니 음식은 물론, 승려가 입는 옷, 이동비, 통신비 등도 다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교도소 안에서도 범털과 개털이 존재하듯, 사찰 안에서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극명하게 대비됐다. 힘 있는 계파의 ‘대빵 큰 스님’이 애지중지 키우는 후계자는 입는 옷, 먹는 음식, 해외유학까지 하는데, 그렇지 않은 승려들은 공부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한다.

 

부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바람, 그리고 신도가 승려를 따르게 만드는 분위기에, 승려들은 승가를 탈출하여 자신만의 거주지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을 여기서 다 다루기는 어렵다. 언젠가 ‘조계종 100년사’에서 다룰 수 있기를 희망하며 넘어가 본다.

 

 

승려 또한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었다

 

영화 <달마야 놀자>에선 수좌(首座) 스님들의 모습이 잘 나온다. 뭔가 좀 쩌는 듯한 큰 스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뭉쳐 절을 이끌어간다. 그런데 이제, ‘제자 노릇’하려는 스님들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가뜩이나 출가자 수가 수직 낙하하고 있는 가운데, 백날 수좌 생활해봐야 별 볼 일 없는 계파에 소속되어 있다면 ‘창창한 미래’를 기대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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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원래대로라면 승려의 ‘창창한 미래’란, 열심히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승려의 ‘창창한 미래’는 어떻게든 자신의 개인기를 살려, 어떻게든 개인 신도를 많이 꾸리고, 자신의 이름이 걸린 간판을 내세우는 것이 되었다. 이제, 공동생활은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것’ 정도가 되었으며, 가진 재산을 헌납하고 공동생활을 하며 이번 생을 마무리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승려 개개인을 위한 복지 시스템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달마야 놀자>에서는 노스님이 세상을 뜨고 다비식(茶毘式, 불교의 장례의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다비식은 이름난 스님들만 얻을 수 있는 특권이다. 힘 없고, 빽 없고, 돈 없는 노스님들은 사찰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다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다.

 

어릴 적, 한 사찰에서 며칠 머물렀던 적이 있는데, 그 절의 법당에서는 돌아가신 스님들의 영정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식을 붙여놓고 예경을 드렸다. 다른 날에는 스님들 손에 이끌려 장례식장에 갔다. 그 절에서 계시던 노스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스님이 그 절에 있는 지도 몰랐다. 티비에 자주 나오는 주지 스님이 이 절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 스님은 그렇게, 절에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뒷방 늙은이’로 십수 년의 세월을 보낸 채 삶을 마감했다.

 

이러한 상황에 어떤 스님의 수좌 노릇을 하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겠는가? 마치 ‘탈승가(脫僧伽)가 답’인 것처럼 젊고 재능있는 스님들의 탈주 러쉬는 이어졌고, 그들은 자신들만의 개인 거처를 마련한 채 안거(安居, 집중 수행 기간)나 교육 때만 잠깐 들어와서 대중 생활 코스프레를 하면 될 뿐이다.

 

관계가 역전됐다. 노스님들은 간신히 얻은 제자들이 어느 날 자신을 떠나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해야 하고, 엄한 교육은 커녕 아기 다루듯 그들을 살살 달래야만 한다. 

 

사설이 길었다. 이 글은 이제서야 혜민스님과 다시 만난다.

 

 

혜민스님을 욕할 수도, 쉴드칠 수도 없는 불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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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해 제기된 혜민스님에 관한 의혹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런데 아마 그러한 디테일은 이 논란에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스타 스님이 자신만의 선원을 차리고 자신만의 거주처를 만드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룰 위반이지만(조계종은 원칙적으로 사유재산을 종단에 헌납해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사망 후엔 귀속된다), 사람들이 정말로 실망하는 건, ‘남산뷰’와 ‘풀소유’를 말하는 것처럼,

 

“스님도 휴먼이니까 개인 재산을 얻을 수 있긴 한데, 혜민스님은 선을 씨게 넘은 거 아니냐”

 

인 것 같다. 아마 이 정도의 비판이라면 혜민스님도 굳이 대꾸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솔직히, 그 ‘남산뷰’는 이 바닥의 눈으로 봐도 연출이라기엔 어색했고, 홍보라기엔 어설펐으며, 리얼이라기엔 괴랄했으니까. 그러한 시선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불교계 내부의 승려, 특히 비주류 스님들은 현각스님이나 혜민스님을 종단이 제공하는 온갖 혜택을 받은 자로 인식하고 있다. 조계종은 십수 년 전, 외국의 명문대 출신 젊은이들이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교육비용을 ‘투자’했다. 세부적인 내역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번 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그리고 언젠가 ‘뒷방 늙은이’가 될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스님들보단 훨씬 더 편한 ‘중노릇’을 했을 것이다. 혜민스님이 책을 쓰면서 자신의 사유를 나누는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던 것도, 기본적으로 기초 생계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스님 짬밥이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여러 단독 활동을 할 수 있던 것도 종단의 ‘묵언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계가 혜민스님을 질타하면서도, 침묵을 택하거나, 혹은 ‘너무 나댔다’ 정도의 반응을 내놓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사유 재산 축적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승려가 거의 없고, 두 번째는, 특히 젊은 스님들이라면 혜민 스님은 일종의 워너비이기 때문이다. 적잖은 젊은 세대의 존경을 받는 셀럽이면서, 대중 생활과 종단의 온갖 굴레와 속박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단체를 운영하고, ‘말년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부의 축적을 이뤘다. 세 번째는, 급감하는 불교 신도와 출가자 속에서 ‘스타 스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승려가 법륜스님과 혜민스님 정도 뿐이라는 점이다. (여담인데, 법륜스님은 ‘운 좋게’ 정식 조계종 승적이 아니게 된 덕분에, 활발한 독자적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국, 교리적이나 원칙적으로는 혜민스님을 비판해야 하지만, 본인들의 미래와 노후를 생각하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식으로 밖에 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애로사항이 있는 것이다. 이런 걸 인지부조화라고 부르나. 나는 그렇게 오염된 단어로 부르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곰팡이 가득한 방에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그 노스님이 여전히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런 면에서, 혜민스님이 트위터에 쓴

 

“법정스님이 무소유가 가능했던 것은 책 인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나 주지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또 어느 정도 베풀 능력이 되어야 아이러니하게도 무소유가 가능해진다”

 

라는 말은 사실관계가 틀렸지만(법정 스님은 인세를 들어오는대로 기부했다) 젊은 승려들에겐 '남는 말'이 되었을 게다. 물론 법정스님은 더 많은 부를 충분히 누릴 능력이 되었지만, 스스로 소유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는 점에서 혜민스님과는 다르다. 그러나 법정스님 대신 ‘가장 보통의 스님들’을 대입해보면, 저 말에는 깊은 공감을 할 수밖에 없다.

 

즉, 세간에서 출세간을 지향하는 불교도를 2500여 년간 뿌리 깊게 괴롭혀왔던 문제가 자본주의 시대에서 가장 심각하게 터지고 있다.

 

 

소유하지 않으면서 불행하지도 않은 삶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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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스님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지’ 정도로 대충 후려쳐도 진짜로 중요한 문제는 남는다.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은 가능한가.

 

앞서 사원경제의 역사를 구질구질하게 쓴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적도 있었다. 수행 공동체는 개인의 소유를 최소화하면서도 수행을 위한 최적의 여건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해진 지금 불교가 지향하는 무소유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하는가.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것만 가지라”고 말했던 붓다의 말을 지키기 너무나 어려운 시대, 무소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불교계의 최대 난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첫 번째 단추가 승려를 비롯한 노인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부터라고 생각한다. 앞서 조계종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비판했으나, 이 제도가 장점도 있다. 조계종은 ‘승려개인부담금’을 통해 연금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승려복지법’ 제정을 통해 승려의 치료 비용 등을 일정 부분 종단이 책임지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속세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졌다면, 절간에서는 ‘출가에서 입적(入寂, 승려의 사망)까지’ 사찰이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그나마 승려 노후 복지 문제를 신경 쓰는 종단도 조계종이 유일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제도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앞서 말한 대중 생활을 해체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도 문제이다. 스타 승려들이 빠져나간 절은 수입이 급감한다. 사찰의 수입이 급감하면 중앙 종단의 재정도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승려개인분담금을 제정했지만, 그것은 곧 사유재산을 일정 부문 인정하는 꼴이다.

 

즉, 불교계의 전통과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순 사이에서 충돌하는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복지에 따르는 재정 문제, 주거 형태 문제, 치료 지원 문제에 대한 말끔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 ‘하는 둥 마는 둥한’ 형태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스님들도 삼성전자 풀매수하고 존버하는 시대가 올 지도 모른다.

 

짧은 생각으론, 승가의 해체를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최소한의 종교적 형태로 존속은 하겠지만, 경제적 협동조합 형태의 승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지금 조계종이 진행하는 것처럼, 연금제도 외에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제도적 노력 말고도 조계종 및 불교계 내부에 산적해 있는 여러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총무원장 자리를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일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가? 절 안에서도 부의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하는 현상을 언제까지 그대로 둘 것인가?

 

그런 면에서 ‘풀소유’라는 욕을 오지게 먹어야 하는 쪽은 사실 혜민스님이 아니라, 권력을 꽉 차지하고 있으면서, 뒷방에 물러나 ‘큰 스님’ 코스프레를 하는 스님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집권 세력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대체 세력 또한 세력만 작을 뿐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니까.

 

속세가 ‘공정’에 대한 뜨거운 논의를 이어갈 때, 보살의 마음으로 속세를 제도해야 할 절간이 ‘불공정’ 그 자체라는 것에 대해 모든 불교도는 참회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걸맞는 무소유, 풀소유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있지 아니하므로 있음보다 충만한 무소유’를 위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불교계가 늘 해오던 것처럼 외면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고, 이제는 직시했으면 좋겠다.

 

 

뱀발. 짧은 글에 담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을 두서 없이 건드렸다. 불교계에 익숙하신 분이라면 이 글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언젠가 더 숙성된 생각을 더 정리된 글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역사라는 소스로 꽤 괜찮은 스토리텔링을 했다'

라는 평이 자자하다며 근성 있게 주장하는 중인데,

아무튼 그렇단다.

 

마침 빡센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니

 한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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