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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화요일


미쉬파트


 


 


 


제목이 좀 낚시성이 있습니다만... 본문 내용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 저렇게 제목을 붙여봤습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성경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내용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글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한 간단한 가이드입니다. 특히 교회 내에서 많이 언급되는 하나님의 뜻, 혹은 계시라는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 내에서 참 많이 듣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서 상당부분 왜곡되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이에 대한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비신자분들께도 성경에 대한 하나의 정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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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사용할까요? 개인적인 편차가 매우 큰 질문이 될 것 같군요. 어떤 분에게는 라면냄비 받침대나 베게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할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인문학적인 참고도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기도 할 것이고 어떤 분에게는 인류의 좋은 스승의 가르침이 되기도 할 것이며 또 어떤 분에게는 신의 계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물론 어떤 분에게는 희대의 사기교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성경의 크게 두가지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계시를 알아내는 것으로, 다른 하나는 비신자들에게는 종교적 경전이나 인문학적 도서로서 학술적 가치를 찾는 것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이 둘 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부정적인 측면에서든 텍스트(본문)의 인용을 통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 본문의 내용을 갖고 받아 들이든지 혹은 씹든지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다시 말해 오늘날 완성된 형태로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의 텍스트를 인정한다는 말과 같습니다.(이를 믿느냐 안믿느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물론 과거 18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일부에서는 지금까지도) 성경에 대한 해체작업이 트렌드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은 신의 계시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그 필요에 따라 작성하고 편집하여 지금의 성경의 형태를 만들었다는 고등비평론적 해석학적 입장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인문학의 발달로 인해 성경에는 많은 비판적 연구가 행해졌습니다. 특히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의 소위 문서설(Documentary Hypothesis)이후 성경에 대한 메스는 더욱 날카로와지고 특히 이 시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고고학적 연구로 인해 성경의 기록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견해들이 나타나면서 성경은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들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허구적인 내용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성경은 역사적으로 모두 정확한 책이며 특히 과거 교회의 교리적 입장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기 때문에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신앙적 사조를 바탕으로 성경의 내용은 모두가 틀림이 없다는 근본주의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등비평과 고고학적 비평은 교회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도전이었지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과거 교회의 신학적 입장은 사실 성경 자체의 내용과는 큰 상관이 없는 매우 종교적으로 교리화된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비이성적인(?) 교회를 비판하고자 시도된 고등비평과 고고학적 비판들은 오히려 잠자고 있던 성경 본문에 대한 심도 있는 관찰을 시작하게 해 준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교회는 오히려 신앙적 타락을 가져왔고 그것을 비판했던 견해는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찾아가는 전기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시작된 성경해석학의 치열한 변천사는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동안 완전히 새로운 진리처럼 여겨져왔던 문서설과 고등비평론(역사비평, 편집비평, 사료비평 등)들이 자체의 모순과 분열로 그 동력을 잃어버리고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습니다. 특히 성경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성경은 인간들이 짜집기했다는 급진적 주장)을 펴던 학자들도 말년에 들어서는 상당부분을 수정하게 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여기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면 그냥 신학 학술 문서가 될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한가지 예를 들자면 문서설과 고등비평론적 입장에서는 성경은 후대의 작품이기 때문에 문체나 문법은 후대의 것을 반영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컴퓨터의 발달과 더불어 강력한 반론들이 나타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앤더슨(Andersen)과 포브스(Forbes)의 연구에서 그동안 포로기 이후에나 쓰여졌다고 고등비평론자들이 말한 모세오경의 철자패턴을 컴퓨터로 DB화 했더니 오경의 문법적 특성은 시대별로 분류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모든 문서에서 고르게 나타났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철자들의 패턴은 포로기 이후가 아닌 훨씬 고대의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시대에 따라 모세오경이 편집되고 재기록되었다는 비평론자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학술적 결과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신 저널들을 보시면 학자들의 아티클(Article)에서는 이러한 연구결과들이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살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결과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서는 성경해석학에 대한 매우 중요한 변화들이 많이 나타났는데 중요한 두가지만 말씀드리자면 하나는 문예적 비평이고 다른 하나는 독자 반응비평입니다.


 


전자는 성경 문헌간의 점착성의 높은 밀도로 인해 성경을 연대별로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완성된 형태의 성경문헌에 대한 구조적, 문학적 분석을 통해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는 메세지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이며 후자는 성경 본문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성경메세지를 현대의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하게 되는가를 연구하여 현대의 독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제가 이 두가지 연구방법론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것이 오늘날 성경이해에 대한 현대인들의 중요한 관점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과거의 논쟁의 중점이 과연 성경이 역사적인 것이냐 비역사적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면 근래에 들어와서는 그 논쟁의 중점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들은 성경을 통해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인가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의 역사(History)적 문제와 역사서술(Historiography)적 문제와의 긴장관계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논제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성경과 고고학이라는 측면에서 다룰 문제고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입장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성경과 고고학적 진술과의 차이에 대한 부분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므로 다른 글에서 다루어 볼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대에 들어서는 성경본문에 대한 중요한 관심사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성경본문의 내용에서 중심메세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큰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든 비신자든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쪽에서든 성경본문을 가지고 이를 찾으려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구요. 그러다보니 신자들도 성경을 가지고 말하고 비신자도 성경을 가지고 비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과거는 자꾸 성경 외적인 자료를 가지고 논쟁을 하다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제는 어찌됐든 성경본문의 내용을 직접 연구하고 논증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뀌어가고 있어서 포커스를 맞추기 좋아졌습니다. 오늘 할 이야기도 여기에 관한 것이기도 하구요.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다시 제목을 상기시켜 보겠습니다. 성경 속의 숨겨진 계시라? 사이비 종교인들이 워낙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 조금 거부감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제목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성경은 표면적인 읽기를 통해서는 쉽게 그 진의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이기 때문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이는 성경이 매우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성경을 그동안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려고 했다는 의미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성경은 성경자체의 특성상 역사와 문화와 떨어져서는 많은 부분에서 의미가 사라지는 책입니다. 그동안 신자들이 성경을 지나치게 비역사적이거나 탈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종교적 경전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모든 성경의 서술과 진술들이 종교적인 관점에서만 해석이 되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적인 것으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적 비평론의 발전과 고고학적 연구의 발달은 성경을 다시금 역사와 당시의 문화 속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성경의 감춰졌던(더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부각되지 못했던) 메세지들이 종교적 도그마의 탈을 벗고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드러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성경해석은 선후가 뒤바뀐 감이 있습니다. 먼저 성경 자체를 편견없이 연구하고 본문의 메세지를 본문의 문맥과 내용 안에서 발견해 내어서 그것을 설명하고 적용해야 맞는 것인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과거로부터 성립되어 온 종교적 가르침과 교리 안에서 성경을 끼워 맞추고 그것과 상관없는 것은 과감히 버리거나 혹은 그 교리나 종교적 전통에 맞도록 각색해버리는 것을 성경해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모순들이 기독교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특히 이는 비기독교 진영에서 기독교의 배타성과 모순을 지적하는 주된 원인들이 되었습니다.


 


즉, 성경을 통한 신앙이 아닌, 기독교라는 종교시스템을 통한 신앙으로 인해 성경의 내용과는 다른, 심지어는 반대되는 가르침들이 교회안에 보편적으로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교회의 실용적, 현세적인 종교적 변화와 맞물려 성경 본연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 종교(New Religion)라고 불러야 할 현대적 기독교(특히 개신교쪽)로의 변화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의 성경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가르침은 모든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확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는 바입니다. 저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고 싶습니다.


 


모든 성경의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장난 이라고 화내실 분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의 본문(Text)의 모든 글자(Word)를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 본문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를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대한 용어정리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근본주의적 신앙사조에서는 모든 성경의 본문의 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명백한 비유 혹은 역사 적 서술 이나 성경저자의 충고나 권유들도 모두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와 같은 권위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수많은 종교적 전통들을 갖게 되었고 이는 점차로 성경의 본문과는 상관 없는 종교적 권위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전통들이 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인간사회에 유익한 규범들과 행동의 원칙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결과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 = 신의 명령]이라는 권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다양한 문헌적 특성, 그리고 형성과정 속에서의 변화를 다 무시한 매우 종교적인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야기되는 더 큰 문제는 비기독교인들 역시 성경의 언급된 모든 내용은 곧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렇게 선언을 했기 때문에 교회의 문제를 비판할 때는 그 근거가 되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성경속에서의 역사적 진술 혹은 성경저자와 편집자의 개인적 견해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이해를 하기 때문에 많은 논란과 논쟁을 야기하게 됩니다. 특히 성경 속에서 나타난 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행동, 혹은 부당한 일에 대한 서술과 비판같은 것들 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하여 비기독교 진영으로부터 폭력적이고 잔혹한 신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모두 성경 안에서 서술과 계시의 구분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덮어 놓고 쉽게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던 기독교계의 실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핵심근간으로 하는 책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았을때, 특히 구약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그 분량이 구약 성경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신약 역시 이러한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합니다만 신약은 시대적 특성상 비교할 수 있는 성경외적인 문서들과 역사적 내용, 그리고 각종 문헌들의 비교가 구약에 비해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에 구약에 비하면 그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쉽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사본 중 하나


 


물론 신약성경도 매우 복합적인 당시의 상황과 삶의 정황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복음서가 왜 네가지나 정경으로 채택되었는지만 봐도 신약성경이 형성될 당시의 기독교적 상황은 결코 평면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다룰 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하물며 문헌적 자료가 비교적 적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구약시대의 상황(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부터 길게는 4천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을 고려하면 이런 작업을 할 때 더욱 더 신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기독교는 이런 과정을 대부분 무시합니다. 모든 역사적 문제와 당시의 상황, 그리고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다 무시하고 성경전체를 하늘에서 어느날엔가 떨어진 하나님의 계시처럼 비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것으로 취급합니다. 제가 앞에서 고등비평론들의 등장이 오히려 약이 되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지적해 준 것이 고등비평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교회는 여전히 과거의 종교적인 시스템 안에서 헤메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 본문 자체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본문의 구조와 형성과정, 역사적 사료와의 비교분석 등의 성경해석 방법론들은 그 배경과 진의야 어찌됐든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계에서도 이런 방법적인 문제에서는 많은 변화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과거의 종교적인 해석에서의 메세지가이 아닌 성경본문 자체가 증언하는 메세지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안에 구약과 신약이 함께 존재하는 이유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오경 속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왜곡되고 바뀌어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계시의 전승을 놓치 않고 지켜 온 사람들이 당시에 이를 이용하려고 했던 종교적 세력들과의 대립과 마찰 속에서 이 최초의 계시들과 언약들이 어떻게 신약시대로까지 이어져 오게 되었는지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어떻게 보면 종교적인 경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Narrative)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구전된 전승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에 대한 좋은 반증입니다. 또한 근동 지방의 작고도 보잘 것 없었던 민족이었던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된 이 계시적 전승이 수천년의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강대국(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영향력 아래에서도 이어져 결국 로마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하나의 거대한 담론이 되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에서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역사와 시대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다양하게 이해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안에서부터도 하나님을 자신들만을 지키고 보호하는 매우 좁은 의미의 부족신으로 이해했던 사람들이 있었고(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이긴다고 생각한 것을 보십시오) 단순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 주는 하나의 도피처적 이상향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중간사 시대의 묵시문학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그 역사적 특성상 끊임없는 외국의 압제와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줄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야를 끊임없이 원했습니다(구약 성경에는 그래서 하나님을 전투와 전쟁의 신으로, 압제자들을 처단하는 심판의 신으로 많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는 그런 사람들의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요구와 바램과는 달리(더 정확하게는 그와 상관없이) 일관됨을 유지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참 어렵습니다만 성경의 본문 가운데 끊임없이 등장하는 계시적 용어는 [돌아옴](회개: Repentance)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이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는 내러티브의 중심에는 이 모티브가 녹아 있습니다. 율법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포로기 시대에도,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진술에는 이 돌아오라는 촉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 대해 끊임없이 인간들은 악의적으로 반응하고 거역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또한 성경의 일관적인 진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죄로 인한 인간들의 현실을 고발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삶도 고발합니다(특히 구약에서는 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과 심판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고 신약에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그리고 위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가 가장 많습니다. 결국 성경은 어떻게 보면 비신자들에게보다 신자인 척 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와 각성에 대한 메세지가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그렇게 죽거나 죽어갈 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 놓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의 메세지가 그 성경의 계시안에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뜻)를 이땅에서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잘먹고 잘살고 축복받고 성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현대 기독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늘 있어왔습니다. 구약에서는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그랬고 신약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양쪽 모두 가장 핵심적인 종교지도자들이며 소위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안다고 하는 계층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각각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참된 뜻을 말하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외면받았으며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찌 보면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가 들어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멀쩡히 살고 있는 사람보고 죄악의 길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을 누군들 듣기 좋아하겠습니까? 편하게 살고 부유하게 살고 자신을 위해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보다 남을 돌아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어떻게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니 늘 성경의 메세지를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은 비신자들과 거짓신자들 양쪽 모두에게 지탄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이와 같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이렇듯 비신자와 거짓신자들 모두에게 숨겨져 있습니다. 지혜문학서인 잠언서 8장 17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에 대해 이렇게 의인화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자가 나를 만날 것이라" 오늘날 구원이며 축복이며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진리들이 너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의 싸구려 명제가 되고 말았지만 실은 이것들은 결코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믿습니다 한마디 한다고 천국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마음의 진실은 다름 아닌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진실로 회개할 수도 없거니와 그런 말 한마디 했다고 진심으로 회개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하며 그것이 없이 말로만 믿는다는 사람은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결코 천국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소위 신자인 척 하는 사람들이 더욱 무겁게 들어야 할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성경의 이 메세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무엇을 갖다 붙이고 합리화하고 혹은 부정하여도 이 하나님의 뚜렷한 계시의 근본정신은 일관되게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여 존재합니다.


 


저는 교회들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은 전철을 밟을까봐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중요한 뜻을 놓치고 자꾸 변두리에도 속하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그것이 본질인것처럼 호도하는 그러한 소란함 속에서 모두들 종교적 허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특히 오늘날의 개신교는 이 부분을 더욱 무겁고 진지하게 들어야 될 것입니다. 요엘서에 기록된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이스라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