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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수요일


임종금


 


 


 


0. 들어가는 말


 


오랫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린다. 앞으로는 쉬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꾸준히 연재를 지속해 나가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1905년을 지나면서 갑자기 써야 할 내용들이 많아졌다. 사방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나고,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면서 역사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 과거에는 어떤 사건 단위로 기사를 전개하면 되지만, 이 시기를 지나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사건 단위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양상,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다. 조금 재미없을지라도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다.


 


이번 5~6편에서는 의병전쟁을 중심으로 풀어보겠다.


 



1. 1906년~7년 의병들의 현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다시피 활빈당과 같은 민중조직이 의병투쟁에 뛰어들면서 전국 곳곳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병장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산을 처분하여 의병을 일으켰지만, 곧 심각한 문제에 닥치고 만다. 바로 자금과 식량의 부족이 그것이다.


 


의병활동은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다. 돈을 털어 의병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 의병들을 유지할 엄청난 비용이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의병들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이것을 어렵게 해결해 나갔다. 양반들이 중심이 된 의병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어려우면 친척이나 문중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일부는 고종 황제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군비를 지원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과 같이 평민이 주동이 된 의병들의 경우에는 문제가 여의치 않았다.(신돌석의 본명은 신태호이다. 그는 완전한 평민이라기 보다는 몰락한 중간계층에 가까웠다. 그의 할아버지는 사또 밑에 향리를 하였고, 그는 양반들과 함께 나름대로 글 공부도 하였다. 2편의 시도 남겼다고 하니,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돌석 생가


 



신돌석 부대는 양반들과는 철저히 괴리된 부대였다. 신돌석의 부하 수백 명 가운데, 양반은 단 3명 정도였고, 그나마도 나중에 이탈하였다. 신돌석이 군자금을 모으려면 ‘빼앗는’ 방법 말고는 없었다. 신돌석 부대의 최초 공격대상은 울진 읍내였다.


 


특별한 방법 따위는 없다. 울진 읍내에 들어가서, ‘우린 의병이야!’라고 외치고, 부유한 집안에 들어가서, 돈을 빼앗는 것이었다. 그 수 말고는 다른 방법이 딱히 없었다. 문제는 양반집을 털어도 수백~수천 냥씩 턴 것이 아니라, 고작 수십 냥에 불과하였다. 당시 화폐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100냥을 털었다고 해봐야 현재 돈으로 1000만원도 안 되는 돈이다. 이런 푼돈을 매일 같이 털면서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참으로 고달프게 의병활동을 이어나갔다.


 


이걸 그대로 두고 볼 진위대(대한제국 지방군대)가 아니었다. 신돌석 부대, 아니 거의 모든 초기 의병부대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대한제국 군대와 먼저 싸웠다. 의병들은 토호와 대부호, 친일파를 척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의병들은 고종 황제가 돈을 처발라서 마련한 철도, 전기 시설 등을 공격하였다. 이 시설들이 바로 일본군의 병참시설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서, 지역 행정기관 등을 공격하였는데 역시 이들 행정기관들은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일제의 거점이 될 것이 자명했다.


 


반면에 진위대와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행정기관들과 시설들이 박살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의병들이 먼저 닥친 것은 진위대와의 일전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직속의 친위대가 가세하여 의병토벌에 나서는 경우도 있었다.


 



대한제국 군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둘 사이의 교전으로 큰 희생이 나지는 않았다. 이는 일단 대한제국군의 작전 숙련도가 미흡한 것도 있었고, 서로 ‘몰살시켜야 한다!’는 잔혹한 마음을 먹지 않은 것도 있었고, 또한 전투 규모 자체도 대규모가 아니라 수십 명이 적당히 총질하는 수준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군자금을 마련한 의병은 그 돈으로 식량을 사고, 의복을 샀다. 의병들에 의한 민가 약탈은 거의 없었다. 의병들 자체가 가난한 민중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민중을 공격하면 의병들의 지역 거점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의병들이 오랫동안 일본군과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의 끊임없는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민중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민중들을 위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신돌석 부대는 일본 어민들을 공격하였다. 당시 일본 어민들은 근대적 어업기구를 이용하여 한반도 연근해 어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어민들은 조선 어민들보다 10배 이상 수입을 올렸다. 신돌석 부대는 일본 어민들을 공격하여, 경북~강원도 동해안의 어업권을 조선 어민들에게 돌려주려 하였다. 또한 일본의 위세를 업고 있는 친일파와 농민들의 착취하는 대지주, 그리고 개화파 관리들을 공격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힘이 강해진 의병부대들은 1907년 무렵에 이르면, 사실상 대한제국이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이미 군청은 의병부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고을의 수령들은 의병들에게 끌려나와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의병들은 그래도 ‘황제가 파견한 관리’인 수령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하위 관리들은 가끔 의병들에게 살해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대개 ‘개화파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전후로 일제는 대거 개화파 계열의 인사들로 행정기관을 채웠다. 누차 얘기했듯이 개화파 계열의 사람들은 일본을 우러러 보았으며, 일본에 대한 경계가 매우 약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이게 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다.’라는 구실만 붙이면, 개화파들은 언제든지 마음을 여는 집단이었다. 그래서 곳곳에서 중하위 관리들의 죽어 나갔다.


 


대한제국 군대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의병들의 힘이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 많은 의병을 입고 먹일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의병들의 은신처인 산악지역에서 그 많은 의병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진영을 꾸리기도 어려웠다. 사는 게 고달픈 의병들은 상황에 따라 부대원들의 숫자를 조절하였다. 식량이 없으면 일부는 집에 돌려 보내기도 하였고, 일부는 따로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활동을 멈추기도 하였다.


 


의병들은 대규모 작전을 펼치지 않았다. 흔히 말해서 ‘전 병력 올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항상 병력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 놓았으며, 작전시에는 그 가운데 한 진영의 군대만 움직였다. 혹은 의병장이 별동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규모 작전은 전면전을 뜻하고, 전면전을 해서는 근대적 무기 앞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의 전투 방법은 게릴라식 전투이다. 밤에 야습을 하거나, 매복을 하거나, 후미를 기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기동성이 매우 뛰어났다. 애초에 큰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고, 좁은 산길과 지름길을 통해서 이동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신돌석은 그 활동 무대가 경북 동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충청북도~강원도~대구~경주까지 활동을 하였다. 다른 의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로 구역이 정해진 것도 아니니 활동할 수 있는 만큼 자유롭게 행동반경을 조절했다. 이것은 의병들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의병들의 무장은 형편 없었다. 일단 사람 숫자보다 총의 숫자가 적었다. 물론 그 총도 대부분 화승총에 불과하였다. 조총의 개량형이라고 할 수 있는 화승총은 격발한 지 2~3초가 지나야 총알이 나가고, 비가 오거나 화약이 물에 젖으면 애초에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총탄과 화약을 갈아 끼우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숙련자라고 해도 연발은 불가능 하였다.


 



조총. 이런 걸 들고 싸웠다는 얘기


 


양반 의병들은 돈으로 서양식 총을 몇 정 구입하기도 하였으나, 평민 의병들이 서양식 총을 만져볼 수 있는 방법은 경찰서나, 진위대 본부를 습격해서 노획하는 방법이 유일하였다. 그러나 정규군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만 분파소나 분견소 같은 곳을 공격하였다. 이곳은 오늘날로 치면 파출소 정도의 경찰 조직이었다. 이런 곳을 야밤에 기습포위하여 습격하고, 서양식 총을 한 두 정 건지는 것이 조달 방법이었다.


 


1906년까지 의병들은 일본군과 대규모로 교전하기 보다는 진위대와 대한제국 경찰들, 일본 경찰·헌병들과 싸웠다. 1907년이 되면 일본군이 점차 늘어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병들은 본대와 떨어져 있는 일본 헌병들이나 소규모 분대 단위의 일본군들을 공격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렇게만 보면, 당시 의병활동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법도 하다. 별 것 아닌 유격대들의 집합체에 불과해 보일 수도 있다. 실상 그런 측면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숫자이다. 전국에서 이런 의병들이 수백 곳에서 거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지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호남에서부터 함경도까지 골고루 의병들이 일어났으며, 토벌도 쉽지 않았다.


 


일제의 입장에서 더욱 골치 아픈 것은 의병들로 인해서 사실상 지방 행정이 완전히 붕괴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 식민지화를 위해서는 행정조직을 빨리 재편하고, 행정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의병들은 전혀 주지 않았다. 의병들이 있는 지역에서는 수령이 납치되고, 관리가 죽고, 행정기관들이 파괴되고, 철도나 도로·전신이 파괴되며, (일제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징세기능이 멈춰 버렸다. 한반도에서 경제력을 뽑아내어 만주와 대륙까지 진출해야 하는데,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이다.


 


1907년, 일제는 결단의 칼을 뽑았다. 원래 러일전쟁 당시 한반도에 주둔한 ‘한국주차군’을 늘려 2개 사단 규모로 하였다. 1908년을 지나면 2개 사단 외에도 1600명의 정예군을 추가로 증파하였다. 이 외에도 헌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7년 당시 헌병들의 숫자는 2400명에 불과하였으나, 조선인으로 구성된 헌병 보조원을 약 4000명 뽑아, 6500명으로 증강하였다.(이 헌병 보조원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겠다.) 또한 정찰대와 탐정 등을 고용하여 흡사 ‘호랑이 사냥’ 하듯이 의병들의 근거지를 추적하였다. 그리고 일본 경찰들도 상당수 증파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빼앗기 위한 포석도 있었지만,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이렇게 일본이 대규모로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하자, 의병들도 이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전면전을 나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작은 부대 단위로 움직이다가는 대규모 일본 군대에 의해 포위당한 채 각개격파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 고종 황제와 의병


 


그러면 고종 황제는 당시 뭐하고 있었을까? 이미 손발이 다 잘린 고종 황제였지만, 아직까지 황제는 황제였다. 그것도 무려 40년 이상 왕 노릇을 한 황제였다. 나름대로 수를 생각한 것이 있었다. 바로 ‘별입시’라는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외교활동과 의병활동을 지원하려 하였다. 물론 여기서 지원하는 의병활동은 양반 의병 가운데서도 최고위급 양반 의병들을 말하는 것이다. 나머지 평민 의병들은 ‘애써 만들어 놓은 근대 시설을 깨부수는 나쁜 놈들’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고종 황제의 눈에 화적단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별입시라는 것은 황제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일제가 한양을 장악하고 있지만, 고종 황제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하기는 힘들었다.


 


고종 황제는 아시다시피 황제 개인의 힘으로 모든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다. 고종은 공개된 곳에서보다는 자신의 수족들과 함께 밀실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아관파천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공식적인 행보와 고종의 의중은 크게 차이가 있었다.


 


고종은 별입시를 부활시켜 놓고, ‘자문을 받는다.’라는 명목으로 여러 사람들을 궁중으로 불렀다. 신분은 다양했다. 양반부터 무당까지 고종을 개인적으로 면담하면서 밀명을 지시받았다. 고종은 이들을 통해 (최고위급)의병장들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고, 자신의 뜻을 알렸다. 이미 내각은 완전히 일제와 친일파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에, 고종은 별입시에 더욱 의지하였다.


 


고종의 밀명에 의해서 의병을 일으킨(물론, 밀명이 없었어도 의병을 일으켰겠지만) 대표적인 예는 민종식, 최익현, 허위, 유인석 등이었다. 민종식은 민씨척족으로 고종 황제에게 무려 10만 냥에 달하는 군자금을 하사받았다. 위에서 보듯이 신돌석 같은 이들은 하루에 고작 100냥 정도를 건지기 위해서 부호들을 털고 있는 사이, 최고위 양반 의병들은 엄청난 지원을 받은 셈이었다. (이런 괴리는 의병들이 최종적으로 통일된 전국 조직을 못 거느리게 된 원인이 된다.)


 



민종식이 살던 간지나는 집. 위의 신돌석 생가와 비교해보라.


 


또한 김승지라고만 기록된 사람은(아마 이름이 제대로 표기되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주 신분이 낮은데, 고종 황제와 친하니까 통상적으로 “김승지”라고 불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돈으로 무려 40만원을 가지고 다녔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당시 대한제국의 총부채가 1300만원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난 돈을 들고 다닌 셈이다.


 


또한 재미난 작전을 짜는 경우도 있었다. 별입시를 통해서 어느 진위대 대장에게 밀명을 내려서 ‘의병부대와 싸우면서 거짓 패하는 척 하라’고 지시를 한 것이다. 진위대 대장은 황제의 밀명대로 의병부대와 적당히 싸우다가 진지를 버리고 도주한다. 의병들은 손쉽게 진영을 함락하고, 근대적 무기와 미리 진영에서 준비해 둔 군자금을 가져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종 황제의 감독 하에 ‘쇼’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종의 밀명정치의 실체를 분명하게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밀명이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는 것이 거의 없으며, 밀명을 적은 종이도 밀명 확인 후에는 불태워 버리고, 사본을 따로 써서 의병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별입시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이 부분은 좀 더 오랜 시간 동안 연구를 해 봐야 실체가 드러날 것 같다. 혹은 안타깝게도 영원히 묻혀 버린 역사의 퍼즐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3. 일제의 대응


 


의병활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일제는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첫 번째는 ‘선유사’라는 것을 전국에 파견하였다. 선유사는 황제의 칙명을 가진 사신으로 의병장들에게 ‘이제 고마해라. 황제가 이제 됐단다.’라고 설득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보수적인 양반가문이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황제의 뜻에 충성하라’고 하면, 기세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로 촉발된 을미의병에서는 선유사가 잘 먹힌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의병들은 이미 ‘황제의 뜻’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일부 의병장들은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아 의병활동에 뛰어든 만큼 선유사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나머지 의병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표면적인 황제의 뜻은 바로 일제의 뜻이며, 내면적인 황제의 뜻은 따로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의병장들에게 선유사가 안 먹히자, 민중들에게 일제는 접근하려 하였다. 선유사들은 시장터나, 군청 골목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의병활동을 비판하면서 민중들과 의병활동을 분리시키려 하였다. 의병활동은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둘의 분리는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개신교이다. 1907년은 개신교에서 ‘평양 대부흥’을 일으킨 중요한 시점이었다.


 



평양신학교


 


일제도 개신교가 급격하게 교세를 얻는 것을 착안하여 13도 선유사 가운데 3명을 개신교 계열로 채웠다. 개신교는 현세의 상황보다는 내세를 강조하면서 민중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일제의 기대보다는 달리 선유사의 효과는 미미했다.


 


두 번째는 귀순작전이었다. 의병활동을 접고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훈방하였다. 의병활동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먹고 살기 힘들고, 막연히 현실에 불만이 컸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의병들에게 강제로 활동을 강요당한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뚜렷한 신념이나 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일제는 노렸다. 귀순작전은 겨울철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겨울이 되면 의병들은 먹을 것이 바닥나고, 산에서 지내는 것이 한계에 이른다. 그래서 의병장들은 겨울이 되면 일부 의병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음해 봄을 기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는 이 때를 노린 것이다.


 


귀순작전은 불행하게도 성공을 거두었다. 일제는 이들을 거둬들이고, 똑똑한 이들은 정찰대원이나 헌병 보조원으로 활용하여 의병들의 동태를 감시하게 하였다.


 


세 번째는 제도적 방법이었다. 조선에는 포군(포수)라는 준 군사조직이 있었다. 특히 강원도나 경상북도, 함경도 지역에서는 맹수를 잡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포수조직을 유지했다. 이들이 의병으로 투신하거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개량된 화승총이 의병에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을 통과시켜, 민간의 총을 회수하였고, 특히 포수의 총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더욱 포수들을 의병활동에 뛰어들게 하였다. 생업을 끊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포수들


 



총을 빼앗는 것이 실패하자, 일본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바로 ‘자위단’이다. 자위대가 아니라 자위단이다. 원래 자위단은 일진회와 같은 친일세력이 먼저 만들었다. 의병들에 의해서 피살된 일진회원이 무려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일진회의 피해는 극심했다. 일진회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위단을 만들었는데, 일제는 이것에 착안하여 전국에 자위단을 설치하였다. 흡사 민방위처럼 모든 남성들은 자위단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였다. 그리고 연대책임을 지워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위단은 일본 경찰과 친일적 관리들과 협력하여 의병들을 총체적으로 감시하고, 의병들에게 협력하지 못하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은 역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자위단의 간부를 맡은 일진회원과 친일파들은 완장을 차고 자위단의 이름을 빌려 민중들을 괴롭혔다. 자위단 소집이라는 이유로 마음대로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시키는가 하면, 의병들에게 협력했다는 것을 꼬투리 삼아 사람들을 학대하였다.


 


결국 일제는 이와 같은 방법들이 모두 실패하자, 최후의 카드인 ‘군사력으로 밀어 버리는’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를 위해 앞서 본 병력증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남한대토벌이라는 대살육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4. 1906~7년에 일어난 국내 다른 사건들


 


1906년은 우리 역사에서 한 박자 쉬는 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다행이다. 필자 죽어날 뻔 했다.) 표면적으로 크게 드러난 사건이 없는 가운데, 을사늑약에 의하여 통감부가 개청되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임명되었다. 6월에는 최익현이 태인에서 의병봉기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붙잡혀 순국하였다. 11월에 전국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당시 대한제국 전 국민은 978만 명이었다. 그리고 전국을 13도로 나누게 되었는데, 우리가 아는 ‘경북, 전북, 충북’등의 명칭이 이 때 등장하였다.


 


역사가 다시 들끓게 되는 것은 1907년이다. 1월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1904년 이래 제일은행권을 유통시켜 대한제국의 경제망을 흔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종 명목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큰 국채를 짊어지게 하였다. 그러면 대한제국이 이를 거부하면 되지 않느냐고 독자제위들께서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이미 1904년부터 대한제국 내에서는 일제가 파견한 고문(자문위원)들이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무자비한 지출을 감행하였고, 그 지출내용도 대게 일제가 필요로 하는 시설을 대한제국 내에 설치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채는 총 1300만원 가량. 현재 시세로 하면 얼마 정도일까? 우리나라의 화폐단위인 원은 1901년 금본위제를 실시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1원은 금 2푼( 0.2돈=0.7g 정도)의 가치로 정립된 것으로 지금 현재 금시세로 계산한다면 당시 1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3~4만 원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으니, 대강 계산해 보니 당시 1300만원은 현재 화폐로 4,000억 원 정도의 가치가 된다. 얼마 안 된다고 생각되실지 모르겠으나, 당시 대한제국에게 이 정도의 돈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이 시작하였다. 서상돈, 김광제는 모두 기업인 출신으로 일제의 경제적 침략으로 당시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진 향토 기업들은 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들 기업가들은 “국채를 갚지 못하면 계속해서 일제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할 것이고, 자신들의 존립도 위태로워 질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운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몇몇 기업가들에게서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거의 모든 언론사들의 동조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4월말까지 보상금이 약 230만원 가까이 모였으나, 일제는 이를 극렬하게 탄압했으며, 친일조직인 일진회를 통하여 체계적으로 방해했다. 최종적으로 통감부에서 국채보상기성회 간사인 양기탁을 구속시킴으로써 동력을 잃고, 좌초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이렇게 실패했지만, 하나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바로 여성운동의 시작이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신문물을 익힌 여성들이 많이 참여 하였고, 이 운동을 통해서 많은 여성운동조직들이 힘을 받게 됩니다. 물론 당시 조직된 여성조직들이 적극적으로 민족해방을 부르짖은 것은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은 현대 금모으기 운동과 비교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아직까지 국채보상운동과 주도세력은 중상류 이상의 소위 ‘배운’ 사람들이다. 기층 민중까지 이 운동이 뿌리깊게 내려가지는 못하였다. 기생들도(당시 현찰이 제법 있는 기생이 많았다.) 여기에 참여했으니 전 국민적 모금운동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기층 민중들의 당시 경제적 수준으로 이런 모금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었다. 반면 금모으기 운동은 바로 기층 민중들의 힘으로 모은 것이다. 금모으기 운동 당시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금을 더 숨기고 시세차익을 보려했기 때문에 감히 국채보상운동에 참가한 당대 기득권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07년 5월부터 7월까지 일제는 본격적인 내각개편을 시도한다. 같은 을사5적 가운데서도 대장은 박제순과 이완용인데, 박제순은 그나마 살짝 양심이 있고, 이완용은 양심을 완전 팔아먹은 개새끼이다. 박제순은 을사늑약 당시에도 도장을 찍는 데 망설이면서 머뭇거리자, 짜증난 이토 히로부미가 박제순의 도장을 강제로 뺏어 조약문에 도장을 찍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매국노 끝판 보스, 이완용


 


일제는 절대적 충성파인 이완용을 총리대신으로 내세우고, 또 한 명의 절대적 충성파인 박영효를 귀국시킨다. 박영효는 개화파로 유명하고, 고종 황제의 외가 쪽 친척이지만 초기 친일파의 대장으로 역사학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그렇게 이완용-박영효 내각을 중심으로 일제는 한일신협약(군대해산이 포함된 협약)을 준비하였다.


 


고종 황제는 이제 내각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에서 허수아비 황제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고종 황제는 마침 헤이그에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을 파견하였다. 역시 별입시의 형식으로 이들에게 밀명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고종 황제와 친밀하고 곧은 사람은 검사 출신의 이준 이었다. 특사들은 고종 황제의 밀서를 지니고 있었는데, 바로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특사들은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에 제대로 참석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네덜란드의 주선으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해 호소한다.’라는 제목의 명연설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외신에서도 이 연설을 감명 깊게 보도하지만, 이미 국제정세가 너무나 기운 까닭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헤이그에서 특사로 파견한 이준은 사망하게 되는데, 역사책에는 분사(분노해서 사망)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독살설 등이 나돌고 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부담스러운 방해물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일찍부터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사람들의 반발을 우려해서 그냥 두었는데, 이제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었다. 7월 17일에 일제는 이완용과 송병준을 시켜, 고종 황제 양위를 강요하였다. 그러자 즉각 종로에서 거대한 시위가 일어나는 등 반발이 격렬해졌으나, 일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7월 20일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내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인 순종의 즉위식을 열었는데, 이게 또 코메디다. 순종은 차마 황위에 오를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일제는 내관(내시)를 대역으로 세우고 즉위식을 마쳤다. 양위하는 고종 황제도, 즉위하는 순종 황제도 모두 없는 빈 껍데기 즉위식이었다.





고종 황제의 퇴위는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양반들과 유생들에게 “군왕을 모시지 못하고, 군왕을 치욕에 물러나게 했다”는 것은 엄청난 부끄러움이었다. 그들이 공부한 성리학은 바로 이럴 때, 충과 의의 깃발을 내세우고 일어나라고 배웠다. 일제의 고종 황제 퇴위는 이런 유림세력들이 다 일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이후 의병전쟁, 독립운동 등 민족해방운동의 역사에 있어 한 축으로 형성되었다.





7월에는 여러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또 중요한 것이 바로 ‘보안법’이다.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을 연상시키는 이 법은 일제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 만든 악법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조선과 대한제국에서는 집회가 비교적 자유로웠다. 우리가 사극에서 잘 보면 알다시피 임금의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들면 임금의 문전 앞에서도 석고대죄 퍼포먼스를 벌이고, 지방에서는 상소가 수천 개씩 날라오며(소위 스팸상소), 성균관 학생들이 임금의 길을 막아서는 등 집회를 꽤나 허용한 나라였다. 또한 성균관 학생들은 '권당‘이라는 것을 만드는데 이는 일종의 학생데모인데, 권당의 활동도 역시 거의 100% 보장해 주었다. 이렇듯 조선은 집회문화가 꾸준히 내려온 나라였다.


 


일제는 이것이 거슬렸다. 그래서 보안법과 언론을 규제하기 위한 신문지법, 출판물을 규제하기 위한 출판법을 7월에 제정된다. 다들 눈치 깠겠지만, 신문지법과 출판법은 현재의 언론탄압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보안법을 만든 것이다. 보안법의 내용을 보면서 그 명박스러움을 감상하시길 바란다.





<보안법> 1907년 통감부의 압력에 의해 제정.


① 결사·집회, 다수의 운동, 군집(群集)의 제한·금지 및 해산, ② 무기 및 폭발물 기타 위험한 물건 휴대금지, ③ 공개된 장소에서 안녕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는 언동의 금지, ④ 불온한 동작을 행할 우려가 있는 자에 대한 거주 등의 제한 및 치안을 방해하는 자에 대한 처분, ⑤ 정치에 관하여 불온한 언론·동작을 하거나 타인을 선동·교사하거나 치안을 방해하는 자는 50 이상의 태형, 10개월 이하의 금고 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보안법까지 밀어부친 일본은 7월 24일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경찰권도 일본에게 위임하고, 차관은 모두 일본인, 모든 법령은 통감부의 허가 아래 실시하는 것이다. 고종 황제 퇴위와 군대해산, 보안법 제정 등으로 반일 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가운데 대한제국 군대(당시 6000명 남짓)가 의병에 가담하면서 의병들의 질이 크게 높아졌다. 




그 외에 안창호가 흥사단을 조직하는 등 몇 가지 사건이 더 있는데, 얘기하다가 끝이 없어질 것 같다. 그냥 여기서 넘어가 주시면 고맙겠다. 


 


 



5. 1906~7년에 일어난 해외 사건들


 


우리 역사는 1907년을 기점으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해외에서는 조금 조용한 분위기이다.


 


이웃나라인 청나라는 늘 그렇듯이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서 관제개혁이니, 군제개혁을 하였다. 물론 실효성은 없었고, 각종 테러와 봉기로 얼룩지고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사실상 먹었고, 남만주철도를 차지하여 드디어 만주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리고 남사할린을 차지하였다. 특이한 것은 이 때, 일본에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되어 사회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07년에 해산 명령을 받아야 했다.


 


인도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들끓고 있었다. 스와라지·스와데시 운동을 통해 국민의회가 인도를 대표하여 영국과 대립하였다. 국민회의는 전인도회교도연맹과 제휴하여 통일전선을 이루었다.


 


영국은 노동당이 창당되었고, 미국에서는 최초의 국가규제 법안이라고 할 수 있는 ‘햅번 법’이 통과되어 철도를 비롯한 기간시설을 장악한 대기업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지네 마음대로 서아시아에서 세력권 협정을 통해 아프간·이란 지역에 진출하였으며, 프랑스는 식민지로 만든 모로코인들이 저항하자 카사블랑카를 공격하는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늘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6. 6편 예고


 


1908년~9년이 되면서 의병전쟁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는 총력을 다해서 대토벌을 시작하였고, 일제의 토벌을 피해 해외 독립운동기지들이 하나 둘씩 형성되기 시작한다. 개화파들은 애국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 시기 종교계의 활동 또한 매우 왕성해진다. 우리민족이 식민지로 떨어지기 직전, 과연 당시의 모습은 어땠는지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