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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나다


나는 내 생애 한국을 탈출(?)하려고 3번의 시도를 했다. 

 

첫 번째 시도는 월남에 근무 하던 1972년에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것을 알고 나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은 한국에 돌아가서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캄보디아로 도망을 가려고 준비를 했었는데 부대가 철수를 하는 바람에 미수(?)에 그친 사건이었다.

 

두 번째 시도는 1986년도에 빈민촌 활동을 하다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천신만고 끝에 비자를 받아 미국까지 갔다가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서 양심상 돌아온 일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도가 있었던 1996년 12월 말, 삼 세 번이라더니 드디어 한국을 탈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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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문제였다. 김영삼이 집권하고 난 다음 운동권의 상황은 한 마디로 '전선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는 가장이었지만 40대의 10년을 내 손으로 돈을 벌지 못하고 누군가의 후원으로 먹고 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후원을 하던 이들이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되었는데 아직도 투쟁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오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어떤 조직적 배경도 없이, 전적으로 개인들의 후원에 의해서 유지되었던 내 생활에서 김영삼 씨 덕분에 싸워야할 적이 없어져버린 것 같은 애매모호한 현실은 매우 난처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철저한 비주류로 살아온 나는 대학 공부를 시킬 수도, 장래를 위해서 1원 한 장 투자할 수도 없는 현실적 문제에 당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큰 애는 첫 해에 제대로 대학에 들어가자 주변에서 후원해 주시는 분이 많아서 입학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후의 돈은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러나 우수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특별하게 우수하지 못한 실력으로 졸업한 둘째가 문제였다. 

 

우리 집 둘째는 고교 입학 때부터 대포(대학을 포기한 학생)였다. 인문계 고교는 대학을 갈 사람이나 안 갈 사람이나 무조건 밤 9시까지 학교에 잡아놓는 것이 교육 방침이었기 때문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자율학습 면제 협상을 했다. 처음에 다른 학생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안 된다고 했지만 정규 수업을 끝내도 돌아다니지 않고  부천의 대형 서점인 경인문고로 출근을 해서 9시까지 있는다는 조건으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런 덕분에 둘째는 학교 성적이 장학금을 전면 면제(?) 받을 정도였지만 서점에 가서 일도 도와주고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호주로 와서 대학공부를 할 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영어 수학을 못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나라에서 인문계 고교 졸업장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런 고민도 호주행을 결정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시드니에 와서는 나에게 교육의 기회가 생겼었다. 막 이민을 와서는 시내에 차를 주차시키기 위해서 뱅뱅 돌다가 우연히 골목에 있는 시드니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유니테리언 교회-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기독교 종파를 발견했다. 한국에는 없는 교회가 있기에 신기하게 생각해서 그 다음 주일날 예배에 참석해 보게 되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여러 해 나가면서 내가 하는 일을 위해서 교회 장소를 사용하기도 하고 영주권을 얻는 일에도 여러모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유니테리언 교회는 어떤 신조나 교리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마다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흥미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방문 했던 교회 중에 마이야미 교회는 예수, 석가, 무하마드, 힌두교의 신의 걸게 그림을 크게 걸어 놓았고 하와이 교회는 고급 예술가들의 사롱 같은 분위기였고 캐나다의 몬트리얼 교회는 활발한 YMCA같은 분위기였고 시드니 교회는 휴머니스트 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하와이의 호놀룰루 유니테리언 교회는 오버마를 키운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다녀서 어린 시절 오버마도 다니던 교회였다고 해 인상이 깊었다.


아무튼 이렇게 유니테리언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설교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몇 달에 한 번씩 영어로 어렵게 겨우 겨우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교회 운영위원회에서 유니테리언 목사가 될 의사가 있으면 장학금을 대줄 터이니 하버드 대학(원래 하버드 대학은 유니테리언이 세운 학교이다.)에 가서 공부를 해보라고 정식으로 문서로 제안을 해왔다. 나이 50에 생각지도 않게 찾아온 기회가 기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서 유학을 간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주 백인들이 갓 이민을 온 한국인의 상황을 이해할 리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 할까를 고심하다가 "유감스럽게도 내 영어 실력이 하버드에 가서 공부를 할 정도가 되지 못한다."고 정중하게 사양을 했다. 실제로 영어 문제는 냉정한 사실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을 보고 당시 미국에 가서 학위를 하고 싶어 했지만 돈 때문에 못 가고 있던 아들은 자기가 가면 안 될까 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교회에서 원하는 것은 신학이지 경제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연들로 아직도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이상을 쫒던 한국에서의 비주류의 생활을 접고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96년 말, 호주로 향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농사 지을 땅을 다 빼앗기고 만주로 떠난 선조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이민'이라 하지 않고 '유민'이라고 한다. 마음은 정든 고향에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논리라면 나도 이민이 아니라 유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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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50년 간 살아오면서 대통령이 된 사람들로부터 바닥 인간들까지 온갖 인간들을 만났고 사건을 겪었다. 살인만 빼고는(혹시 월남전에서 내가 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대부분 경험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는 좋은 쪽 일이라기 보다는 주로 나쁜 쪽 일들의 대부분을 경험해봤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하루 밤 잘 곳이 없는 떠돌이 생활, 추위, 굶주림, 억울함, 구타, 갇힘, 무시, 굴욕, 오해부터 약간의 칭찬까지. 나는 체력이 허약해서 육체적으로는 거친 생활을 못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제법 거칠게 살아온 셈이다.


생각해 보면 '7, 80년대 한국 최근대사'라는 영화에서 '지나가는 행인 A' 같은 엑스트라 같은 배역마저도 더 이상 지탱 할 수가 없어서 떠난 것이다. 땀, 눈물, 시련, 미움, 사랑으로 40대의 10년을 보냈던 부천, 더 구체적으로는 10년 간 살던, 1호선 철로 변에 붙어있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을 듯 한 방 2개짜리 연립주택을...




하숙집을 운영하며 만난 한국 학생들


맨 손으로 호주에 온 교민들에게는 남자가 군에 입대하면 훈련소에서 받아야 하는 기본훈련과도 같은 일이 있다. 바로 청소와 하숙이다. 우리 집도 처음에 하숙생을 치는 일부터 시작해서 몇 해 동안 수십 명의 학생, 청년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하숙생을 데리고 있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지만 생겨나는 문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가장 큰 한국인의 공통점은 '물, 불을 못 가린다'는 점이다. 이 말이 '용감하다.'는 뜻이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유감스럽게도 그런 뜻이 아니라 전기와 수도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절약을 모른다는 뜻이다. 내가 경험한 것만 해도 빈 방에 불 켜놓기, 가뜩이나 물이 부족한 호주에 와서 삼천리금수강산 출신이 아니라고 할까봐서 사워를 할 때 물 많이 쓰기, 나갈 때 방문 열어 놓고 다니기 등등 여러가지였다. 

 

호주에서는 밤에 동네를 다녀 보면 모두 빈 집 같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집집마다 전등을 환하게 켜두지 않기 때문이다. 호주사람들은 방방 마다 불을 밝혀 집 전체가 환한 한국인들에 비해서 사람이 있는 곳만 불을 켜 놓는다. 그래서 주택가로 갈수록 어둡다. (반면 방범의 이유로 모든 공공건물은 사람이 없어도 전기를 켜 놓는다.)


그 다음 한국 아이들의 공통점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주에서는 아주 어린 자녀들도 청소나 저녁을 준비 할 때 식탁을 놓는다든지, 청소기를 돌린다든지, 화장실을 치운다든지 한 가지씩 일을 돕는다.

 

예를 들면 4살짜리 아이도 자신의 침대정리는 기본이고 식기 세척기의 그릇 제 자리에 갖다놓기, 일주일에 한 번씩 쓰레기통 내놓기, 애완동물이 있는 경우는 똥 치우기, 산책 시키기, 밥이나 물 갈아주기, 큰 아이들은 잔디 깎기, 부모를 도와서 페인트나 담장 만들기 등등의 일들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부모를 돕는 중에 자연스럽게 모든 일을 익히다보니 18세가 넘으면 쉽게 독립을 해서 나가고 남자애들도 요리며, 가사를 여자보다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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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생활해야 하는 하숙생에게서 이런 문제점이 보일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어차피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무관심하게 못 본 체 내버려두는 것이고 또 하나의 방법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부모를 대신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을 시킨다고 잔소리를 하면 한국에 있는 부모들은 무조건 아이들 말만 듣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이만 나빠질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아이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 때문인지 교민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 관계가 나빠지기 때문에 절대로 친척이나 친구들 아이들은 데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하숙생들을 보면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부모님의 잔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사람은 잔소리를 들으면서 자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소리'라는 필수 과목을 이수하지 못하고 자라는 유학생은 불행한 것 같다.


유학을 보낸 부모들은 아이들이 필요한 것, 먹을 것, 입을 것 등등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인격적인 가르침을 누가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밖으로 드러나는 기준만으로 보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모범적인 아이일지라도 성격적인 면에서 볼 때 아무래도 자라나는 아이이기 때문에 고쳐야 할 점이나 바람직스럽지 못한 점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고쳐야 할 점을 이야기하면 잔소리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에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가는 부정적인 관습이 생기게 된다. 결국 하숙생을 데리고 있는 것은 경제적인 면을 제외하면 잘해야 본전인 셈이었다. 




돈이 많아도 문제더라


하숙생뿐만 아니라 친척, 친지, 오가다 만난 사람, 아들 친구, 친구의 친구 등등이 우리 집을 거쳐 갔다. 그 많은 사람들을 겪다보니 나름대로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 있었다. 생활이 어려운 가정에서 겨우 겨우 공부를 해온 사람들은 실수는 하지 않는데 너무 너무 여유가 없어서 옆 사람까지 숨이 막힐 지경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나 돈 많은 집 자식들은 여유는 많아서 좋은데 옆 사람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는 일이 종종 있더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집에 돈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백 배는 좋지만, 돈이 많은 것이 없는 것보다 천 배나 나쁜 경우도 가끔은 목도할 때도 있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3년간 금요일마다 한인복지회의 'Director'로 일을 했다. 호주에서는 대부분 자원봉사는 단순한 일을, 'Director' 같은 명예직 자원봉사직은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보다 복잡하고 책임 있는 일을 수행한다. 


호주의 법에 의하면 정부의 지원을 받는 비영리 단체의 직원들은 공무원에 준하는 수당을 받지만 운영진은 운영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함에도 무보수 자원봉사로 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엄격한 도덕성, 즉 떡을 만지면서도 손에 떡고물을 전혀 묻히지 않아야 하는 청렴성뿐만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헌신적 자세가 필요하다. 동시에 모든 업무가 호주 정부기관의 수준에 맞추어야 하는 일이어서 대단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덕분에 그 동안 복지회가 여러 번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고 운영을 잘못해서 몇 만 불을 변상해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나는 평생을 사회운동이나 자원해서 하는 단체 생활을 해왔지만 돈 때문에 문제가 되는 일이란 것은 항상 돈이 없어서 문제였을 뿐이다. 그런데 복지회는 정부로부터 받은 돈을 잘 써야하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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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복지 프로그램은 철저히 공개입찰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 말은 한국 사람만이 한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능력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인들이나 호주인들이 예산을 따내서 한국인을 고용해서 한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우리에게 차려진 밥상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한인복지회는 영주권자들을 위한 봉사기관이어서 불법체류 신분인 탈북자들은 서비스 대상이 아니지만 이들을 맡을 곳이 없어서 의뢰를 받아 취급한 일이 있었다. 비록 내가 직접 상담을 하는 것이 아닌, 실무자들이 상담한 것을 보고 받는 과정이었지만 그들을 통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을 거치지 않고 호주로 온 탈북자라면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아서 복지혜택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배를 타고 호주로 밀항을 해서 오지 않는 한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탈북난민은 한국을 거쳐 왔지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예를 들면 비행기에서 여권을 찢어버리고 여권이 없는 상태로 들어온다거나-한국 국적임을 부정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들이 북한을 탈출해서 돌고 돌아 호주로 오기까지 그들은 체포, 구타, 살해, 굶주림, 겁탈의 위협 속에서 때로는 한 끼의 식사, 하루 밤 잠자리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한계를 넘나들어야 했었다. 그런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신용이나 체면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호주 정부에서 주는 예산에서 급여를 받으면서 제한된 시간에 가능한 한 많은 교민들에게 서비스를 해야 할 실무자들이 탈북난민의 수렁에 빠지면 헤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관리자인 내 입장에서는 안타깝게도 실무자들에게 탈북난민 문제는 취급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아무리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일지라도 원리는 똑같다. 복지 자체는 돈이 안 되니 어디서든지 돈을 끌어와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대부분의 예산은 호주 정부에서 받지만 일부는 문제를 발생시킨 당사자에게서 돈을 받아 집행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를테면 도박 중독 치료나 담배금연 운동 같은 일 등이다. 카지노에서 내놓은 돈을 가지고 도박중독 치료 프로그램을 하고. 담배회사가 내 놓은 돈을 가지고 금연 캠페인을 한다. 그런데 회의 때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항상 예산을 얼마나 따 내느냐 하는 일이다. 카지노는 도박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담배회사는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는데 그들로부터 병아리도 아닌 벼룩의 눈곱만큼도 안 되는 돈을 타내기 위해서 복지관계자들은 머리를 짠다. 그렇게 사업적으로 머리를 쓰다 정작 돈이 필요한 이들은 외면하게 되는 이게 바로 복지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남자를 반대한다


호주에 와서 제일 처음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은 동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공공연하게, 자유스럽게, 합법적으로, 뻔뻔하게, 당당하게 동성끼리 연애를 하는 보고 충격 받지 않을 한국인이 있겠는가? 시드니 시내에 도처에 동성애자들이 활보 하는 모습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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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97년 초에 뉴욕의 유니온 신학대학의 정현경 교수로부터 시드니에서 열리는 UFMCC(Universal Fellowship of Metropolitan Community Church)라는 교회의 World Conference에서 주제 강의를 하러 오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강연을 듣기 위함이라기보다 순전히 재미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거기서 그때까지 전혀 내가 몰랐던 세계를 만나고 말았다.


나는 그 곳에서 감격적인 경험을 했다. MCC의 성찬식 분위기는 일반교회의 성찬식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진지하다 못해 전투를 앞둔 병사들처럼 긴장감이 감돌기까지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이 세상에서 다수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동생애자 교회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지만 한 시간 강의를 하고 딱히 시드니에서 할 일이 없었던 정 교수와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면서 하루 10시간 이상 이야기를 하면서 동성애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정현경 교수와 시드니에서 접선하여 집중 밀봉교육을 받은 탓에 그 이후 나는 적극적 동성애 옹호자가 되어 스스로 이 사회의 주변부에 서는 조건을 한 가지 더 추가하게 되었다. 


시드니에서 매년 3월 첫 주에 전 세계에서 동성애자들이 모여서 축제를 즐긴다. 이성애자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지만 십대부터 노인까지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엄청난 투자(헌신)를 한다.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게이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며 벌거벗은 몸으로 행진을 하는 퍼레이드이었다. 성기만 가린 가죽옷을 입고 춤을 추며 행진을 하는 광경은 조금 거시기해 보였다. 그러나 성소수자로서 한국 사회에서 외로운 선구자이었던 홍석천이 처음 마디그라 행진에 참가해서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마치 독립운동가처럼 비장하게 행진을 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흐르기도 했었다.


여자가 '나는 남자가 싫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나는 남자를 반대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것은 논리상으로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페미니스트가 '여성! 이 지구상의 마지막 식민지'라고 했다지만 이 세상에서의 모든 차별이 사라진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차별이 바로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일 것이다. 다수는 소수를 손가락질하기만 하면 되니까. 아마 인류사에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빈부의 차이가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인류에게 마지막까지 '차이'의 문제로 남을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성소수자가 차별 받지 않을 권리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는데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성소수자' 이름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킨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해석대로라면 동성애자들에게는 성경이 쥐약이요. 국가보안법이다. 모두 무지의 탓이다.


내가 동성애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성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단 한마디이다. "제발 냅둬! 생긴 대로 살게."




슬픈 노래로 용기를 얻는 사람들


김영삼이 쿠데타 세력과 야합을 하여 벌인 물타기 작전으로 대선에서 승리를 한 직후였다. 당연히 패배의 쓴 잔을 마셔야 했던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분위기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부천의 지구당 사무실에서 선거운동본부 해단식을 하니 참석해서 한 마디 해 달라고 해서 나름대로는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하소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 갔다. 

시간이 되었는데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아줌마가 나와서 노래방 기계 마이크를 잡고 다짜고짜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더니 사무실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분위기가 순간 '부어라 마셔라'로 변해버렸고 마이크를 잡는 사람마다 한이 서린 노래를 불러댔다. 굳은 때나 맑은 때나 모이면 결의를 다니는 투쟁적인 분위기의 노래만 부르는 재야 단체의 행사 분위기는 전혀 달라서 한 동안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어 순간 당황했지만 '아! 이것이 말이 필요 없는 전라도 사람들의 정서로구나'하고 이해가 되었다. 원래 공식 순서가 준비되어 있었겠지만 내가 계속 앉아 있을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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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를 기반으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가 '목포의 눈물'이라고 한다. 세상에 승리를 다짐하는 박력 있는 곡조가 아닌 애절하고 서러운 흐느낌의 곡조가 어떻게 응원가가 될 수 있는가? 차별과 박대의 긴 역사와 끝내는 학살의 경험까지 거치며 살아 온 호남인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과 이회창이 맞붙었던 97년에는 아예 목포의 눈물을 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행여 다른 지역을 자극할까 봐서. DJ 당선 이후에나 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 응원단이 목 놓아 목포의 눈물을 불렀단다.


그런데 호남 사람들만 이런 정서를 가진 건 아니었다. 독자분들은 혹시 러시아의 민요로 알려진 '백 만송이의 장미'라는 노래의 사연을 아시는가? 사실 이 노래의 원산지는 라트비아인데 어느덧 러시아산으로 바뀐 것이다. 소비에트의 지배를 받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노래가 나오자마자 러시아의 시인과 가수가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꾼 다음 불러버렸다는 게 노래의 사연이다. 이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로 남아 있는 곡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것은 동티모르의 토속 음악이었다.


1999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철수하던 시기, 이 때가 아마 동티모르인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때였을 것이다. 독립을 반대하는 친인도네시아 세력(우리로 말하면 친일파)이 독립지지 세력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80만의 인구 중 1/4인 20만, 비율로만 본다면 인류역사에 전무후무한 학살이 자행된 것이다. 동티모르 주민들의 끈질긴 독립투쟁이 50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었지만 그 희생은 너무도 가혹했다. 보다 못한 우리나라도 당시에 유엔의 평화 유지군으로 소수의 병력을 파견했었다.


매일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그들의 부모 형제자매가 살육을 당하고 수많은 동족들이 난민이 되어 보따리를 짊어지고 서티모르로 피난을 가는 장면이 호주 TV를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보도가 되고 있는 중이었다. 인도네시아가 쫓겨 가는 틈을 타서 동티모르에 한 몫 끼어들려는 호주의 입장에서는 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호주정부에서 소수민족을 위해서 세운 방송국에서 일주일에 한 시간 씩 위탁을 받아 한국어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앞 시간이 동티모르 방송 시간이었다. 듣는 사람도 별로 없는 우리의 한국어 방송에 비해서 급박한 처지인 그들에게는 동족을 대상으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일주일의 중의 단 한 시간의 방송이 황금처럼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들의 방송 시간에는 좁은 스튜디오가 시장 통처럼 북적대면서 눈물과 비탄의 분위기로 가득했다. 방송을 하다가 스텝들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 스튜디오를 뛰어나오는 일이 빈번했다.


아무리 보람 있고 좋아도 돈이 생기지 않는 일은 오래 하다보면 신명이 나지 않는 법이라서 당시 나는 방송 타는 것이 좋아서 제멋에 겨워서 출연하는 자원 봉사 스텝들을 데리고 의무적으로 방송시간을 겨우 겨우 메워 가고 있었다. 스텝들은 대부분 한국에 가서 직업을 구할 때 방송 경험을 써먹으려는 매스컴 전공 유학생들이나 연예지망생들이었다. 내 수첩에는 방송을 희망하는 유학생들의 연락처가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자기 멋대로 공중파를 타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티모르인들이 긴장 속에 방송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기면 대기하고 있는 우리 측 스텝들은 짜증을 내고 나에게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괜찮다고 천천히 하라고 했다. 나는 생존의 위기에 서 있는 티모르인들의 방송이 특별한 목적도 없는 젊은이들의 재미거리인 우리의 방송 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통째로 우리 방송 시간까지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눈에는 바로 자기들의 눈 앞에서 지구상의 한 나라 사람들이 미증유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한국의 연예계 소식이나 들고 나와서 기껏 자기들의 '끼'나 발휘해보려는 철딱서니 없는 유학생들이 오히려 한심스러워 보였다.


잊히지 않는 것은 그들 방송의 시그널 음악이었던 동티모르 토속 음악이었다. 마치 흑인들이 춤을 출 때 부르는 노래처럼 단조로우면서 코믹한 리듬이었지만 그 리듬이 내게는 무척 슬프게 들려서 가사를 적어달래고 했더니 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이 "저들은 우리를 게으르다고 하네."라는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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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동안 포르투갈에 식민지로 있으면서 무시당하고 살았던 삶을 자조하는 가사였다. 그런데 그 가사를 보고 전혀 남의 나라 노래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아본다는 말처럼 우리는 일본 분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무시당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 림


2016년 1월 현재, 필진 sydney 님이 일시적으로 귀국 중이며

종교 팟캐스트 '처치맨이지' 8화에 출연하시어

이민 교회에 대해 녹음을 하셨습니다.

팟빵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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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d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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