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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일의 주변 상황 

독일은 ‘전쟁’으로 건국한 나라였고, 중부유럽이란 지정학적 특성상 주변국가와 늘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다. 미, 중, 러, 일에 포위된 한반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독일은 러시아, 프랑스, 오-헝 제국, 영국에게 완벽히 포위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국가를 발전시키거나 국가가 성장하려고 한다면, 주변의 이익과 충돌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궁극적인 해결책은 ‘전쟁’이나 ‘무력을 기반으로 한 외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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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유럽지도

 

문제는 독일이란 나라의 체급이 주변국들을 압도할 정도로 크지 않기에 전쟁은 언제나 ‘단기결전’으로 치러야 했다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이란 나라의 체급 한계로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쟁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장교들의 ‘자질’에 엄청난 집착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육군대학이 나오게 됐고, 독일 장교하면 떠오르는 ‘장군참모’, ‘임무형 지휘전술’이 나오게 된 거다. 

 

2. 군대 문제 

자, 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직후의 독일로 돌아가 보자. 군대는 독일사회의 근간이다. 그런데, 이 군대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10만 명으로 제한됐다. 더 큰 문제는 장교의 숫자였다. 

 

4천 명으로 제한된 숫자(여기서 공군창설요원 500명과 군의관, 수의사들을 제외하면 3천명 남짓이었다)는 독일 장교들에게는 ‘생계’와 직결된 문제였다. 물론, 그 덕에 가리고 가린 똑똑한 장교들만 군에 남았다 하지만, 역시나 수적으로 부족한 건 사실이다. 

 

이런 그들이 가장 원한 건 뭘까? 간단하다. 10만으로 제한된 베르사유 조약을 철폐하고, 재군비 선언을 하는 거였다. 히틀러는 이 소원을 들어줬다. 물론, 중간에 ‘돌격대’와의 교통정리가 필요했지만, 히틀러는 룀을 제거함으로써 독일군 상층부의 불안감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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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돌격대 지휘관 룀.

한 때는 누구보다 격의 없이 친했던 둘.

 

(이 부분을 따로 짧게 설명해야겠는데, 독일군의 중추는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프로이센 장교들이었다. 문제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독일 군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묘하게 바뀌었다는 거다.

 

“독일이 프로이센 주 하나만의 나라도 아니고, 이제 프로이센군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독일 국방군이 돼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프로이센 장교단들 대신, 보다 폭넓게 장교들이 진출해야지.”

 

라는 독일국방군에 대한 생각들이 오갔다. 여기에 돌격대들이 들고 나오니... 이걸 히틀러가 단번에 수습해 버린 거였다)

 

여담이지만, 군대는 히틀러가 죽는 그 순간까지 풀지 못한 숙제였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뼈 속 깊이 각인 돼 있는 독일 장교들의 엘리트 의식과 귀족주의를 타파하긴 어려웠다. 실제로 히틀러는 군부를 다 장악하지 못했고, 뇌물을 준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장군들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까놓고 말해서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완벽히 장악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를 지지하는 독일 국민들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3. 당대의 상식적 선택과 결과 

그다지 정보가 많지 않은, 당시 평범한 독일 소시민이었다고 생각해보자. 1930년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굴 지지할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히틀러는 1930년대 독일 국민들에게 제대로 ‘실력’을 보여줬다. 여기에는 운도 따랐지만, 어느 정도 히틀러의 능력도 작용했다고 본다. 가장 큰 성과는 역시나 경제 분야였다. 

 

1924년부터 1929년 사이의 독일경제는 ‘짧은 회생’의 빛을 보였다. 프랑스가 배상금을 받겠다고 루르 지역을 점령하면서 국제여론이 나빠졌고, 미국의 동정여론이 일었다. 배상금을 조정해 주자는 말이 나왔고, 미국의 투자가 이어졌다. 물론, 이 투자들은 다시 배상금 상환으로 돌려졌지만, 독일 경제에 돈이 돌았다. 이 돈을 바탕으로 독일은 폴란드와 관세전쟁을 할 정도의 여유를 부렸다. 베를린에서는 미국 재즈가 울려퍼졌고, 실제로 꽤 살만해졌다. 그러다 누구나 다 아는 <대공황>이 터졌다. 

 

이 부분을 잘 살펴봐야 하는데, 경제적으로 살만해 지는 순간 독일인들은 상당히 상식적으로 투표를 했고, 정상적인 판단을 내렸는데... 경제적으로 무너지자 비상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 거다. 그 결과, 히틀러와 나치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집권하고 나서이다. 분명한 건 히틀러가 단순히 독재자로서 권력을 휘어잡고 독일 국민을 통제한 것만은 아니란 거다. 국민들이 지지할 만한 ‘성과’를 내보였기에 국민들이 그를 지지했던 거다.

 

1933년 이후 몇 년 사이에 히틀러는 그 경제적 성과만으로도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그 성과는 3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으로 외교적으로 인정받았고, 폴란드 점령... 그리고 1940년 5월 프랑스 점령 직후에는 거의 ‘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경제, 외교, 전쟁 모든 면에서 히틀러는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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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유럽지도. 

제일 위의 1910년 지도와 비교하면 감이 온다. 

 

 

4. 복지왕이었던 남자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히틀러는 복지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인물이다.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정에 대한 지원을 대폭적으로 늘렸는데, 가난한 가정에게는 식료품, 우유, 의류, 침구를 제공했다. 1935년에만 118만 가정 476만 명이 지원을 받았다.

 

농촌에는 농번기에 맡길 수 있는 탁아소도 설치했는데, 1934년에 600개였던 것이 1941년에는 8,700개, 1943년에는 11,000개로 늘었다. 놀라운 건 집권 첫해부터 감세 정책에 들어갔다는 거다. 1933년에 중앙과 지방 합쳐서 10% 가까이 감세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수는 계속 늘어났다.

 

600만에 달하던 실업자 수는 200만 이하로 떨어졌고,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싼 값에 이동이나 식사, 숙박, 여행 가이드가 포함된 1, 2주간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이 값싸게 해외여행을 갈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이밖에도 축제나 포크댄스를 즐길 수 있고,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독일은 비수기 때 패키지 여행으로 최대한 여행 가격을 싸게 만들어서 노동자들을 해외로 돌렸다. 한 사람당 34마르크로 알프스 지역을 10일간 여행할 수 있었다. 34마르크면 탄광 광부의 5일치 임금 정도였다. 가족동반도 가능하며, 가족동반시 보조금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여행 비용을 일시불로 내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위해서 적립금 제도를 만들어서 봉급에서 공제하는 형태로 여행을 유도했다. 노동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히틀러 만세’였다)

 

라디오가 싼 값에 보급됐고, 1000마르크(400달러)짜리 국민차를 만들어 보급하겠다고 약속했다. 1933년부터 1938년 까지, 나치는 3000km에 달하는 아스팔트 도로를 깔면서 도시와 도시 사이를 견고하게 이었다. 나치는 개인 회사의 건설이나 재건축을 허가하고, 산업이나 농업에 관한 사업을 확장하는 사람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도 주었다.

 

히틀러의 복지정책은 숫자로도 잘 나타났는데, 집권 직전해인 1932년 독일 정부가 독일 국민 1명당 사용한 복지비용이 185마르크였는데, 1935년 독일 국민들은 1인당 210마르크의 복지 혜택을 누리게 됐다. 

 

여기에 베를린 올림픽이 더해졌다. 그동안 프랑스와 영국 등 승전국들에게 치이고, 동쪽의 폴란드 같은 ‘듣보잡’들에게 무시당했던 독일이 전 세계에 자신의 건재함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이라고 해야 할까. 

 

이 정도라면...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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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없이 신에 가까웠던 남자 

물론, 여기까지 가기 위해서 들어가야 할 ‘재원’이 문제였다. 독일 국민들을 위한 ‘복지’, 여기에 더해 ‘재군비’까지 하려니 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6년부터 독일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됐다.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올 돈도 부족했다. 

 

문제는 재군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이미 돌아갈 수 없게 됐다는 거다. 군대에 돈을 쓴다는 건 그 자체로 재생산을 포기한다는 거다. 군대가 유일하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건 전쟁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약탈경제’로 이행하는 거였다. 

 

1938년 봄과 가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 위기(그리고 뮌헨협정에 의한 극적인 타결)의 이면에는 결국 상대국가의 재산을 약탈하기 위한 절박함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재군비로 확장된 군대는 ‘전쟁’을 통해서만 이득을 만들 수 있다. 이때쯤이면 히틀러와 나치당은 4개년 계획을 통해서 원자재 확보와 대체품 생산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고(괴링이 주도했으니...) 결국은 전쟁밖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무조건 ‘나쁜’건 아니었다. 1940년 5월에 있었던 ‘낫질작전’으로 단 4주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거다. 아버지 세대가 4년이 넘게 헤매면서도 결국 얻지 못했던 승리를 아들 세대는 불과 4주 만에 이뤄낸 거였다. 

 

이때가 아마 히틀러의 절정이었을 거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에게는 히틀러가 한없이 신에 가까운 존재로 보였을 시기이다. 분명한 건 이때까지 독일 국민들 눈에 히틀러는 영웅으로 보였다는 거다. 실업을 해결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만들었으며, 복지정책을 펼치면서도 경제회복과 발전을 꾀했다. 그 사이 독일이란 나라의 자존심을 세웠고, 빼앗겼던 땅을 외교 정책으로 회복했으며, 전쟁을 통해 20년 전에 겪어야 했던 패배를 설욕했다. 덤으로 유럽의 패권국으로 자리 잡게 됐다. 

 

당대,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야말로 영웅의 모습이 아닐까?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약탈경제로 돌아가는 경제였지만 독일 국민들 눈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았을 게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국민들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준, 유일무이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 빛이 너무 강해 어둠이 보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한 발만 어긋나면 그대로 무너지는 모래성이란 사실은, 몇 년 뒤에야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영웅이었다. 독일 국민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일그러진 영웅. 

 

우리가 당대의 영웅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