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지난 한 해, 우리는 문재인 정부의 사법 개혁과 그에 반하는 세력 간의 사투를 지켜보았습니다. 법무부장관과 대통령의 검찰총장 징계, 그리고 그에 반발하는 검찰, 동조하는 법원.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우리들이 알아두면 좋을만한 역사의 한 토막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글이 좀 길기 때문에 바쁘신 분은 10줄 요약만 보고 넘어가셔도 됩니다.

 

1. 1929년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박살 남. 경제는 망가지고 실직자와 노숙자가 이어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과 자본가는 경제개혁 반대.

 

2. 193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 당선. ‘뉴딜’을 내세우며 취임 100일간 각종 경제개혁 법을 내놓음.

 

3. 공정거래위원장이 ‘뉴딜’에 “반기업적”이라며 공개 반대함. 루즈벨트가 단칼에 짤라버림. 공정거래위원장은 해임 무효 소송 제기.

 

4. 연방 대법원, “대통령은 고위 공무원 맘대로 못짜름”이라고 판결 때림. “대통령은 공무원 맘대로 짜를 수 있음”이라는 불과 4년 전 자기네들 판결도 무시함. 판결문에는 루즈벨트에게 거의 “웃기고 있네”식의 인신공격까지 들어있었음.

 

5. 같은 날 연방 대법원, 루즈벨트의 핵심 경제개혁 법 2개를 한꺼번에 위헌 판결 때려버림. 민중들은 대법원 판결 3건이 나온 이 날을 ‘검은 월요일’이라고 부르며 분개함.

 

6. 보수 대법관 5명, 그 후에도 꿋꿋하게 수많은 ‘뉴딜’ 경제개혁 법을 수십 개를 5:4로 무조건 위헌 판결 때려버림. 루즈벨트는 “늙은이 9명(대법관)가 나라를 망치는구나”라고 한탄함.

 

7. 루즈벨트, 대법원과 싸우다가 첫 임기 4년을 날려버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민중들은 1936년 루즈벨트를 60%의 압도적 지지율로 재선시키고, 민주당에게 의회 절대 과반을 줌.

 

8. 루즈벨트, 재선되자마자 법무장관 시켜 “대법관 70살 넘을 때마다 젊은 판사 추가 임명” 법안 발표. 평균연령 70대의 늙은이 대법원 판사들이 ‘뉴딜’의 장애물이 된다는 판단 때문.

 

9. 대법관들과 언론은 ‘루즈벨트는 히틀러’라며 격렬하게 반발. 그러나 ‘밥그릇 뺏길’ 것이 겁난 보수 대법관 9명 중 1명이 마음을 바꿈. 결국 루즈벨트 뉴딜 법안이 5 대 4로 합헌 통과됨.

 

10. 결국 언론의 융단폭격으로 사법 개혁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루즈벨트는 전투에 지고 전쟁에 승리함. 연방 대법원은 뉴딜 법에 다시는 위헌 때리는 일이 없었음. 루즈벨트는 뉴딜과 2차대전 승리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위대한 대통령이 됨.

 

f90f10607023e6aa98547b089bb965be.jpg

 

20세기 초 미국은 자유시장경제와 정글 자본주의의 극한을 달리는 곳이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가만 놓아두면 경제 주체가 알아서 잘한다’는 믿음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허용되는 곳이었죠. 예를 들어서,

 

steel-workers-gaze-on-as-molten-steel-is-poured-from-ladle-to-casts-at-homestead-steel-works-december-31-1914-pd.jpg__2000x1616_q85_crop_subsampling-2_upscale.jpg

 

하루에 20시간씩 일시키자. 밥 먹는 시간 10분 빼고 휴식시간 없고 물론 시급은 조금만 줘야지. 뭐가 문제야? 자유시장경제인데.

 

pbox.jpg

pennsylvania-coal-miners-P-1024x532.jpeg

 

어린애는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돈은 조금만 줘도 되네. 어린애도 공장, 탄광에서 마구 일시키자. 말 안 들으면 두들겨패고. 뭐가 문제야? 자유시장경제인데.

 

Image_of_Triangle_Shirtwaist_Factory_fire_on_March_25_-_1911.jpg

TriangleFire_25March1911_BodiesOnSidewalk.jpg

1911년 트라이앵글 셔츠 공장 화재 참사, 성인 여성 123명, 여자 어린이 23명, 남성 23명 화재로 사망

 

어린이랑 여자는 남자 노동자보다 돈을 덜 줘도 되니 일시켜먹기 좋네. 의류공장에 때려 넣고 일시키자. 물론 물건 못 훔치게 공장 문은 닫아걸고! 어, 이러다가 불나서 많이 죽었네? 

 

이러다 보니 기업가들은 부를 축적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한 상태였고 양극화는 갈수록 심각해져 갔습니다. 게다가 요즘 같은 최저임금, 국민연금, 장애연금, 국민건강보험 같은 건 있지도 않았고, 일하다 다치면 가족의 도움을 받거나, 자선단체의 도움을 받거나, 그러지 않으면 노숙자가 되어 굶어죽는 판이었죠.

 

이런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뉴욕주 의회는 1905년 법정 노동시간 법을 도입합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노동을 금지하고, 주당 근로시간이 60시간을 넘으면 안 된다"라는, 그야말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보장하자는 것이었죠.

 

City_bakeries_bridgeton_1936.jpg

노동자를 하루 10시간 이상 근무시키다 적발된 뉴욕 제과점의 모습

 

그런데 뉴욕의 한 제과점 주인이 직원들을 주당 60시간 이상 일시키다가 적발되었고, 이 사건은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갑니다. (로크너 대 뉴욕 사건, Lochner v. New York) 그리고 대법원의 판결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10시간 이상 노동하겠다고 상호 합의했는데 뭐가 문제임? 자유시장 경제는 자유 계약이다. 나라가 개인의 재산권에 끼어들면 안 된다.”

 

한마디로 ‘자유시장경제’라는 이름하에 사용자와 노동자가 합의하면 무슨 노동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하고, 국가는 절대로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물론 언론들은 “역시 자유의 국가 미국”이라고 찬양한 건 물론입니다.

 

2128Freedom-600x400.png

연방 대법원이 로크너 판결로 미국의 자유와 헌법을 구했다는 언론의 만평

 

그 후에도 몇몇 주정부에서 최저임금제, 국민연금, 법정근로시간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기업 편향적 보수적 대법원은 그때마다 “개인 재산권 침해, 계약의 자유 침해”라며 가차 없이 위헌판결을 때렸습니다. 결국 연방 대법원의 ‘자유시장경제’라는 미명하에 노동자들이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비참하게 일하던 30여 년간의 시대를 ‘로크너 시대’라고 합니다.

 

PullmanCartoon_0.jpg

 

대통령의 인사권, 웃기고 있네

 

그런데 이 상황에서 1929년 대공황이 터져버립니다. 미국의 GNP는 대공황 이전의 반 토막이 나버렸죠. 실업률은 25%에 달했고, 가장이 직장에서 짤리고, 가족들이 은행에 집을 차압당해 판자촌에 살고 자선단체의 무료급식이 없으면 굶어죽을 판에 처했죠.

 

5eb5c47f48d92c0767139ca9.jpg

 

분노한 미국민들은 1932년 선거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을 심판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57%의 득표를 몰아줍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등장이었죠.

 

RooseveltNewDeal.jpg

 

대통령에 취임한 루즈벨트는 ‘취임 100일’ 작전에 돌입합니다. 민주당 의회와 손잡고 각종 경제개혁 조치 ‘뉴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죠. 정부의 시장개입, 금융구제, 가격통제,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을 잇달아 도입했습니다.

 

또 연방공정거래위원장(FTC)의 윌리엄 험프리스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합니다.

 

download (1).jpg

 

"대기업의 불공정거래와 부당경영, 불법행위를 감시, 적발하시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의 부당경영을 감시하는 ‘재계의 검찰’이죠. 그러나 전임 대통령이 임명한 험프리스 위원장은 루즈벨트에게 한마디로 가운뎃손가락을 날립니다.

 

WilliamEHumphrey.jpg

 

"이런 반자본, 반시장적인 지시는 못 따르겠다.”

 

결국 루즈벨트는 험프리스를 1933년 공정거래위원장에서 해임합니다. 6년 임기에서 4년이 남아있는 상태였죠. 그러자 험프리스는,

 

“공정거래위원장은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실제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라며 해임무효 소송을 제기합니다. (험프리 대 미국, Humphrey's Executor v. United States)

 

이 소송은 마침내 1935년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갑니다. 그리고 5월 27일 연방 대법원 대법관 9명은 만장일치로 판결합니다.

 

02.05photo.jpg

 

"대통령은 임기가 보장된 공무원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다.”

 

루즈벨트는 물론 민주당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불과 9년 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우정국장을 해임했을 때, 연방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죠.

 

“대통령은 그 어떤 공무원도 해임할 수 있고, 의회도 여기에 개입할 수 없다.” (마이어스 대 미국 Myers v. United States)

 

연방 대법원은 9년 전에는 대통령의 절대적 인사권을 인정해놓고, 이번에는 "대통령의 인사권? 웃기고 있네"라며 뒤집어버리는 뻔뻔함을 보여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판결문에는 루즈벨트를 조롱하는 듯한 내용이 담겨 있어서 더욱 충격이었죠. 루즈벨트는,

 

“이건 나에 대한 보복이야. 인신공격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검은 월요일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연방 대법원이 5월 27일 험프리스 사건과 같은 날 내린 2건의 판결이었습니다.

 

“루즈벨트의 뉴딜 경제개혁 법안 건 모두 위헌!”

 

연방 대법원은 이날 루즈벨트의 ‘뉴딜’ 핵심 경제개혁 법 2건에 무더기로 위헌을 때려버린 것이었죠.(Louisville Joint Stock Land Bank v. Radford, Schechter Poultry Corp. v. United States).

 

특히 루이스빌 조인트 스탁 은행 대 래드포드의 위헌판결은 미국민들을 좌절시켰습니다. 대공황 당시 은행 대출을 못 갚은 농부들이 토지와 집을 차압당하고 노숙자가 되는 일이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해 루즈밸트 행정부는 농부들이 법원에 5년간 차압중지를 신청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습니다. (1934 Frazier-Lemke Farm Bankruptcy Act).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돈을 빌려준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법”이라고 위헌을 때려버렸습니다.

 

images (1).jpg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의 주인공 역시 은행에 땅을 압류당해 쫓겨난 날품팔이 농부였습니다

 

언론은 “루즈벨트의 뉴딜, 사법부가 사형선고” “좌파 경제정책 좌절” “루즈벨트 레임덕”이라고 대서특필하죠. 연방 대법원이 위헌판결 3건을 때린 1935년 5월 27일을 미국사에서는 ‘검은 월요일’(블랙 먼데이)라고 부릅니다. 뉴딜 정책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라는 뜻이었죠.

 

NRA.jpg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만평

 

unnamed.jpg

좌파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위헌을 때린 연방 대법원을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요새'로 미화한 당시 만평

 

그러나 연방 대법원과 언론이 “좌파 빨갱이 뉴딜 정책이 좌절됐다”라며 기뻐하는 그 순간에도, 길거리에는 대공황으로 집과 땅을 빼앗겨 노숙자가 된 시민들이 무료급식을 받으려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에 문제가 있음이 분명해졌는데도, 대기업 및 사법부는 기득권 사수에 급급해 경제개혁을 거부한 것이었죠.

 

american_way.jpg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간판 밑에서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실업자들

 

특히 연방 대법원은 루즈벨트에게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루즈벨트가 집권 후 ‘고통분담’ 차원에서 대법관을 비롯한 고위 공무원의 연봉과 연금을 ‘절반’으로 깎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법관의 ‘밥그릇’을 건드린 괘씸죄가 작용한 것이었죠.

 

언론의 루즈벨트 융단폭격과 민중의 지지

 

분노한 루즈벨트는 1935년 5월 31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대법원을 비난합니다.

 

“대법관들은 지금 미국 경제가 말 타고 마차 끌던 헌법 제정 시절 수준인 줄 알고 있나? 미국의 사법제도는 우상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수많은 병폐를 보여주고 있다. 대대적인 사법 개혁이 필요하다. 만약 사법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헌법 개정까지 고려해야 한다.”

 

물론, 언론은 ‘얼씨구나’ 루즈벨트의 이 발언을 신나게 두들겨팼습니다.

 

“사법부와 헌법을 무시” “오만한 독재자”

 

33050101.gif

독재자 루즈벨트가 재무 장관, 농무장관을 '코드인사'로 다 해먹는다는 내용의 만평

 

 

1b9a79cae376d4e67ea2d053cfd2eb3b.jpeg

좌파 루즈벨트가 막대한 국가예산을 퍼주기 하고 있다는 만평

 

어찌나 언론에게 두들겨맞았는지 루즈벨트는 한동안 기자회견을 갖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사석에서는 "늙은이 9명(연방대법관이 나라를 망치는구나"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의 목소리는 달랐습니다. ‘세처 가금류 공장 대 미국’ 판결 후 농부들은 닭대가리 허수아비 5개를 세워놓고 ‘대법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루즈벨트의 ‘말 타고 마차 끌던 시절’ 발언을 인용해서 보수파 대법관 4명을 ‘말 대가리’(The Four Horsemen)라고 불렀습니다.

 

fdrcartoon.jpg

대법관이 몰고있는 느려터진 마차가 뉴딜 개혁입법 자동차를 가로막고 있다는 만평

 

그 이후에도 연방 대법원은 루즈벨트의 뉴딜 경제개혁 법 수십 건에 대해 줄줄이 위헌을 때려 무력화시킵니다. 이처럼 루즈벨트는 첫 임기의 황금 같은 4년을 경제개혁 대신 연방 대법원과 법정싸움에 허비해야 했습니다.

 

images.jpg

연방 대법원이 루즈벨트 뉴딜에 정의의 법봉을 내려치는 만평

 

여당 내 포퓰리즘 세력 ‘발목 잡기’

 

게다가 의회 과반을 차지한 여당 민주당도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부 총질’이 일어났습니다. 상원 의원 휴이 롱이 그 주인공이었죠.

 

huey1a.jpg

 

좌파인 그는 193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루즈벨트를 열렬하게 지지했으나, 루즈벨트 집권 후 아무런 자리를 얻지 못하자 “제왕적 대통령”이라며 루즈벨트 비난에 나섭니다. 그는 대공황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겨냥해 실현 가능성 없는 포퓰리즘 막무가내 정치를 펼칩니다.

 

tumblr_inline_p3wu2ob6sG1rf8klv_1280.png

 

“루즈벨트의 개혁은 노동자들에게 한참 모자란다. 부자들의 돈을 세금으로 뺏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 부자 과세를 해 한 가정에 5000달러씩 나눠주자.”

 

휴이 롱은 대통령도 우습게 봤습니다. 백악관에서 루즈벨트를 만날 때도 모자를 벗지 않았고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신 “프랭크”라고 부르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지요.

 

포퓰리즘 정치를 펼쳐 높은 인기를 누린 휴이 롱은 마침내 ‘대통령병’에 걸려 1936년 대통령선거에 루즈벨트를 제치고 자기가 민주당 후보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됩니다.

 

hpl_time_cover_lg.jpg

 

"내가 바로 대통령 후보다"

 

결국 휴이 롱은 너무 포퓰리즘 정치를 하며 ‘어그로’를 끌다가 대통령 후보 경선을 앞둔 1935년 정적의 아들에게 총으로 암살당하고 맙니다.

 

lossy-page1-330px-Raymond_Moley_at_Presentation_of_Medal_of_Freedom_awards_-_NARA_-_194316_(cropped).tif.jpg

 

루즈벨트를 배신한 또다른 측근 중 하나는 레이먼드 몰리 컬럼비아 대학 로스쿨 교수였습니다. 그는 루즈벨트 집권 전부터 각계의 전문가 학자들을 모아 싱크탱크 ‘브레인 트러스트’를 만들고, 뉴딜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주인공이었습니다.

 

1099578634-zWeqn4L.png

 

몰리는 루즈벨트의 유명한 그 취임식 연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를 집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몰리 교수 역시 루즈벨트 집권 후 이렇다 할 자리를 얻지 못하자 섭섭함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루즈벨트가 좌파로 나아가고 있다"라며, 루즈벨트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파 잡지를 창간해 루즈벨트를 공격하는 글을 잇달아 씁니다.

 

루즈벨트의 압도적 승리

 

이렇게 사법부의 훼방과 여당 내 비토세력에도 부딪혀 루즈벨트의 뉴딜은 예상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이것을 1차 뉴딜 (1933-1935)이라고 합니다.

 

1차 뉴딜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1935년 ‘2차 뉴딜’을 발표하고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야말로 ‘절대적 지지’를 밀어줍니다. 루즈벨트는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60%를 득표, 48개 주에서 승리하는 압도적 득표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1932년 58% 득표, 46개 주 승리를 뛰어넘는 대승리였죠. 루즈벨트의 득표율 60%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대통령 선거 득표율이었습니다.

 

1200px-ElectoralCollege1936.svg.png

미국 50개 주 가운데 무려 48개 주에서 승리한 루즈벨트

 

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민주당에 상원 과반, 하원 3/4의 의석을 화끈하게 몰아줍니다. 첫 임기에서 사법부와 재계의 방해로 뉴딜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루즈벨트는 절대과반의 민심과 절대과반 의석을 살려 반격에 나섭니다.

 

75_us_house_membership.png

1936년 루즈벨트의 민주당은 하원 3/4를 싹쓸이(파란색) 하는 대승을 거둡니다

 

그러나 3권 분립에서 2개인 행정부와 의회 권력을 장악했는데도, 나머지 하나인 연방 대법원 개혁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헌법상 대법관을 비롯한 연방판사는 모두 종신직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죽거나 스스로 은퇴하지 않는 한 대법관을 바꿀 수가 없었죠.(이건 2020년 현재도 변함이 없습니다.) 헌법을 뜯어고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건 여론의 눈치가 너무 보였습니다.

 

루즈벨트의 폭탄 투하 : 연방 대법원 포위작전

 

루즈벨트는 재집권한지 3개월도 안 돼 1937년 2월 5일 갑자기 사법절차 개혁 법안(Judicial Procedures Reform Bill of 1937)을 내놓습니다. 루즈벨트 본인과 호머 스미스 법무장관 2명이 비밀리에 준비한 기습공격이었죠.

 

suprise move.jpg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습공격"을 알리는 당시 신문 1면.

 

루즈벨트는 법안에서 대놓고 “법관을 짜르거나 탄핵하자”라는 식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1기 때 물론 언론과 사법계에 호되게 두들겨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죠. 법안의 내용은 한마디로 이러했습니다.

 

“아이고, 대법관 어르신. 요즘 눈도 침침하시고 몸도 예전 같지 않죠? 게다가 사건은 와장창 밀려있구요. 제가 그 심정 다 알죠.”

 

“나이기 70 넘어가니까 좀 그렇지.”

 

“어르신 모시는 건 제가 잘하죠. 이렇게 하죠. 앞으로 대법관 어르신이 70살이 넘으시면, 젊고 팔팔한 새 대법관을 추가하는 겁니다. 대법관 어르신을 잘 모시고, 일도 잘할 겁니다.”

 

“말도 안 돼. 대법관은 9명인데 또 추가한다구?”

 

“헌법에는 대법관을 둔다는 말만 있지, 대법관을 꼭 9명으로 한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는데요.”

 

“!!!”

 

“그리고 제가 대법관 어르신 월급하고 연금을 깎아서 맘이 상하셨죠?”

 

“당연하지. 감히 내 밥그릇을 건드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대법관 어르신께서 70살 넘어 은퇴하시면, 연금을 두 배로 챙겨드리겠습니다. 화끈하죠! 제가 한다면 합니다. 이제 맘 편하게 은퇴하시죠.”

 

루즈벨트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대법관을 바꿀 수가 없으면, 대법관 숫자를 늘리고 우리 편을 더 많이 넣으면 된다는 것이었죠.

 

루즈벨트의 ‘기습 폭탄 투하’에 물론 언론은 격렬하게 반발했습니다. 루즈벨트가 행정, 의회에 이어 사법부까지 장악하려 한다며 “독재자”라고 두들겨팼습니다. 하버드대 교수의 이름을 빌어 이런 기사도 썼습니다.

 

“사법부를 장악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독일 히틀러가 한 것처럼 판사를 쏴 죽이거나, 아니면 자기편 판사를 많이 넣어서 사법부를 장악하거나. 루즈벨트는 히틀러다!”

 

a+negative+thing+and+that+FDR+was+becoming+a+dictator..jpg

루즈벨트가 경제개혁의 항해를 하고 있다는 만평(왼쪽)과

루즈벨트가 의회, 행정부를 장악하고, 사법부까지 장악해 독재자의 길로 향한다는 만평

 

https___www.history.com_.image_MTU3OTYwNzIxMTM5NzcxMDkz_fdr-packed-courtgettyimages-96743822.jpg

루즈벨트가 '예스맨 대법관'을 동원해 사법부를 장악하려 한다는 만평

 

언론의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여론은 루즈벨트의 편이었습니다. 당시 연방 대법원 대법관의 평균연령이 70세였고, 가장 나이 많은 대법관이 80살이 넘었습니다. 게다가 뉴딜 경제개혁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네 마리 말대가리’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하늘을 찔렀죠.

 

just-aint-fast-enough.jpg

늙고 느려터진 야구선수 대법관 9명들이 젊고 팔팔한 새 대법관 6명의 스카우트 소식을 듣고 당황한다는 만평

 

‘연방 대법원 포위작전’(Corut packing)이라라고 불린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무서운 점은 루즈벨트는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점이었죠. 루즈벨트의 민주당이 의회 의석 3/4의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사법 개혁안 통과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루즈벨트는 법안 제안 한 달만인 3월 9일 그 유명한 ‘노변담화’를 통해 라디오로 국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10일 연방 상원 법사위에서 이 법안 심사에 돌입하면서 ‘사법 개혁안은 언제든 통과될 수 있다’며 서서히 대법원을 압박했습니다.

 

radio-broadcast-Franklin-D-Roosevelt-September-1934.jpg

루즈벨트는 라디오방송 '노변담화'를 통해 언론을 통하지 않고 지지자들과 직접 소통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꼽힙니다.

 

루즈벨트가 라디오방송으로 압박 작전을 벌인지 3주도 안돼 마침내 연방 대법원이 항복합니다. 1937년 3월 29일 월요일, 연방 대법원은 웨스트코스트 호텔 대 패리쉬(West Coast Hotel Co. v. Parrish) 등 3건의 뉴딜 법안에 합헌 판결을 내립니다. 연방 대법원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루즈벨트의 손을 들어준 놀라운 판결이었죠. 역사가들은 뉴딜 법안 3건이 합헌 판결을 맡은 이 날을 2년 전의 ‘블랙 먼데이’에 빗대 ‘화이트 먼데이’라고 부릅니다

 

life-begins-at-70.jpg

뉴딜 법안 합헌 판결로 마침내 70살 먹은 연방 대법원이 민중과 함께 손잡고 춤춘다는 내용의 만평

 

사실 합헌 판결을 받은 사건 3건은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규제, 노조 결성 등을 규정하는 법으로, 이전에 5:4로 위헌판결을 때려맞은 수많은 뉴딜 법안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합헌 판결이 나온 이유는 순전히 중도보수파 대법관 1명이 마음을 바꿔 뉴딜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기 때문이었죠.  역사가들은 “대법관이 늘어날 경우 기존 9명 대법관들의 밥그릇이 위협받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800px-Owen_J._Roberts_cph.3b11988.jpg

뉴딜 법안에 계속해서 반대표를 던지다가 막판 찬성표를 던진 오웬 로버츠 대법관

 

물론 사법 개혁안 자체는 언론의 융단폭격을 받고 좌초했습니다. 야당은 이 법안을 무려 158일간 심사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부결시켜 버립니다. 물론 언론은 ‘루즈벨트의 독재 계획 좌절’이라며 대서특필하죠.

 

Screen Shot 2016-03-10 at 8.19.07 AM.png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독재' 트로이 목마가 헌법에 가로막혔다는 내용의 만평

 

그러나 루즈벨트는 더 이상 사법 개혁안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전투(사법 개혁안)에는 졌지만 전쟁(연방 대법원 장악)에 승리했기 때문이었죠.

 

연방 대법원의 저항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연방 대법원은 1937년 3월 이후 두 번 다시 뉴딜 법안에 위헌을 때리는 일이 없었고, 루즈벨트의 ‘2차 뉴딜’은 탄력을 받게 됩니다.

 

또 판결 몇 달 후 한 대법관이 은퇴, 한 대법관이 사망하면서, 루즈벨트는 뉴딜을 지지하는 젊은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루즈벨트는 임기 중 대법관 9명 중 7명을 지명하며 연방 대법원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 후는 여러분이 역사책에서 배우신 그대로입니다. 루즈벨트와 연방대법관의 전쟁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겨준다고 봅니다.

 

-사법 기득권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대공황)에도 절대 양보 안 한다.

-사법 기득권은 자기들의 밥그릇(월급, 연금)을 잃을 위기에 처해야만 움직인다.

-루즈벨트의 뉴딜은 단숨에 성공한 적이 없다. 1차 뉴딜 법안이 실패하고 2차 뉴딜법안이 합헌 판결을 받는 데 5년이 걸렸다.

-루즈벨트 1기 정부는 과반 의석을 갖고도 연방 대법원의 저항을 뚫지 못했다.

-미국민들은 사법부의 딴지에도 불구하고 4년 후 루즈벨트에게 60% 득표로 재선(미국 역사상 2번째로 높은 득표율)와 의회 3/4 절대와 반을 밀어주었다.

-루즈벨트 2기 정부가 사법부를 장악한 수단은 장악한 타협이 아니라, 높은 지지율, 절대다수 의석, 그리고 사법부의 밥그릇을 정조준한 압박이었다.

-루즈벨트는 뉴딜의 성공으로 독일이나 러시아 같은 파시즘/사회주의 집권을 저지했다.

-루즈벨트의 지도하에 미국은 2차대전 참전과 승리로 초강대국 도약에 성공했다.

-루즈벨트는 민주당 20년 장기집권 기틀을 마련(1933년-1953년) 했으며,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저는 현 문재인 정부가 루즈벨트의 교훈을 모를 리가 없다고 봅니다. 이 사건은 미국 헌법, 행정법, 정치학에 있어서 반드시 배우게 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추미애 법무장관이 10년 전 한양대 교수 시절에 ‘연방 대법원 포위 작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추미애 초빙교수 특별기고]루즈벨트 대통령의 대법원 포위 계획-미국 루즈벨트 시대를 통하여 본 한국의 자화상(기사링크)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의심하지 말고, 밀어주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편집부 주

 

위 글은 자유게시판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짓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바,

독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 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3번 마빡에 올라가면 필진으로 자동 등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