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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 기사에 나온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밝힙니다. 

 

일본 굴지의 기업에서 일하는 일본인 소스케와 킨토키는 지역 연구를 위해 칠레에 1년 정도 머물며 내가 일하고 있는 칠레가톨릭대학교(편집자 주-필자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당시에 나는 교내에 Study Group ASIA라는 일종의 동아리 모임을 만들어 칠레 학생들과 아시아에서 온 교환학생들이 만날 수 있도록 했는데, 소스케와 킨토키도 이 모임에 참석했다. 이 얘기를 들은 칠레 친구 카탈리나는 일본 남자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며 눈을 반짝였다. 

 

하기야 카탈리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동양인이 나였다. 일본 남자가 궁금하던 카탈리나는 막내가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데 일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구실을 만들어 이 '신기한 동양인들'(소스케, 킨토키, 그리고 나)을 집으로 초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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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 기사의 필자, 칠레가톨릭대학교 민원정 교수

 

소스케는 부인과 갓 돌이 지난 아이와 함께 갔다. 생전 처음, 게다가 한꺼번에 동양인 다섯 명을 만난 카탈리나와 그녀의 가족은 놀라움과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칠레 음식을 나누는 식탁에는 일본식, 한국식 스페인어와 재팽글리쉬(Japanglish), 콩글리쉬(Konglish), 스펭글리쉬(Spanglish: 스페인어식 영어)가 뒤섞였다. 카탈리나,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은 이 신기한 동양인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스케의 부인이 보채는 아이를 안아 달래는데 얼핏 엉덩이의 몽고 반점이 보였다. 궁금한 표정의 카탈리나에게 소스케는 “동양 아기들은 태어나면 엉덩이에 이런 점이 있는데 자라면서 없어진다”고 설명했다. 그때 카탈리나의 막내가 소리쳤다. 

 

“엄마, 나도 저런 점이 허벅지에 있어요!”

 

이어 큰 아이는 어디, 둘째 아이는 어디, 아이들의 점 고백이 이어졌다. 카탈리나는 칠레에는 동양인이 없는데 아이들에게 비슷한 점이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중남미에는 혼혈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꼭 동양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워낙 혼혈이 많으니 여러 이유로 그런 점이 생길 수 있겠지.” 

 

내 한마디에 갑자기 식탁이 싸늘해졌다. 카탈리나가 말했다. 

 

“너 우리 남편의 성이 뭔지 알지? 이 성은 스페인에서도 귀족의 성씨야. 그런데 어떻게 우리 집에 동양인의 피가 흐를 수 있겠어?” 

 

“카탈리나, 스페인도 혼혈 자체야. 혼혈이 혼혈을 낳은 역사가 중남미야.” 

 

 

여전히 칠레인의 정신적 고향, 스페인

 

유럽의 한쪽 끝 이베리아반도에 위치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늘 애매한 유럽 취급을 받는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나누는 피레네산맥을 건너 유럽인 듯 유럽이 아닌 듯 묘한 매력을 풍기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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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기원전 80만 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기원전 1만 5천 년 즈음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남긴 구석기 시대의 크로마뇽인을 시작으로, 기원전 1천 년 경 켈트-이베리아인들이 정착하여 스페인의 선조가 되었다. 

 

기원전 10세기에는 페니키아인, 기원전 6세기에는 카르타고인들이 들어와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기원전 2세기부터는 약 6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5세기경에는 서고트족이, 711년부터는 북아프리카에서 침입한 이슬람교도들이 들어왔고 1492년이 되어서야 이슬람 지배세력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모두 물러났다. 

 

현빈 주연의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배경이 된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는 7세기 동안 스페인을 지배했던 무슬림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의 오랜 지배 역사는 오늘날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에 드러난다. 할리우드에서 활약 중인 스페인 출신의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나 페넬로프 크루스의 백인인 듯 아닌 듯한 매력 넘치는 얼굴을 떠올려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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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배우 안토니오 반데라스(좌)와 페넬로프 크루스(우)

 

1492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1세는 연합군을 결성해 그라나다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혼인을 통해 두 왕국을 합치고 스페인 전체를 통일하였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스페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 세력까지 축출하며 가톨릭국가의 건설을 알렸다(편집자 주- 관련 내용을 다뤘던 기사 링크)

 

포르투갈과 나눠지는 것은 이후의 일이다.

 

 

유럽인이 들어온 이후의 칠레

 

1492년은 이탈리아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 1세 여왕의 지원으로 아메리카대륙에 도착한 해이며, 이후 5세기에 걸친 중남미 정복의 역사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광활한 중남미를 다스리기 위해 스페인은 몇 군데에 부왕청을 만들었고, 식민지 시절의 칠레는 페루 부왕령에 속한 오지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엘도라도(황금향 전설)’의 꿈을 이루기에 북쪽의 아타카마사막과 동쪽의 안데스산맥에 둘러싸인 칠레는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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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칠레에 도달한 정복자들도 칠레 남부의 마푸체 인디오들의 저항을 이겨내지 못했다. 181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880년대에 마푸체 인디오까지 정복하고, 1879년부터 1883년 사이에 페루와 볼리비아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미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칠레를 비롯한 중남미의 독립은 원주민 인디오들이 아닌, 중남미에서 태어난 스페인 정복자들의 후손들이 이룬 독립이었다. 본토가 아닌 곳에서 태어난 스페인인들의 후손인 Criollos(영어로 Creoles)들은 스페인 본토의 서자 취급에 반발해 중남미에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할 꿈을 키웠다. 독립 이후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은 스페인보다 더 유럽적인 백인 국가 건설을 꿈꿨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칠레는 1849년부터 1874년 사이에 약 4천 명 이상의 독일인 이민을 모집했다. 

 

 

유럽인이고 싶은 그들, 이주한 독일인으로 국가적 자부심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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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남부 도시, 발디비아 

 

독일인 이민자들은 주로 독일 농촌 출신으로 발디비아와 칠로에 섬 등 길이가 4,300킬로미터가 넘는 칠레 남부의 후미진 곳에 정착해 작은 독일을 이루었다. 칠레 중남부 지방의 독일어권 인구는 국가적 자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활력소가 되었다. 

 

식민지 시절인 16세기에도 독일인들이 칠레에 정착한 사례는 있으나 독일인들의 본격적인 칠레 이주는 칠레의 독립 이후였다. 1848년 독일 혁명 (The Revolution of 1848) 이후 독일인들의 칠레 이주는 더욱 활발해졌다. 이후 제1,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독일인들의 이주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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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칠레 남부 아이센 지역에 정착한 독일계 이민자들

 

칠레 남부를 여행하다 보면 내가 어려서 보던 만화 영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연상되는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스위스 소설 [Heidi’s Years of Wandering and Learning] 원작의 일본 만화영화다.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도 제작에 참여했다. 

 

독일의 여느 농촌과 유사한 자연환경에서, 칠레 정부가 선사한 토지를 일구며, 독일인들은 또 다른 독일을 비교적 수월하게 형성했다. 몇 년 전, 국제한국학세미나에 참석차 칠레를 방문하신 스위스 교수님께서는 학술대회 후 칠레 남부를 여행하려고 하니 여행사 직원이 “비슷한 풍경 보러 칠레에 오신 건 아니지 않냐”고 하며 북쪽 아타카마 사막 관광을 권했다며 웃으셨다. 

 

오늘날 칠레의 “독일풍”은 남부뿐만 아니라 칠레 전역에서 느낄 수 있다. 칠레 최고급 병원 중 하나인 Clínica Alemana(독일 클리닉), 전국에 걸쳐 연합을 이룬 독일 학교(Deutsche Schule), 스위스 학교(Schweizer Schule Santiago), (칠레사람들에 따르면 독일식이라고 하는) 유명 샌드위치 체인점 Fuente Alemana(뜻: 독일마을)은 물론 독일 음식 쿠헨(Kuchen), 독일식 족발, 독일식 양배추 절임 Sauerkraut 등은 칠레 음식의 일부가 되었으며 칠레에서도 매년 10월에 Oktoberfest가 열린다. 

 

≫용어 설명

Oktoberfest: 옥토버페스트. Oktoberfest는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2주 동안 열리는 축제이다. 1810년부터 뮌헨 서부의 테레지엔비제에서 열리며, 세계 최대 규모의 민속축제이다. 엄청난 양의 맥주가 소비되는 거대한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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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남부 발디비아에 있는 흔한 칠레의 독일풍 카페 / 이미지 출처-<오부부세계여행>

 

그러나 독일 성씨를 가졌다고 다 한 자락 하는 것은 아닌지 칠레 친구 중 von이 들어간 독일 성씨를 가진 친구의 자부심은 기가 막힐 정도다. 잠깐 설명을 하자면, 독일 귀족들은 성 앞에 von(폰)을 붙여 자신이 귀족임을 나타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오토 폰(von) 비스마르크'가 있다. 

 

칠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모두 쓰는데, 두 성씨 중 하나만 독일 성이어도 “나는 독일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가끔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래, 그런데 어쨌든 너는 칠레 사람이잖아.”라고 놀리면 발끈하는 친구들도 있다. 

 

 

여전히 하얀 꿈을 갖고 있는 그들

 

다시 '신기한 동양인들'의 얘기로 돌아가 보면, 마찬가지로 스페인 성씨를 가졌다고 다 같은 급이 아니다.

 

일본 만화를 좋아한다던 카탈리나의 막내는 “일본만화? 난 별론데?”라는 팩폭으로 엄마를 무안하게 만들었고, 만화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는 소스케와 킨토키는 동양 사람들은 다 만화 팬인 줄 알던 카탈리나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트렸다. 

 

“우리 남편의 가문은 스페인에서 귀족 여인들을 데리고 와서 결혼했다구!” 

 

카탈리나는 말했다. 

 

“그렇지. 그러나 그건 나중 얘기야. 초기에는 남자들만 왔잖아. 정복자들이 원주민 여인들을 강간하고, 그렇게 혼혈이 탄생했지. 그리고 그동안 수 세대에 걸쳐 칠레에서 칠레 사람들과 결혼을 했잖아. 부인들이 모두 유럽의 후손들은 아니지 않아? 혼혈의 역사는 네 아이들의 얼굴에도 있어.” 

 

나는 반박했다. 

 

실제로 그녀의 세 아이들은 인류학에서 말하는 혼혈의 역사 그 자체다. 큰아이는 완벽한 백인, 둘째 아이는 백인의 체구에 검은 머리, 막내 아이는 원주민 인디오의 체구에 백인의 얼굴 골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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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정 교수의 칠레가톨릭대학교 국제한국학세미나에 참가한 일반적인 칠레인들의 모습. 

 

아이들의 점 고백과 스페인 및 중남미 역사에 대한 토론으로 우리의 대화는 날카로워졌으며 스페인어에 서툰 소스케와 킨토키는 대화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분위기만으로도 안절부절했다. 그리고 우리의 열띤 토론은 카탈리나 남편의 한마디로 끝났다(여기에서 베링해 이주설은 제외하기로 한다). 

 

“여보, 진정해. 나도 점이 있잖아.” 

 

우리의 우정은 다행히 아직 무사하다.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얼마 전 그녀가 갓 태어난 조카의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얘를 봐, 금발에 파란 눈이야. 너무 예쁘지 않니?” 

 

나는 그녀의 하얀 꿈까지 막을 마음은 없다. 자기가 예쁘다는데 뭐. 

 

 

민원정 (칠레가톨릭대학교 교수 &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규장각 펠로우)

 

 

 

참고문헌

 

(1) Geroge F. W. Young. Bernardo Philippi, Initiator of German Colonization in Chile. The Hispanic American Historical Review , Aug., 1971, Vol. 51, No. 3 (Aug., 1971), pp. 478-496

(2) https://www.h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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