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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9.금요일

 

남가좌동

 

 

 

 

 

 

 

 

 

 

 

 

편집자 주

 

 

 

게시판의 글이 3회 이상 메인 기사로 채택된 '남가좌동'님께는 가카의 귓구녕을 뚫어 드리기 위한 본지의 소수정예 이비인후과 블로그인 '300'의 개설권한이 생성되었습니다. 

 

 

 

조만간 필진 전용 삼겹살 테러식장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1. 유영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사형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점을 넘어 들끓고 있다. 잇따른 강력범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넘친 결과다. 어떤 사안에 대한 여론이 일정 수준 이상 모아지면 대개 정부의 정치적 액션이 뒤따르는 것이 인지상정. 물론 모든 액션이 실제 정책수립의 단계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단발적인 액션이 장기적인 정책수립과 법안상정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정치적 유인과 사회적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정치과정의 피드백이 심상치 않다. 어지간한 '국민의 소리'는 이웃집 개 빡치는 소리로도 여기지 않던 분들이 여론조사 몇번에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법무부 짱이 청송교도소에 사형집행시설 설치를 지시했다고 한다. 얼마 전 까지 사형 집행을 '신중하게 내부적으로' 검토해보겠다더니, 신중한 내부 검토는 벌써 다 해치우신 모양이다. 조두순 사건 직후 직접 사회적 격리를 언급했던 쥐님, 보호감호 부활을 비롯한 형법 개정 추진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딴나라당, 사형 집행을 시사하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보이고 있는 법무부 짱. 

 

 

 

 

 

 

 

 

 

 

하나의 사건을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이슈로, 그 이슈를 통해 아젠다를 설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언론의 역할이다. 세상의 모든 사건을 보도할 수는 없다. 사실판단에 앞서 그 사실의 경중에 대한 가치판단이 이루어지며, 근본적으로 이 가치판단이 언론의 당파성을 규정짓는다. 독도사태보다 김길태 사건이 보도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보수찌라시의 판단이라면, 사태를 '신중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판단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아젠다, 사회적 의제를 살펴야 한다.

 

 

 

 

 

국영방송이 특별생방송을 통해 단독범을 공개수배했다면, 판결이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했다면, 그의 모든 발언이 헤드라인을 통해 분 단위로 지상중계되고 있다면, 분명 언론은 이 사태를 이슈화하고 있으며, 어떤 아젠다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이슈와 이슈화 너머, 권력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다시 말해, 권력은 무엇을 원하는가.

 

 

 

 

 

 

 

 

2. 87년 체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여러 지점에서 분노가 조직되고 있다. 보수언론과 정권은 사형제의 부활을 일차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듯 하다. 일각에서는 EU가 사형제를 시행하는 국가와의 교역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하는 점과 엠네스티가 남한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선정했다는 점을 들어 사형을 집행하지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알려진 대로  사형은 97년 12월 30일 이후로 집행되고 있지 않지만, 장관의 사인 하나면 언제라도 집행이 가능하다.

 

 

 

 

 

민주정부 10년의 성과 중 하나는 기본적 인권에 대한 제도적 보장이 '이전에 비해' 정밀하고 섬세해졌다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국민참여재판의 도입, 보호감호제 폐지 등 법률과 제도의 정비는 87년 헌법이 전제하고 있는 절차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비록 헌재의 판결이 있은 후의 일이지만 전국의 모든 교도소 뺑끼통에 설치된 차양막은 저 섬세함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이전 정권의 누가 교도소 뺑끼통을 신경썼던가. 누가 궁둥짝 까뒤집고 볼일을 봐야하는 수용자의 인격권을 이야기했던가. 민주정부 10년의 역사적 의의는 87년 체제의 완성이며, 이는 정부와 시민사회의 성장이 함께 이루어낸 성취다.

 

 

 

 

 

문제는 현 정권의 뿌리가 87년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라는 점이다. 87년 헌법은 전형적인 현대 부르주아 민주주의 헌법으로, 자유주의-민주주의 온건 우파가 일시적으로 헤게모니를 획득한 결과물이다. 남한의 현대사는 부르주아지가 反자유주의 군부독재세력과 야합하여 자본주의 원시축적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87년 이전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전근대적 권력이었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실체적 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로 이루어진다면, 87년 헌법은 절차의 완성이었고 그 이후의 역사는 이 완성을 현실 정치로 구현하는 과정이었다.  

 

 

 

 

 

저 근대적 가치, 절차적 정의의 핵심은 '인간 그 자체로서' 가지는 권리다. 그리고 이 권리를 제한하는 가장 거대하고 항구적인 폭력은 국가의 '형벌'이다.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97년 12월 30일. 사법권력은 하루만에 스물 세 명을 살해했다. 유영철이 10개월여에 걸쳐 살해한 사람이 스물 한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살인기술을 몹시 신속하고, 정확하며, 위력적인데다, 보복의 염려조차 없다. 인혁당 사건으로 살해된 8명의 피해자. 재심 재판부는 기왕의 형벌에 대하여 사면은 차치하고, 도대체 어떻게 '복권'할 것인가? 잃어버린 생명권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3. 권력은 무엇을 원하는가

 

 

 

 

 

형벌은 권력의 양태에 따라 변모한다. 미셸 푸코가 극단적으로 잔인한 '신체형의 호화로움'을 전근대의 특징으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은, 시민혁명을 통해 '신체의 자유'가 불가침의 권리라는 인식이 근대의 일반적인 규범으로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도덕적 규범이 사회 일반의 법적 확신을 얻고 명문의 법률로 성립된다는 것은, 그 같은 규범을 '누구에게나', 즉 '일반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지금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누리고 있는 일반적 권리의 핵심은 유영철이나 조두순, 김길태 역시 누려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유는 단 하나.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법은 제도화된 권력이다. 법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며, 관계는 그 자체 권력이다. 여기서 권력의 속성이 드러난다. 근대적 성문법은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따라서 지배와 억압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권력이 조직하고 있는 시민의 분노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전두환에게 신체형을 언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이들과 똑같은 신체 상해를 그의 한 몸뚱아리에 새겨 넣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조지 부시에겐 그가 전쟁을 통해 죽인 모든 이들과 비슷한 정도의 상해를 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으며, 옮겨서도 안 된다. 나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전두환과 조지 부시에게 가지고 있는 분노의 정도가, 사회 통념상 일반적인 규범의 수준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일반적 규범의 존재는 일반적 폭력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나 법률을 개별적 사례에 적용하는 것은 저 차이에 대한 합리적이고 엄격한 절차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된 하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합의가 없이 일반적, 추상적 규율이 자의적으로 적용될 때 우리는 이를 '권력 남용'이라 부른다. 현대 사회의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 폭력이 어떤 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 20세기 내내 목도해 왔다.

 

 

 

 

 

 

 


보수 찌라시와 권력이 노골적으로 분노를 조직하고 있는 까닭은 이를 통해 국가 권력의 강화를 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선량한 시민들은 피의자의 권리, 피고인의 권리에 대해 별 다른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범죄란 사회 일반이 어떤 행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규범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평생 경찰서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이 교도소 뺑끼통에서 벌어지는 일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은 범죄자의 권리에 있어, 그것을 누리는 측에 속한다기 보다는 그것을 허용하는 입장에 서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이 아닌 비상, 권력이 민주적 합의의 범주를 이탈하기 시작할 때, 분노의 향배가 일정치 않을 때, 권력이 시민들의 분노를 가장할 때, 시민들은 범죄자가 되고 범죄자의 권리는 대다수 선량한 시민의 권리가 된다. 우리는 지금 한 목소리로 분노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라는 집단은 한없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전술한 바, 분노는 개별적으로 분포하지만, 강대해진 권력은 일반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형제와 함께 부활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호감호제는 권력의 최종 목표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호감호제는 빵에 쳐넣는다는 점에서 자유형과 동일하지만, 양형 등에서 형벌에 비해 법관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가 크다. 게다가 이 제도는 실질적으로 형벌 이후의 형벌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위헌시비가 일지 않았던가. 보호감호제의 부활은 국가 형벌권 비대화의 신호탄이 될 것이다. 청송감호소가 청송교도소로 바뀐 지 5년. 전두환이 만들었고 노무현이 없앤 보호감호제가 이명박에 의해 다시 돌아온다. 촌빨 날리는 저 복고풍 권력은 끝내 자유주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것일까.

 

 

 

 

 

 

 

 

4. 최후의 근대적 권리를 옹호하라 

 

 

 

 

 

정의는 실체적 정의와 절차적 정의가 합리적으로 교직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절차적 정의의 중핵인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누려야 할 권리이며, 그 권리에 자의적인 차별을 두게 될 때 그것은 더이상 인권이라 부를 수 없다. 한 사회의 인권의식과 그 성숙도는 그 사회의 가장 끔찍한 범죄자가 어떤 대우를 받느냐에 따라 측정된다고 한다. 인간의 권리를 확장해 나가는 일은 결과적으로 권력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김길태를 원하는 것은 시민적 권리, 인권의 경계를 축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김길태가 서있는 땅은 우리가 서있는 땅과 같다. 그의 목을 자른 후의 칼끝은 우리의 목을 향할 것이다. 김길태가 갖는 모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며, 87년 체제를 수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국가가 형벌권의 이름으로 행하는 폭력은 기실 합의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합의의 이행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통제가 필수적이다. 쥐새끼와 그 졸개들은 끊임없이 저 감시와 통제의 외벽을 뛰어넘어 역사를 되돌리려 해왔다. 그리고 이제, 절호의 찬스를 잡은 듯 하다. 아마도 쉽게 놓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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