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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없는 등반가라고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 (중략)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중에서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

 

미국의 트럼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터키의 에르도안, 필리핀의 두테르테, 이들은 모두 각 나라의 정상들이자 알아주는 또라이, 아니 무려 하버드 대학교수 마이클 센델 쓰앵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쓰앵님은 트럼프를 지칭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을 들자면 이들 모두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라는 것.

 

영어와 한자가 요상하게 뒤섞인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라는 말이 무엇이냐. 대중을 선동하고 인기에 영합하여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실은 민주적 의사결정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그 위에 군림하여 지멋대로 해쳐먹는 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지멋대로 해먹는 방향이 국민의 이익과는 거리가 먼 것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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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 이후 코스피 못지 않게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친히 해변에서 군중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시며 방역 정책을 역행하고 계신데, 알다시피 브라질의 코로나 확산세는 거의 세계 최악이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 지금 심각한 거 아님?”이라고 묻는 기자를 향해 보우소나루는 쿨하게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라고 되받아치며 국가 정상다운 호방함을 과시했다. 관심있는 분덜은 나무위키에 보우소나루를 검색해보시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지니.

 

이 밖에 터키의 에르도안은 터키를 무슬림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계시며, 두테르테는 마약과 전쟁을 하는 건지 인권과 전쟁을 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트럼프는, 요즘 뉴스에서 보시는대로.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께서는 의회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땐 드러내놓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며, 이를 대중 선동에 이용하기도 한다(나를 제외한 정치인들은 다 거짓말쟁이 도둑놈들입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온갖 병크를 다 저지르면서도 ‘우리는 코로나19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식의 정신승리를 반복한다는 점도 비슷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공통 분모가 있다.

 

 

불평등과 양극화

 

트럼프는 북미, 보우소나루는 남미, 두테르테는 아시아, 에르도안은 유럽. 이들 또라... 정상이 이끄는 국가들이 위치한 대륙은 제각각이다. 지역 뿐 아니라 경제 규모, 국방력과 종교와 문화까지 다르다. 하는 짓은 유사하나 태어난 토양은 이렇게나 다른 와중에 눈에 띄는 공통 성분이 있었으니, 바로 자국의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다. 대표적으로 트럼프의 미국만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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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미국을 넘어 전세계가 멘붕에 빠졌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트럼프가 우려를 현실로 한땀한땀 만들어갔던 4년 동안 ‘어떻게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에 대한 갖가지 분석이 나왔다. 단순히 선거에만 포커스를 맞추어보면 대부분의 전문가는 ‘러스트 벨트’ 공략을 이유로 꼽는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선의 승부를 좌지우지했던 러스트 벨트, 경제적으로 몰락한 공업 도시의 백인 유권자 표심을 잡아 트럼프가 이길 수 있었다는 분석은 2016년 대선 직후부터 나왔다.

 

당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키워드는 ‘고졸’과 ‘백인남성’이었다. 이들은 몰락한 중산층을 대표하는 집단이며 중산층의 몰락은 양극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살만했던 사람들, 더 나은 미래를 꿈꿔봄직했던 사람들이 급격한 경제구조 변화(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희생되면서 출구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제조업을 이끌어나갔던 산업 역군들은 이제 가방끈이 짧고 할 줄 아는 게 없는 잉여인력으로 전락했다.

 

트럼프는 그들의 분노를 이용해 대통령이 된 것이다(공개적으로 자신은 가방끈 짧은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까지 했다). 2020년 대선에서도 트럼프는 경합주들에서 본격적으로 사전 투표함을 열기 전까지는 승리를 거의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재선에는 실패했으나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기록한 득표율은 46.9%인데, 이는 그가 당선되었던 2016년의 46.1% 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다.

 

트럼프는 양극화와 불평등이 만연한 미국 사회의 분노를 한껏 이용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 내내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책임을 외부집단(중국, 이란 등)과 상대 진영에 전가하며 철저하게 지지층의 분노와 사회 분열을 자극했고, 2020년 대선에서 더 많은 유권자가 트럼프에게 표를 줬다. 단지 그러한 트럼프에게 분노한 더욱 많은 표가 바이든에게 갔기 때문에 졌을 뿐이다.

 

심지어 플로리다 등 미국 남부 지역에서는 히스패닉 유권자들마저 트럼프를 지지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는데(트럼프는 이민자 적대 정책을 펼치며 히스패닉을 범죄자로 묘사했다), 새로운 이민자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밥그릇을 뺏어가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트럼프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불평등과 양극화의 산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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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FP

 

브라질과 터키, 필리핀도 만만치 않다. 개혁 정권 수립 이후 기득권이 반란을 일으킨 브라질, 종교 갈등이 살벌한 터키, 마약조직이 나라를 좀 먹고 있는 필리핀은 각기 다른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양극화와 불평등 만큼은 또렷한 공통분모였다.

 

사실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가 국가 지도자로 떠오르는 것이 앞서 언급한 국가들에서만 나타난 보기 드문 현상은 아니다. 극우 포퓰리즘 정치 세력의 득세는 일부 지역만의 일이 아니며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불평등은 이들 국가만의 현실이 아닌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또한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 그리고 2020년 총선

 

2016년 대선에서 이긴 트럼프가 취임한 2017년, 대한민국에서는 전임자 박근혜의 탄핵으로 조기에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다. 한 해 뒤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이 경북과 대구를 제외한 주요 광역단체장 자리를 싹쓸이 하면서 기록적인 압승을 거두었고, 코로나19 사태 속에 치러진 2020년 총선에서는 민주당이 180석을 가져가면서 사실상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했다. 독재 시절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이렇게까지 선출 권력의 지형이 한쪽으로 기울었던 적은 없었다.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병 중 하나로 '양극화'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IMF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또한 경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양극화 정도는 더욱 심해졌는데, IMF 때 그랬고, 글로벌 금융위기 때 그랬으며, 이번 코로나 사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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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겪을 때마다 상위 소득 계층과 하위 소득 계층의 차이는 큰 폭으로 벌어졌고, 위기가 지난 뒤에도 거의 좁혀지지 않다가 그 다음 위기 때 차이가 더 큰 폭으로 벌어지는 식이었다. 중산층 일부가 하위 계층으로 떨어진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2017년 대선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전국 단위 선거에서 민주당에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적폐 청산, 사법 개혁, 한반도 평화와 같은 구호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에 못지 않게 기대했던 것이 바로 사회 불평등 개선이었으리라 믿는다.

 

지금껏 보수 야당이 보인 모습(정책과 입장)을 보건데, 그들에게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을 해결 기대하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진정성을 의심하기에 앞서 그들이 주장하는 ‘성장 지상주의’ 해결 방식이 문제의 해결은 커녕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라는 근거가 세계 곳곳에 차고 넘친다. GDP는 성장할지 몰라도 먹고 사는 격차는 더욱 벌어질 뿐이다.

 

하여 현실적으로 정권 창출 가능성, 의회 장악 가능성이 있는 ‘유이’한 정당인 민주당과 국민의힘 가운데, 불평등 해소를 바라는 유권자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민주당이었다.

 

 

코로나 사태와 불평등

 

코로나 초기에는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이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여행과 항공 관련 산업이 즉각적으로 위축되었고 거리두기 단계 상승으로 경제 전반에 충격이 가해졌다. 다만 충격에 의한 피해는 계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는데 역시나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피해가 더 컸다.

 

세계 주요 국가의 정부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돈을 풀었다. 얼어붙은 실물 경제와는 별개로 금융시장에는 돈이 넘치도록 흘러들어 각국 증시는 3월 대폭락 이후 빠른 속도로 피해를 회복했다. 오히려 코로나 직전인 지난해 1월보다 현재 주가지수가 더 높은 국가도 있다. 그중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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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3천을 돌파한 한국 증시는 개인 투자자의 자금이 사상 최대치로 몰렸다. 올 초에는 개인의 증시 예탁금이 70조를 넘어섰다는 보도가 나왔다. 빚투 문제가 거론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1금융권 은행은 진짜 먹고 살기가 어려운 정도로 힘든 사람에게는 주머니를 잘 열지 않는다. 역대급 유동성 축제에 초대 받으려면 일정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거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져야했다.

 

지난달, 2020년에 주식거래를 처음 시작한 개인의 평균 수익률이 20%를 웃돌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NH투자증권발표, 2020년 1월~11월 신규 계좌 70만 개 표본). 자기 돈으로든 빚으로든 주식을 할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돈을 벌었고, 자산 보유액이 클수록 수익은 더 컸다. 같은 20%라도 1천만 원의 20%는 2백이지만 10억의 20%는 2억이다. 보유자금이 클수록 수익율도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증시 변동폭이 큰 상황에서는 판돈을 크게 쥐고 있는 쪽이 덜 조급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돈을 가장 잘 버는 존재는 다름 아닌 돈이다.

 

반면 하루 생계를 걱정했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직장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얻기 위해 시장에 쏟아져나왔다. 영세 소상공인들은 버티고 버티다 파산했다. 코로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온라인 전자상거래 업체와 배달앱 서비스 업체, 택배 업체는 부족한 일손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해당 업계 종사자들은 과로로 쓰러지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었다. 물이 가득 들어올수록 노 젓는 일손을 최소화해야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인 걸까.

 

다시 말해 코로나로 인하여 양극화는 이중으로 심해졌다. 하위 소득 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는 동안 상위 계층은 더 큰 돈을 벌었다.

 

 

유일한 기대주, 민주당의 명과 암

 

물론, 이런 현상이 우리나라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코로나 사태로 더욱 심각해지는 양극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민과 함께 일구어낸 방역 성과와는 별개로 아쉬운 부분은 따져봐야 한다.

 

1차 재난지원금이 전국민에게 지급될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책 이슈를 제안하고 공론화하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한동안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 토론이 일어났고 정치권 주요 인사들도 저마다 의견을 피력했다. 대중의 관심도 높아져 직장과 가정, 사적 모임에서 재난지원금과 기본소득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오갔다. 그건 ‘함께 잘 사는 사회’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재난지원금의 보편 지급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기본소득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코로나로 인한 경제 위기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방법이 더 좋을지를 고민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이 1차 재난지원금 전국민 지급안을 꺼내들면서 지펴진 불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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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미 2차 재난지원금은 선별 지급되었고 현재 지급되고 있는 3차 재난지원금도 규모가 커진 선별 지급으로 가닥이 잡혔다. 이 과정에서 이전과 같은 갑론을박이나 사회적 협의는 없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재난지원금을 보편 지급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말이 아니다. 1차 재난지원금 이후 여당이 양극화 문제 해결을 위한 뚜렷한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내놓지 않은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국민의힘에 기대할 수는 없지 않나.

 

그 사이 트럼프가 대통령이고 보수당이 상원을 장악한 미국조차 훨씬 강력한 구제 정책을 폈다. 독일은 코로나 위기를 기회삼아 기본소득 실험에 들어갔다. 영국은 코로나 피해를 입은 노동자뿐 아니라 자영업자들의 소득까지 국가가 나서서 일정 부분 보전해줬다. 임대료의 절반을 국가가 보조하고 나머지 절반은 임대인과 임차인이 나누어 부담하는 국가도 있다. 최소한 임대료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일만은 막기 위해 퇴거 유예기간을 두는 곳도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가 공격적인 지원책을 내지 못하는 이유를 두고 국가 부채와 기축 통화 운운하는데, 기축 통화국이 아닌 국가는 코로나로 심화되는 사회 양극화를 눈 뜨고 지켜만 봐야 한다는 말인지, 다른 나라들은 국가 부채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무지몽매한 자들이 나라 살림을 맡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실행의 가능성과 성과 유무를 떠나 이런 식의 아이디어조차 공론화되지 못한 것은 정부와 여당에 책임이 있다(누누히 말하지만 이런 걸 국민의힘과 보수 언론에 기대할 수는 없다). 추진이 되고 안되고는 둘째 치고 최소한 이슈 파이팅이라도 했어야 했다. 행정부와 입법부, 지방권력을 장악한 민주당에 이조차 기대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느 당, 어느 후보에 표를 줘야 하느냔 말이다.

 

공수처 설치를 필두로 한 사법개혁 역시 시급한 사안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법개혁과 불평등 해소가 동시에 추진하기 불가능한 사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법개혁 이슈에 대한 저항과 피로감을 우려해서 다른 정책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도 핑계다. 의회 독재라는 비판이 부담이 되었다면 그건 보수 야당과 언론에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국민의 투표를 통해 위임 받은 권력을 애먼 곳 눈치보느라 아낀다고?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바에는 추진하고나서 결과를 책임지는 편이 낫지 않겠나.

 

지난해 12월과 올 초에 통과된 공정거래 3법과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에서도 여당은 당초 입장에서 크게 후퇴한 내용으로 법안을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대기업에 횡포에 휘둘려 쓰러지는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공정거래 3법에서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기로 한 원안이 빠진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앞으로도 대기업의 횡포에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은 공정위가 고발해주지 않으면 법의 심판을 요청할 수 없다. 이로써 대한민국 사회 양극화의 주요 원인중 하나였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간극은 여전히 좁히기 어려울 전망이다. 입법 과정에서 어떤 협의와 합의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공약했던 사안마저 슬그머니 물러서버리면 정말 곤란하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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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트럼프와 보우소나루, 두테르테, 에르도안을 언급하면서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라는 표현을 썼다. 이들 국가의 공통 분모에 심각한 양극화와 불평등이 있다는 말도 했다. 대한민국의 사회 양극화와 경제 불평등이 앞으로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심해지기만 한다면, 우리 또한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권위주의 정부를 만나지 말란 법이 없다.

 

트럼프는 뚜렷한 정책이나 비전도 없이, 그나마 내세우는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경험적 근거도 없이 불평등에 희생당한 국민의 분노를 부채질함으로써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라고 그런 대통령을 만나지 말란 법이 없다.

 

양극화와 불평등이 낳은 분열된 사회에서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퇴임 직전까지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중이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어느 쪽이 국민통합을 위해 우직하게 나아가야 할 길인가. ‘양극화와 불평등의 해소’인가 ‘수감된 전직 대통령의 사면’인가.

 

끝내 대한민국에도 포퓰리즘을 등에 업은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선다면, 글의 맨처음 인용한대로 갈수록 심화되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가 민주주의가 되는 장면을 기어이 우리 사회에서 목격하는 날이 온다면,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할까.

 

우리라고 예외일 수 없다. 민주적 의사결정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지나치게 비민주적이라고 비판 받는 집단의 수장이 어떠한 정책적 소신이나 비전을 보여준 적도 없는 상태에서 대선을 앞두고 등판했다고 생각해보자. 공포와 분노를 조장하는 한편, 수구 언론이 비춰주는 후광으로 ‘저 사람이라면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 것 같다’는 실체 없는 기대와 환상으로 표를 삥 뜯어 대통령이 되는 게 과연 상상만의 일일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커져가는 불평등을 지금처럼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