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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일본을 점령한 GHQ는 전국의 항구에서 레이버 보스(labor boss), 즉 현장 노동자를 관리∙통제하는 오야카타(우두머리), 그리고 "구미(組)"라고 불리는 항만하역 하청업체이자 일용직 노동자 관리∙알선업체를 절처히 배제한다. 그럼에도 야마구치구미 3대째 쿠미쵸 타오카 카즈오는 조직 차원의 수익원 중 하나로 항만하역업을 뽑았다.

 

타오카가 항만 하역업 진입을 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새로 샤테이(아우)로 맞아들인 '오카 키요시'의 존재가 있었다. 오카에게 항만 하역업 정세와 장차 전망을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GHQ의 이상주의적이고 근시안적 점령 정책이 금방 파탄날 것이라는 내용 혹은 그것을 예상케 하는 계기가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 여겨진다. 하나 의외였던 것은 야마구치구미를 다시 고베항으로 부른 요인이었다.

 

 

1. GHQ에 의한 점령정책의 파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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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고베 항만 노동업에 진입하려던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는 예상못한 기회가 되었다. 일본 각지에 있는 항만이 미군의 병참기지로써 군항화되어 갔고 고베항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수송량이 폭증하자 GHQ에 의한 하도급∙일용직 고용금지 방침은 유지하기가 곤란해진다. GHQ 내부에서 GS(민정국)이 후퇴하고 G2(참모제2부)가 대두한 것도 있어서 "민주화보다 반공" 추세가 되기도 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익세력이나 노조를 억눌러야 한다는 방향으로 판세가 바뀐 것이다.

 

항만하역업은 하주(하물의 주인)나 해운회사가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하역업체에 외주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역업체는 다른 하역업체에 하도급을 주거나 자체적으로 야마구치구미 등 "구미"를 통해서 일용직 노동자를 쓰도록 했다. 전쟁 중부터 한국전쟁이 터질 때까지는 하도급이나 일용직 노동자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런 하도급이나 일용직 노동자 파견은 "암거래"로 은근히 행해져 있었고 GHQ도 묵인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GHQ는 '묵인'은커녕 장려하는 정세가 되어버렸다. 1949년 상반기에는 26만 톤 정도였던 고베항 취급 하물량이 1951년 상반기에는 38만톤까지 증가하였다. 부두에는 적재를 기다리는 짐이 쌓여가기만 하고 항구에는 하역을 기다리는 배들이 몰렸다. 기다리다 지친 배 중에는 다른 항구로 행선을 돌린 배도 있었다고 하니 하도급이든 일용직이든 쓸 수 있는 것은 다 써야 될 지경이었음에 틀림없다.

 

야마구치구미에 있어서 순풍이 된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미국에서 상호안전보장법, 통칭 MSA(Mutual Security Act)가 의회를 통과하며 종전의 마셜플랜(Marshall Plan)에 기초한 경제원조가 군사원조적 색채가 강한 대외원조로 변질된 것이다. 한국전쟁에 의한 특수와 맞물려 미일 간 무역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일본 산업계에서도 해상 운송력 강화를 요망하는 소리가 나왔다. 미국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도 항만 운송을 강화해달라는 요구에 1951년 5월, 항만운송사업법이 제정된다.

 

이 법에 따라 GHQ의 점령 하에서 금지되었던 다층적 하도급제와 일용직 노동자 고용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억눌리던 영세 하청업체들이 부활하고, 적시당하던 레이버 보스들이 되살아났다. 타오카가 이러한 과정까지 예상하였다고 하기에는 우연의 요인이 많지만 결과는 타오카 카즈오가 애초 헤아렸던 대로 나타났다.

 

 

2. 야마구치구미의 공세

 

고베에서의 항만 하역 노동 환경이 예전대로 되돌아가자 야마구치구미는 항만 하역업계 사업에 대놓고 주력한다. 주목할 것은 타오카 카즈오가 이에 앞서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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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카는 항만운송사업법이 제정되기 2년 전, 전후 GHQ에 의해 해체되었던 카쿠슈토오(鶴酒藤)형제회(전편 링크) 계통 15개 업자를 결집시켜, '업자 간 친목∙연락 기관'이라는 명목으로 "코도카이(港洞会)"를 발족했다. 요코하마의 사사다 쇼이치(笹田照一), 츠루오카 세이지로(鶴岡政次郎), 후지키 코타로(藤木幸太郎), 코베의 무카이 시게토(向井繁人), 혼다 진스케(本田仁介) 등 "항구의 가오"와 함께 "항구 육인방"을 이루는 오야붕으로 이름을 떨쳤다.

 

타오카 카즈오가 이렇게 급속히 출세할 수 있던 배경에는 사전의 노력이 있었다. 타오카는 1948년 항구 육인방 중 하나인 후지키 코타로를 만나러 요코하마를 찾았다. 항만 하역업 운영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서다. 후지키는 야쿠자가 아니었으나 일본 전국의 항만 하역업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는 보스 중 보스였다. 그는 타오카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부지런한 성질과 연장자에 대한 진지한 태도, 속에 감춘 강렬한 투쟁심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보통 고쿠도(極道, 야쿠자)가 아니다."

 

항만 하역업계의 풋내기였던 타오카 카즈오가 곧바로 사계의 대오야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배경에는 후지키 코타로가 뒤를 봐주었다는 사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항구 육인방" 중 하나인 요코하마 사사다구미의 사사다 쇼이치는 타오카 카즈오와 똑같은 토쿠시마현 출생인데다 잠시 코베에 있었을 때에 야마구치구미 2대째 야마구치 노보루와 형제 사카즈키를 주고받은 인연이 있었다. 타오카가 마치 조카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이미 항구의 대오야붕으로 군림했던 사사가와였으나 흔쾌히 타오카와 형제 사카즈키를 주고받았다.

 

야마구치구미는 당시 물밑에서 행해지던 하역 하청이나 일용직 노동자 파견업에 있어 은근한 권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항구 육인방"이 주도하던 코도카이는 말하자면 "항만 하역업체들이 결집한 비밀결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야마구치구미를 이끄는 타오카는 그 중요한 일각을 차지했던 것이다.

 

사전준비를 꾸준히 한 타오카 카즈오는 항만운송사업법 제정을 한 달 앞둔 1951년 4월, 야마구치구미 구성원에게 운송회사를 만들라고 한다. 타오카가 직접 영입한 샤테이(아우) 오카 키요시가 미츠토모운수(三友運輸)를, 역시 샤테이인 시라이시 코키치(白石幸吉)가 죠에이운수(上栄運輸)를, 꼬붕인 이시이 모토히로(石井基広), 요시카와 유지(吉川勇次), 야마우치 세이지로(山内誠次郎)가 각각 후지해운(藤海運), 요시카와운수(吉川運輸), 쇼에이운수(商栄運輸)를 설립했다.

 

다만 타오카 카즈오에게는 신중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바로 다른 오야붕들과의 관계다. 항만 하역업은 하물을 배에서 뭍으로, 뭍에서 배로 옮기는 과정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배에 실린 짐을 육지로 올리기 위한 작업(선내 하역),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거룻배 운행, 거룻배에서 짐을 육지로 끌어올리는 작업(연암 하역)이다.

 

타오카가 구성원들에게 회사를 만들게 하던 당시, 거룻배 부문은 나카야마구미계 야쿠자인 무카이 시게토가, 연암 하역은 고시마구미나 혼다카이가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타오카에 남겨진 자리는 선내 작업 부문이라, 그는 샤테이나 꼬붕들이 만든 회사를 선내 작업 부문에 집중시킨다.

 

타오카가 이끄는 야마구치구미의 공세는 멈추지 않는다. 새해가 밝자 타오카는 코도카이를 기반으로 고베항만하역협의회를 설립하여 회장 자리에 앉았다. 꼬붕인 오카무라 토쿠죠(岡村徳三)에게 오카무라운수(岡村運輸)를, 샤테이인 모리카와 모리노스케(森川盛之助) 장남 히로노부(浩延)에게 쇼에이운수(昌栄運輸)를 만들게 하여 항만 하역의 하청회사를 마련하였다. 1953년 1월에는 타오카 카즈오 본인이 나서서 코요운수(甲陽運輸)를 창립, 사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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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Q 내 이른바 '뉴딜러(프랭클린 루즈벨트 정권이 벌인 뉴딜 정책을 경험하며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갖게 된 이들)'가 주도한 항만 민주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노동 현장은 타오카 카즈오가 짐작했듯이 일용직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오야카타(親方, 현장 노동자들을 묶는 우두머리)가 항만 하역을 직접 주도, 관리하였다. 결과만 보면 타오카 카즈오가 짐작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3. 고베항의 오야붕에서 고베의 오야붕으로

 

조직 차원의 시노기(돈벌이 수단)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꼬붕들한테 잇따라 항만 하역 회사를 세우게 하고, 본인도 회사를 만든 타오카 카즈오. 코베의 당당한 오야붕으로 성장했으나 야망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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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만 하역 노동의 세계에서 하청제에 기초한 일용직 노동자 고용이나 오야카타-코가타, 즉 노동 현장에서의 오야붕-꼬붕 관계가 부활함에 따라, 오야카타를 통솔하는 "가오"가 항만을 지배한다는 구조도 살아 남았다.

 

이와 같은 항만 생태계는 코베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등지에도 항구를 지배하는 '가오'가 존재했다. 위에 나온 "항구 육인방"을 이룬 오야붕들 역시 그러한 '가오'였다.

 

1956년 3월 전국 각 항만을 주름잡고 있는 가오들의 연합이 설립된다. 전국항만하역진흥협회(全国港湾荷役振興協会), 줄여서 전항진이다. 요코하마의 후지키 코타로가 회장이 되고, 타오카 카즈오는 부회장 자리에 앉는다. 전국 주요 항만을 좌지우지할 조직의 간부가 된 셈이다.

 

타오카 카즈오가 항만 하역의 세계에서 먼저 애를 쓴 일이 무엇이었을까. 애초 타오카가 구미(조직) 차원에서 항만 하역 업계에 뛰어든 이유는 구미의 튼튼한 시노기, 즉 확실한 수익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타오카가 전항진 부회장에 취임해 야마구치구미의 경제적 기초를 더 확고하게 만든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타오카는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 타오카의 대단함을 이해기 위하여는 당시 항만 노동계의 구조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항만 하역 노동계는 대형 해운회사와 하주(荷主, 배에 실리는 짐의 주인)를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구조였다. 해운회사/하주가 각 항구의 대형 하역회사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위탁하며, 해당 하역회사가 1차 하청업자들에 일을 시킨다. 이 때 일이 어렵거나 위험할 경우 1차 하청업자가 다시 2차 하청업자들에 일을 돌린다.

 

2차대전 후 이른바 '노동삼권'이 인정되면서 1차 하청업자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소위 말하는 "홍케나카마(本家仲間)", 오늘 말하는 정규직 노동자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들은 사회당(社会党)이나 공산당(共産党) 등 좌파 정당들의 지원을 받아 전일본항만노동조합(全日本港湾労働組合, 전항만)을 조직했다. 전항만은 1956년 6월 시점에 고베항에서만 모두 9지부, 가맹 인원수가 1,700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전항만은 어디까지나 1차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노조였다.

 

노동 현장의 밑바닥에서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는 "시타우케나카마(下請仲間, 영세한 2차 하청업체 노동자)"나 "히야토이 앙꼬(日雇アンコ)"는 여전히 열악한 노동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오카 카즈오와 그가 이끄는 야마구치구미는 그들 저변 노동자를 조직화시켜 노동조합을 만들게 하며, 코베항노동조합연합회(神戸港労働組合連合会, 신코로렌(神港労連))를 결성시킨다. 1956년 결성 당시 15개 조합, 가맹 인원수 440명. 조직화율은 낮지만 타오카가 구상한 저변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개선-물론 그 연장선장에는 야마구치구미의 발전이 있는 거지만-의 돌파구는 잡힌 셈이다.

 

한편 타오카 카즈오가 부회장을 맡은 전항진(전국항만하역진흥협회)은 항만 하역계의 다층적 하청 구조가 해소되도록 운동을 벌였고, 1959년 3월 항만운송사업법 개정을 실현시킨다. 즉 일정한 예외를 빼고 2차 하청을 금하도록 한 것이다. 항만 하역 노동자 모두가 저변이 된 셈. 타오카 카즈오는 항만 노동계의 저변을 끌어올려 그 프레스티지를 한층 더 향상시켰다. 말하자면 코베항의 오야붕에서 코베의 오야붕으로 크는 계기를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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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타오카는 또 하나의 시노기에서도 만만찮은 실력을 선보인다. 연예기획사 "코베연예사(神戸芸能社)"의 운영이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11) ~ 노미야(ノミ屋)】

 

이른바 폭대법(暴対法, 폭력단 대책법)이 제정되고 각 지자체마다 폭력단 배제조례를 잇따라 제정함에 따라 야쿠자들은 합법적인 시노기(돈벌이 수단)에 종사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죠. 요새 야쿠자들에게 남겨진 시노기는 불법 밖에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유흥주점이나 파칭코집 등 나와바리 안에 있는 가게의 치안을 지켜 주는 요진보(用心棒)가 있죠. 아니면 매춘 관리업, 각성제나 대마초 등 불법 약물을 파는 드럭 판매업 등등 일반인이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일이 야쿠자가 종사하는 시노기의 대표격이죠.

 

그런데 또 하나 야쿠자의 시노기로 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노미야(ノミ屋)"인데요. 일본어를 아는 분들 중에는 "응? 야쿠자가 이자카야나 운영하는 건가?"라고 신기해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노미야는 술집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야쿠자가 돈을 벌기 위해 종사하는 '노미야'라고 하면 보통 경마나 경륜 등 공영 도박에 대한, 말하자면 "참가 대행업"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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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마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마권을 사고 싶은데 경마장도 장외발매장도 근처에 없고 온라인 구매도 어렵다 할 때 노미야에 전화를 걸어 마권 구매를 의뢰하는 거죠. "오늘 나카야마 경마장, 제10경주, 단승식 3번을 1,000엔, 연승식 3-5, 3-9를 각 1,000엔만 부탁해요"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노미야가 노미야(일본어로 "마시는 가게"라는 어감)인 까닭은 거기서부터입니다. 노미야는 구매를 의뢰받은 내역을 보고 적중될 확률이 크지 않으면 마권을 안 사고 "술집 가서 한잔 마시는" 거죠. 다시 말해서 적중되지 않을 마권(즉 거의 모든 마권)의 구매를 대행한다 해놓고 실제로는 마권값을 그대로 자기 지갑에 넣는 겁니다.

 

이 때 주의할 것은 노미야를 운영하기 위해 특별한 비용이 안 든다는 점. 노미야는 손님한테 별도 수수료 등을 징수하지 않습니다. 또한 노미야는 경마 경기를 개최하는 비용도 안 내죠. 그래서 일본중앙경마회(JRA)는 마권 판매액의 25% 정도를 먼저 빼고 남은 금액을 배당금으로 돌려주는 반면, 노미야는 그런 비용부담이 없기 때문에 중앙경마회가 정식 산출한 배당률보다 높은 배당률로 배당금을 환불해준다네요. 아예 불법한 업체에 마권 구매 대행을 의뢰하는 리스크를 감안하면 공식 주최자가 제공해주지 않는 '스페셜' 서비스가 있어야지 장사가 될 것 같죠.

 

그런 의미에서는 손님이 당장 종잣돈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대신 내주며 적중시켰을 때 배당금은 바로 주는 등 각종 혜택도 제공해 준다네요. 노미야 말고도 야쿠자가 운영에 관여하는 집은 요금만 제대로 주면 "고객 만족도"는 높은 편이라는 이야기가 있죠(단 야쿠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요새는 단기간에 손님의 지갑을 비운 뒤 가게를 옮기는 식의 질이 낮은 야쿠자가 많아지고 있답니다). 노미야 역시 종잣돈만 확실히 지불하면 공영 발매소보다 훨씬 편한 경마 라이프를 제공해주죠.

 

이렇게 말하면 노미야하고 이용자의 윈윈 관계가 잘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뭐냐 하면 일본어로 말하는 "万馬券(만바켄)", 즉 100엔 사서 10,000엔을 넘을 정도의 고액 당첨이 날 때입니다. 적중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배당률은 대박인데, 이는 노미야가 손님에게 고액의 배당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삼연단(三連単, 1착에서 3착까지 적중시켜야 당첨됨) 같은 아예 적중률이 낮은 방식의 마권에 소위 말하는 오오아나(大穴, 잘 달릴 것으로 예상한 이가 거의 없어 인기가 없는 말이나 그 번호)가 포함되면 말 그대로 대박이 납니다. 아주 드문 케이스지만 100엔의 마권이 10만 엔을 넘는 일도 없지는 않고요.

 

노미야는 이게 무서운 겁니다. 물론 종잣돈 액수가 크지 않으면 만약의 경우가 일어나도 손해는 크지 않지만, 인기 없는 말에 큰 액수를 건다고 히면 긴장되죠. 그래서 노미야에 따라 삼연단은 접수 안 한다든지, 배당률 상한을 설정하는 데도 있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큰 액수를 걸 때에는 야쿠자하고 관련된 곳에서 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죠. 인터넷으로 마권을 살 수 있는 지금, 꼭 노미야를 이용할 필요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죠. 마권은 경마장에서 직접 사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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