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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30대 초반의 어느 날이었다. 택견전수관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강무사 이름의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백제 무술을 계승하는 강무사란 사람입니다. 고 신한승(故 辛漢承, 1928~1987) 선생과 의형제였는데, 선생을 한번 뵙고 싶습니다.”

 

필자는 모르는 사람은 잘 안 만나기 때문에 평소 같았으면 정중히 거절을 했을 텐데,  필자와도 인연이 깊은 신한승 선생과 의형제라니 필자가 감히 만남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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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승 선생(왼)과 필자의 스승 송덕기 옹(오)

 

신한승 선생은 필자의 스승이신 송덕기(宋德基, 1893~1987) 옹과 동시에 택견의 기능보유자가 되신 택견계의 가장 중요한 어른이셨던 분이다.

 

 

백제 무술의 마지막 계승자, 강무사

 

우리는 서울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보기로 했다. 며칠 뒤, 만나기로 한 찻집에 도착해 들어서는 순간 전혀 안면이 없었던 분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강무사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외모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검은색 도포에 긴 머리를 동여매고 옆에는 검(劍)으로 보이는 기다란 물건을 천으로 감아서 세워 놓고 있었다. 필자는 손님도 별로 없는데 구석진 모서리 쪽 테이블에 앉아 계신 것이 불편해 보여 중앙의 넓은 곳으로 옮기자고 말씀드렸다. 강무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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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사. 필자와 만났던 전통찻집에서의 사진은 아니나 여기서도 역시 옆에 검은 천으로 감아진 기다란 물체가 있다.

 

“안됩니다. 언제 적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니 무사는 항상 시야 확보가 좋은 모서리진 부분에 앉습니다!” 

 

필자는 순간 당황했다. 학창 시절에 즐겨 읽던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황이 실제로 연출된 것이다. 필자는 평생 무술을 연마하면서도 실생활에서 무협지에서 할 법한 이런 생각을 해보거나 실행해 본 적이 없었다.  

 

첫 만남부터 필자와 강무사는 무술 전반에 걸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필자와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여기저기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무예계의 넒은 인맥과 많은 정보를 얘기해 주었다. 

 

그렇게 강무사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필자보다 훨씬 연장자인 만큼 필자는 항상 깍듯이 예의를 다해 대했다.   

 

하루는 ‘백제신검(百濟神劍)’이라는 상호로 도장을 열었다고 연락이 왔다. 필자는 개업 축하 선물을 사들고 서울 보문동에 있는 도장으로 찾아갔다. 신설동 로터리 근처의 허름한 건물 2층이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철로 된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출발 전에 통화를 했던 터라 안에 계실 것 같아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랬더니 문이 빼꼼히 열리면서 강무사가 문틈으로 필자인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보통의 무술 도장이라면 관원모집을 위해 문을 아예 열어놓거나, 닫아도 방문자가 잘 보이게 한다. 그런데 새로 개업한 도장의 문이 잠겨있으면 어떡하냐고 물었더니 강무사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언제 적의 기습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문을 이중으로 잠그고 있어야 하네!”

 

늘 무림(武林)에서 사는 듯 한 강무사의 그런 삶에 은근히 매력을 느끼고 있는 필자였지만 짓궂은 마음에 재차 물었다. 

 

“문의하러 온 척 들어왔다가 갑자기 자객으로 돌변할 수도 있잖아요?”

 

강무사는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필자의 바로 머리 위의 천정에 커다란 그물망 같은 것이 보였다. 강무사가 옆에 늘어져 있는 줄을 만지며,

 

“이걸 당기면 저 그물이 바로 자넬 덮치지. 어디 한 번 땡겨줘?!”

 

이 외에도 필자와 강무사는 20년이 넘게 만남을 지속하면서 많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런 강무사에 대한 무예계의 평가는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 어찌 보면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강무사는 백제 무술을 정말 사랑하고 지키려는 전통무예인이자 한 분야에 몰두한 예술가라는 생각이 필자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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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술을 선보이는 강무사

 

본명은 강영오(姜永梧)인데, 본인 스스로는 강무사라 불리길 원했다. 백제 무술에서 최고 등급이 무사(武士)이기 때문이다.

 

 

강무사의 삶

 

강무사는 1950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누구는 안 그랬겠느냐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일을 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살아갔다. 그러다 14세가 되던 어느 날,  강무사는 백제 무술 제46대 계승자라는 ‘삼랑도인(三郞道人)’을 만나게 되며 본격적인 무술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백제 무술은 백제의 마지막 장군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 ?~689) 장군’이 망한 백제국을 일으키기 위해 지금의 강원도 영월, 태백산 지역에서 백제 유민들 수천 명에게 무술을 수련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말기 태백산에서 은둔 수련하던 ‘청뢰도인’이 ‘길천도인’에게 전수했고, ‘길천도인’은 ‘삼랑도인’에게 전수하며 백제 무술의 명맥을 이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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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사가 주장한 백제 무술의 계보

 

강무사는 삼랑도인의 제자가 되며 10년 동안 태백산에서 백제 무술을 연마했다. 토굴에서 살면서 온갖 혹독한 수련을 했으며,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산삼이나 약초 등을 캐어 팔아서 생활을 했다. 

 

함께 전수받던 다른 제자들이 모두 사망하여 백제 무술의 유일한 전수자가 된 강무사는 삼랑도인의 뒤를 이어 백제 무술의 47대 계승자가 되었고, 48대 계승자를 찾아 백제 무술의 맥을 잇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백제 무술의 후계자를 찾는 강무사를 취재한 한겨레 기사 링크). 

 

48대 계승자가 될 만한 제자를 찾았다며 몇 번 필자에게 소개도 해주곤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두 흐지부지되어 버리곤 했다.  

 

강무사는 나름 여기저기 도움을 받아 도장도 만들어보고, 백제무술 시연회를 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 때문에 오히려 빚만 쌓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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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상에 강무사가 아주 돈을 밝히는 사람이라고 폄하해 놓은 글도 있는데, 그가 돈에 욕심이 많아 부를 축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강무사의 백제 무술

 

백제검술에는 기본검 7자세와 기본 7행검, 도행 12검 등 고유한 검술수련 방법이 있는데, 비교적 짧은 검을 사용했던 우리 민족의 특징대로 한 손으로 검을 쓰며 특정한 투로(鬪路)가 없이 자유자재로 검을 잘 다룰 수 있도록 동작을 반복하는 수련체계를 가지고 있다.

 

시리즈 16번째 기사 <무예에서 진짜 실전이란 00이다 링크>에서 밝혔듯이 필자의 취미생활은 검술수련이다(편집자 주- 필자는 검술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만큼 검술에 조예가 깊다). 검술 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검술을 배워보고 싶어 여러 명의 검사(劍士)들을 만났다. 그런데 대부분이 일본의 검도나 중국의 검술을 차용하여 한국화시킨 검술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세련된 디자인의 멋진 검을 들고 하까마(はかま:일본 옷의 겉에 입는 주름 잡힌 하의) 스타일의 도복을 입고 검술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은 대부분 일본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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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마 스타일의 도복들

 

일본은 ‘거합도(居合道)’라고 하여 칼을 뽑는 순간부터 다시 칼집에 집어넣는 것까지 모든 것을 체계화시킨 세련된 검술을 추구한다. 앉은 상태, 일어선 상태 등 각종 상황에서 신속한 발도(拔刀)-공격(攻擊)-납도(納刀) 등의 수련은 물론이고, 일본도를 패용한 상태에서의 예절과 마음가짐 등 진검의 모든 것을 수련하는 체계화된 과정이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칼 자체를 우상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았으며, 체계적인 유학(儒學)은 있었던 반면, 군인들 외에는 체계적인 검술 수련을 하기 힘들었을 정도로 검술 수련 장소나 내용이 대단히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의 검술은 조선의 질그릇 같이 약간은 투박하고 소박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강무사의 백제검술은 그동안 필자가 연구 결과로 얻은 한국형 검술과 가까웠다. 우선 복장과 검의 디자인이 기존의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움직임과 학습체계도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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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검술을 선보이는 강무사 

 

그런데도 강무사가 학력이 짧고 말주변도 없는 데다 가진 것도 별로 없다 보니 모두들 이상하거나 재미있게만 볼 뿐, 강무사가 계승한다는 백제 무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필자와 같이 강무사를 잘 이해하는 전통무예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다들 제 코가 석 자이니 그런 어려움을 알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었다.  

 

 

2019년, 백제 무술의 명맥이 끊어지다

 

2019년 11월 28일, 강무사의 전화번호로 필자에게 전화가 왔다. 

 

“저, 강무사의 동생인데요, 형님이 사망하셨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필자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키도 작고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70세의 연세에도 누구보다 건강하고 날랜 몸으로 며칠 전에도 필자의 택견전수관에 오셔서 한참을 얘기하다 가셨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강무사는 경기도 양평에 있는 조그마한 폐교를 빌려 ‘백제검술연구원’을 운영하며 홀로 살고 있었는데, 밤에 술을 먹고 들어오다가 계단에서 쓰러졌던 모양이다. 빨리 발견되었다면 살 수도 있었는데, 하룻밤이 지나서야 마을 사람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왔을 때는 이미 심정지가 된 상태였다고 한다. 

 

필자는 제자인 황인무 선생과 함께 양평의 병원으로 달려가 강무사의 동생을 만났다. 연락할 곳을 몰라 평소 형님에게 자주 들었던 지인들 몇 분에게만 연락을 했단다. 올 사람들도 별로 없고 자신도 사정이 넉넉지 못하여 장례식장은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지막 백제 무사는 그렇게 쓸쓸하게 시체안치실에 누워 있었다. 

 

강무사의 갑작스런 죽음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지만, 이렇게 전통무예의 한 맥이 끊어져 가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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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백제 무술을 선보이는 강무사. 오른쪽 사진은 전통활쏘기 투궁술의 앉아쏴 자세이다. 

 

솔직히 백제검술이 흑치상지 장군이래로 46대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삼랑도인 등의 도사가 정말로 실존했는지 필자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우리 민족 검술에 대한 필자의 연구 결과가 맞는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검술을 10년을 넘게 산속에 살면서 익혔고, 그것을 평생 수련했으며, 아직까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검술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연구의 대상이기에 우리는 관심을 가졌어야만 했었다. 그는 백제 무술을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무관심 속에 강무사를 끝으로 백제 무술은 그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필자가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전통무예를 지키려고 애쓰는 전통무예인들이 어려운 상황에 허덕이다 쓰러져 버리고 있지 않을까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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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사와 그가 그린 소나무 그림들

 

 

 

강무사가 나온 몇 가지 기사들

 

(1) 시사인 / 백제 검 휘두르는 ‘마지막 싸울아비’ → 링크

(2) 한겨레 / “흑치상지 맥이을 ‘48대 무사’ 찾습니다” → 링크

(3) 뉴스메이커 / 전통 무술 백제 검술의 맥을 잇다 → 링크

(4) MK스포츠 / 세상에 이런일이, ‘신출귀몰’ 백제무술 계승자 등장 → 링크

(5) 뉴스프리존 / 강영오 무사, '철판 썰어버리는 괴력~'(무술총연합회 송년의 밤) →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