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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26.금요일



충용무쌍





 



딱 작년 이맘 때 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의 지상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로 몰고 들어가 피를 부르던 게. 마치 연례 행사마냥 또 살풀이를 시작하려면 이스라엘의 움직임에 다시 한번 국제사회가 유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다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이야기로 신문국제면이 들어차는 엊그제 이 글이 생각 났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가는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의 개선과



팔-이 사태에 대한 정보부족에서 오는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고자 이 글을 딴지스들께 올립니다.



 






















 



하샤신(Assasin) 전설



 



암살자들을 길들이는 방식은 이러하다. 먼저 암살 지령을 받을 자들의 음식에 해쉬쉬를 넣는다. 해쉬쉬라는 마약은 흥분제가 아니라 몽혼제이기 때문에 <산노인>이 긴 설교를 하는 동안 그들은 잠이 든다. 그들이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 알라무트 요새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 장소로 옮겨진다.



 



그들이 깨어나 보니 몸종들이 자기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들은 열흘밤낮으로 알몸의 소년 소녀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올 때는 누더기 차림이었는데, 이젠 금실로 수를 놓은 초록색 비단옷을 두른 차림이고 주위가 온통 천국의 풍광이다. 금을 입힌 은그릇에 산해진미가 그득하고, 맛좋고 빛깔 좋은 미주가 넘쳐나며, 장미 향기 그윽하고 해쉬쉬가 지천이다. 마약, 섹스, 술, 사치와 향락!  그들은 자기들이 알라의 낙원에 와 있다고 굳게 믿게 된다.



 



그들이 비밀 낙원에서 다시 해쉬쉬 때문에 마취 상태에 빠지면, 이번에는 그들을 처음 있던 곳으로 데려가 놓는다. 그런 다음, <산노인>은 자기가 능력을 발휘해서 알라 낙원의 행복을 몰래 맛볼 수 있게 해준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일은 알라의 전사로 싸우다 죽음으로써, 종국적으로 그 낙원에 돌아가는 것이다. 자객들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반대파의 군주와 고관들을 암살하러 떠난다. 결국 체포되어 처형장으로 끌려오면서도 그들의 얼굴은 황홀감에 젖어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타나토노트



 



 



"팔레스타인 또 자살폭탄 테러, 바람 잘 날 없는 중동의 화약고......"



 



이런 제호 아래 실린 기사를 읽다보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폭심에서 머리카락 한 올, 피한방울 남기지 않고 사라진 '테러범'의 얼굴. 연이어 어느 프랑스 소설가가 흥미롭게 윤색한 종교적 광신과 마약에 취해 황홀감에 젖은 암살자의 얼굴을 거기에 덧씌워봤다 얼른 지운다. 마무리는 적당한 양비론과 니힐리즘이 버무려진 씁쓸한 표정으로 맺으면 더욱 좋다. 쯔쯧, 사리 분별에 어두운 젊은 아랍 친구 하나가 선동꾼들이 꼬드김에 넘어가 꽃다운 목숨을 버렸군. 그렇다고 유대놈들이 동정 받을만한 건 아니야!



 



그러나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팔레스타인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 이스라엘군 전차에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



                                        July 2002. photo by Musa Al-Shaer



 



볼 때마다 뭔가 울컥 하게 만드는 사진 한 장. 그럴 때마다 억지로 꾹꾹 눌러 죽여야 하는 슬픔. 무엇이 7살 남짓 먹어 보이는 소년으로 하여금 70톤에 육박하는 지상전의 왕자를 막아서게 만들었을까. 소년이 고사리 손에 쥔 돌맹이는 수십mm에 달하는 놈의 장갑판에 흠집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육중한 기계덩어리를 겨눈 소년의 돌팔매는 놈에게 일말의 물리적 위협이 될 수 없다. 소년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년의 팔매질은 이미 그 어떤 정치적 수사보다 더 강력한 실천이며 고관대작들의 지루한 탁상공론 끝에 나온 번지르한 선언보다 처절한 고발이다. 전차를 막아선 소년의 표정을 그려볼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곱 명의 숫처녀들에게 둘러싸여 끝없는 향락을 누리는 꿈에 젖은 광신자의 그것은 분명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흑과백으로 나누기 어려운 복잡한 이야기,



선악과 피아의 구분이 모호한 끝없는 비극, 



그리고 세계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지구 곳곳에 눈물의 씨앗을 심은 



하얀 가면의 제국들이 싹틔운 피의 기록.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아이 둘이 교실에서 싸운다. 시작은 분명 사소한 문제였을 거다. 그러나 주먹다짐은 격해져 이내 피가 터지고 옷이 찢어진다. 현장을 발견한 선생은 이들을 뜯어말리고 씨근덕거림이 가라앉자 자초지종을 묻는다. 그러나 주먹다짐의 당사자들은 물론 옆에서 싸움구경을 한 녀석들까지 제각기 중언부언하며 목청을 드높일 뿐이다. 슬슬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선생은 잠시 후 맞은 녀석이 반에서 소위 '왕따' 대접을 받아온 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유대인들의 시작이 그랬다. 홀로코스트 이후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가 된 그들의 역사는 처절하다. 지고지순의 피해자들이 된 유대인들이지만 유럽의 세계관 속에서 그들은 뿌리 깊은 멸시의 대상 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의 무의식속에 깔린 이런 생각은 대중 문화를 통해서도 종종 확인된다. 급우 카트맨에게 사사건건 유대놈(JEW)이라는 이유로 괴롭힘 당하는 카일(애니메이션 <싸우스파크 South Park>), 이질적인 전통과 철저한 집단주의로 무장한 보석상들(영화 <스내치 Santch>)이 등장하는 서구의 매체들. 사실 유대인을 두고 '한민족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민족' 이라는 칭찬을 해가며 '아이가 고기를 원하면 낚시를 가르치는 탈무드 학습법' 이니 '아인슈타인, 스필버그, 빌게이츠 알만한 위인들은 다 유대인에서 나왔다'는 후한 평가를 내려주는 곳은 한반도 밖에 없다. 당장 지금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땅과 마주 닿은 유럽에서도 우리는 뿌리 깊은 반(反)유대주의(Anti-Semitism)의 기운을 읽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왜 차별받아왔나? 표면적인 이유는 유럽을 지배한 크리스트교에서 기원했다. 잠깐, 뭔가 앞뒤가 안 맞다. 성서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유대민족에게 구원을 내려주겠다며 지상에 강림한 그들의 구세주였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인들이야말로 선택받은 신민이요 예수와 핫라인으로 닿아있는 선택된 민족인데 왜 이들이 전 유럽의 왕따가 되었을까? 사람의 아들은 유대인 가운데서 태어났지만 결국 유대인들이 손에 죽었기 때문이다. 성서공부를 열심히 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예수 이전(구약)과 예수 이후(신약)의 기독교 교리는 분명히 공기부터 다르다. 출애굽(Out of Egypt)시에 람세스의 병거들을 통째로 홍해에 수장시키고 시나이 산에선 추상과 같은 권위를 내비치며 '불신자는 태워죽이겠다'며 엄포를 놓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지상에 보내시고 나서 퍽 부드러워지셨다.   



 



기독교속 일자(一者)의 부성적(父性的) 인격성을 따지는 문제 차치하고, 예수 이전의 기독교(유대교)는 명백히 유대민족 중심의 선택적 구원선민사상으로 무장된 민족 종교였다. 그것이 예수 이후에 보편적 구원 만민평등으로 무장된 사랑의 종교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예수의 등장에 열광했다. 그가 로마의 억압에 맞서 싸워 이길 구세주이며 유대민족의 '왕'이 되어 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로마의 통치에 맞서 독립국가를 세워줄 '영웅'이 아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주라는 입바른 소리만하는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발 벗고 나서서 자기들 손으로 예수를 고발하고 십자가에 매달라고 외쳤다. 가엾은 빌라도!(예수 당시 로마가 사마리아·이도메아·유대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총독. 예수를 재판했다.) 성난 유대인들의 손에 이끌려 예수가 잡혀오자 '이 자는 어제 까지만 해도 너희들의 왕이라고 추앙받던 이가 아니더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빌라도. 누구보다 더 예수의 무고함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빌라도. 그러나 누구보다 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빌라도. 결국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 본시오 빌라도는 사람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 것을 명령했고 유대인들은 '구세주 예수를 참한 인류의 적'이라는 오명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그렇다고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정서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럽인들의 종교적 신심에서만 기원했다고 믿으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소수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지독하리만큼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로마라는 보편적 가치 아래 하나 된 제국을 운영해왔던 고대 유럽 사회에서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였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복속된 속주들 가운데 정복과정에서가장 완강히 저항한 민족이었다. 로마는 유대인 정복당시 지독하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저항에 치를 떨며 도시 하나하나를 완전히 갈아엎는 도성(屠城)전을 벌였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사원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통곡의 벽 하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을 정도다.



 



유대 저항운동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은 A.D.66년의 마사다옥쇄 사건이다. 로마는 제국의 안녕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분리주의자로 발전할 위험요소가 다분한 유대인들을 경계했고 117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유대교의 전통인 할례, 경전인 토라연구를 금지하는 칙령을 시행한다. 여기에 반발하며 132년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키니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은 속된 말로 '징글징글한 녀석들' 이었다.



 



이 징글징글한 녀석들에게서 나온 기독교가 훗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처음엔 지독한 유대인들의 종교라고 탄압의 대상이었던 기독교는 예수가 말한 '사랑의 힘'으로 로마사회의 피지배계층과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마치 유교적 반상제가 짓누르던 조선사회에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들이 노비와 부녀자들이었던 것처럼. 위험한 유대인들의 종교라는 이유로 탄압 받던 기독교는 313년 "모든 기독교도들은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짤막한 밀라노 칙령으로 사교라는 낙인을 지워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잇따라 로마제국의 황제들도 예수가 말한 사랑의 힘에 감화되어 개종하니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아예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종교가 전 로마의 국교가 되었는데 유대인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간다. 앞서 말했듯이 선택적 구원, 선민사상을 굳게 믿는 유대인들은 보편적 구원, 인류보편의 사랑을 주장했던 예수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전통에 걸맞는 유대교를 고집하고 하고 있는 데다 성서 속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아주 극악한 모리배들이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상 최초 최대의 인종청소, 흑사병



 



로마제국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까칠한 놈들' 로 첫인상이 박혔던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공인되자 '예쑤의 원쑤'로 확실하게 미운털이 박혔다. 유럽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시작인 것이다. 이것이 최초로 수면에 드러난 사건이 바로 중세의 흑사병 창궐이다. 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흑사병은 중세인들에게 신의 분노, 악마의 저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공중위생 관념이나 의학적 지식이 전무 했던 중세인들은 미지의 전염병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 때문에 신이 내린 저주'라는 황당한 결론에까지 도달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편견이 굳어졌고 근대국가의 부재로 인해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유럽각지에서 흑사병이 아닌 린치와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피와 눈물의 역사다.



 



그들의 생존전략



 



누르면 반발은 더 강해진다. 유대인들의 뚜렷한 개성은 로마의 반감을 샀고 로마의 핍박은 유대인들의 내적 결합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다. 이 내적결합과 기독교 중심주의는 유대인들에게 악마라는 낙인을 찍었고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더욱 처절해졌다. 따라서 그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었다. 사회의 양지에서 차별 받는 유대인들이 일찌감치 눈 뜬 것은 '지하경제'였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유동성이 큰 자원 현찰귀금속. 예수를 죽인 악마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에서 자유스러워지기 위해서 그들은 악착같이 금권을 쥐는데 집중했다.



 



또한 지역적 시대적 구분 없이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휴대가 간편해 탄압을 피해 떠도는 유랑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든든한 길벗이 될 수 있는 귀금속. 이 두 가지로 꽃피울 수 있는 비즈니스는 사채와 금은방(전당포)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악랄한 유대 상인 샤일록은 그런 민족적 DNA를 몸에 각인하고 살아온 참 딱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채업과 전당포는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딱 좋은 어두운 직업이니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지하경제를 장악했고 그들이 장악한 지하경제는 다른 이들의 미움을 샀고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어두운 곳으로 뿌리내리는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란 이렇게나 뿌리가 깊다.



 



눈물 나는 핍박의 역사



 



이렇듯 아주 탄탄하고 공고한 사상적, 역사적 배경을 갖춘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근대에 이르러 굵직한 사건들을 펑펑 터뜨린다. 그 하나,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 암살과 5월법 제정.



 



1881년 3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괴한이 던진 폭탄에 폭사한 일이 있었다. 현장에서 연행된 유력한 용의자는 정신이상자였고 사건의 배후는 오리무중인데, 여기서 대 짜르께서 왠 행려병자의 무심한 불장난에 폭사하셨다고 발표해버리면 체면이 안서니.. 고심하던 당국은 탈출구를 발견한다. 연행된 용의자는 포경(할례)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옳거니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어, 범인은 우리 안에 있어! 황제 암살은 체제전복을 노린 유대인들의 조직적 음모라고 잠정 결론이 났고 러시아는 이걸 빌미로 영토안의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해 상당수를 국외와 동유럽으로 강제이주 시켰다.



 



그 두 번째, 1894년 드레퓌스 사건. 너무나 유명하고, 에밀졸라를 일약 프랑스 지성사의 양심으로 도약하게 해줬으며 자유 프랑스의 역사에 큰 오명을 남긴 그 사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고를 치른 드레퓌스 대위의 사례는 전 유럽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1차 대전



 



그리고 20세기의 서막은 1차 대전의 포성으로 열리게 된다. 당시 독일 내에는 유대인들이 정재계의 상당수 요직까지 진출해있을 정도였고 이들은 민족적 자각은 있으나 대부분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고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현지에 동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핍박받아온 만큼 '은과 금이 곧 우리의 생명이요 인격'이다는 신조를 체득했던 유대인들은 유럽각지에서 상당한 업적, 재력적 지위를 가지고 - 그러나 그다지 고운 눈초리를 받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1차 대전 말기,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슈퍼파워 영국의 손에 의해 서로 삼립할 수 없는 세 개의 밀약이 슬금슬금 진행되고 있었는데... 1차 대전이 한창 전개되어가던 시기, 19세기의 최고의 슈퍼파워였으나 저물어가던 영국은 의뭉스러운 약속 세 개를 맺는다. 카드 돌려막기 보다 더 대책 없고 무서운 이 세 개의 약속. 시작은 한참 전쟁 중인 1915년이었다.



 



1915. 후세인-맥마흔 협정



 



오토만 제국(훗날 터키) 아래 눌려 살던 아랍지역 족장들을 이용해 전세를 뒤흔들려던 영국의 계산이 깔려있었던 밀약. 이집트 총독이었던 맥마흔과 아랍지역의 부족장중 하나였던 후세인 사이에 오고간 서신들은 '종전 후 터키로부터의 해방과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 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대가로 아랍의 민병대들이 터키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영국을 지원하는 것, 이것이 후세인-맥마흔 밀약의 골자였다. 그러나 오토만 제국의 변방 사막지대에서 근근이 부족단위의 생활을 해오던 이들에게  제대로 된 군사 조직이나 있었을까. 여기에 영국이 직접 장교를 보내 군사훈련을 시키고 무기를 제공해 줬으니 이것이 영화 "아라비아로렌스" 의 역사적 배경이다.



 





 그러다 정의감 넘치는 영국군 장교가 아랍 민중들을 적절히 써먹고 



 토사구팽하려는 본국의 처사에 부당함을 느끼고 아랍 대동단결을 외친다는 이야기...



 



 



1916. 사이크스-피코협약



 



뒤에선 아랍부족들에게 독립을 대가로 게릴라전을 펼칠 것을 요구한 뒤 영국은 김칫국을 들이키기 시작한다. 사이크스-피코협약은  당시 열강을 대표하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오고간 밀담으로 종전 후 아라비아를 사이좋게 나눠먹자는 내용이다. 일차적으로는 경쟁국 프랑스와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한 선수작업이지만 결국 먼저 약속한 아랍인들에게 그 땅 나눠줄 생각 따윈 별로 없었다는 음흉한 속내를 드러낸 게다. 



 



1917. 11. 2  발푸어 선언



 



그리고 우리의 핵심사안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의 가장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해준 밀담이 오고간다. 1917년, 전쟁의 막바지. 잠수함, 독가스, 비행선등등 당시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첨단테크놀로지로 무장한 독일군에 쪼이기 전략으로 맞서며 버티던 영국은 독일사회와 경제 상당부분을 뒷받침하고 있는 유대계 자본을 흔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참신한 발상을 해냈다. 그러나 독일에 살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이미 인종적, 언어적으로도 독일인들과 구분이 어려울정도로 독일사회에 융합되어 있었던 터였다.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 등등 그 시기 즈음해 독일에 살며 독일 말을 쓰던 유대인들의 수와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거대한 철강 재벌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그 일가만 보더라도 유태인들은 학계뿐만 아니라 정재계에 이미 뿌리깊이 진출해 있는 상태였다.)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보다는 독일인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에 더 강하게 밀착된 그들을 흔들어 놓는 건 보통 떡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 영국의 외상이었던 발푸어는 영국군에 전비를 지원해주던 유대계 은행가 롯스칠드를 찾아가 담판을 짓는다.



 



발푸어



마.. 늬들이 오빠 좀 도와줘야 쓰겄다....



 



롯스칠드



어마나, 지금도 쎄가 빠지게 밀어드리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셔요!



 



발푸어



늬들 말고,, 독일에 사는 느이 동포덜..



  



롯스칠드



어머나!  걔네들 어지간해서는 안 넘어올텐데.. 오빠 꿈 깨요!



 



발푸어



아 썅, 얼마면 돼? 얼마면 되냐고?!



 



롯스칠드



그게.. 좀 비쌀텐데..,.



 



발푸어



그래?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본토에 유대국가 건설, 이정도면 되겠어?



 



롯스칠드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봐!



 



오..오빠야..내가 오빠야를 의심하는거는 아인데..내가 막 가슴이 뛰어서..



고마.. 막 심장이 떨려뿌네.. 아이구..



 



발푸어



이 문디 가시나, 니 오빠 몬 믿나? 까짓 꺼 확 싸인하고 도장까지 찍어주몬 믿겄나!!



 



롯스칠드



오빠야.. 하는김에 도장찍고 복사꺼정...



 



그리하여 그랬던 것이다. 1차 대전 말미에 뜬금없이 당시 최강대국 영국이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하고 나선 발푸어 선언. 독일 내 유대자본과 인력의 이탈을 유도해 독일을 고사 시키기 위해 영측이 먼저 시도한 공작인지, 아니면 유대계 시오니스트들이 먼저 영국에 접근한 로비의 결과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발푸어와 롯스칠드 사이의 밀담이 오고가자 '영국을 도와주면 우리가 2천년전 로마의 등쌀에 밀려 떠나왔던 고향에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해 준다더라!' 라는 꿈같은 말에 상황은 급박히 변해갔다. 단 하룻밤 사이에 독일내의 모든 유대계 자본, 인력이 등을 돌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결국 내부에서부터 무너진 독일은 외부의 압박을 견뎌낼 재간이 없어진고 1차 대전에서 패전 한다.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잠깐 앞서서 빠트린 상황을 점검해보자. 당시 유대인들의 사정이 대략 어떠했을까?  거진 2천년 전 로마에게 점령 당하고 세계 각지로 밀려나 "디어스포라" 가 된 유대인들. 그들이 2천년간 기독교 중심적 세계관과 특유의 배타주의로 인해 유럽전체의 적이 되어 모진 핍박 속에서 유랑을 계속해왔다는 얘기가 1차 대전 이전까지를 다룬 이야기의 골자였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 그들은 자구책으로 사채와 귀금속으로 대표되는 지하경제 시장을 주무르는 금적,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해 버텨왔다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섞이고 섞여 유대교라는 공통분모 하나만 유지한 채 당시 독일의 아슈케나지들처럼 자기가 사는 땅에 동화되어 살아 가고 있던 게 대다수였다.



 



그러나 그들이 꿈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지하에서 시작된 시오니즘운동. 우리가 2천 년전 쫓겨나왔던 예루살렘 땅에 유대왕국을 세운다는 이 이상주의 운동에 많은 유대민족주의자들이 찬동했다. 이들은 실제로 다소 수정주의적 입장이긴 하지만 '예루살렘이 아니라도 좋다, 일단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가 비빌 땅뙈기라도 마련해 보자' 라는 생각으로 세계 각국과 접촉하며 일본 북해도와 오키나와, 소비에트의 중앙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섬 중 하나를 매입해 유대 국가를 건설하자는 구체적인 안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 무대인 유럽과 동떨어진 극동, 혹한의 동토를 가진 중앙아시아, 외진 남국 어디 하나 성에 차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는 강경파들 사이에서 그들의 시오니즘은 영원한 이상향으로 그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강대국의 외무장관이 그 자리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해준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때 당시 팔레스타인은



 



빛은 동방에서, 인류최초의 문명발상지라는 옛 영광에도 무색하게 버려진 사막의 땅에서 특별한 정치, 국가적 조직의 구속도 받지 않고 아랍인, 유대인, 혼혈들이 섞여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인종적으로는 유대계지만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 전형적인 아랍인, 신앙은 유지하지만 아랍적 유목 방식을 가지고 현지에 정착한 유대출신들 약 70만의 사람들(대략 아랍계 와 유대계 비율 10:1)이 조용히 살고 있었던 땅이다. 이후 반세기 이곳의 현실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할지 꿈도 꾸지 못하고.... 혹 영국을 도와 터키에 맞섰던 몇몇 부족장들은 '독립국가 건설' 이라는 달콤한 꿈에 잠시 젖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당시 영국은



 



독일을 밀어낸 이후 프랑스와의 유럽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미국의 진출을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라비아를 식민지로 관리할 생각을 굳혔다. 여기 저기 수표를 써놓은 곳은 많았지만 까짓거 부도내버리면 그만이라는 배짱. 내가 세계 최강대국인데 '헐 님 이건 약속이랑 틀리잖아요 잉이잉' 찌질 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밟아주마!



 



이렇게 한 땅을 두고 서로 다른 동상三몽을 꾸던 사람들. 영국이 맺어놓은 삼립은 커녕 양립조차 불가능한 세 개의 약속 사이크스-피코조약, 맥마흔-후세인밀약, 발푸어선언은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뇌관이었다.



 



종전 그리고..



 



1차 대전은 끝이 났다. 빠리강화회담이 열리고 독일의 무장해제와 각종 전후체제를 논하는 길고 긴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그 가운데 정말 아이러니한 서로 두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빠리에서 오고 간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민족 자결주의 14원칙과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발푸어선언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은 2천년만의 귀환이라며 만세를 외치고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후세인-맥마흔 밀약을 믿고 있던 아랍인들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팔레스타인내의 소수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되려 오갈 데가 없어지게 된 꼴이다. 여기에 영국정부는 이듬해인 1920년 본색을 드러낸다.



 



이른바 영국 위임 통치안. 야! 유대국가, 아랍국가 그거 실은 둘 다 훼이크였어 사실 여기 형이 침발라 놨던 자리란다 이히힛! 아랍과 유대 양측 모두 불에 덴 듯 놀란거다. "속였구나!! 유럽 중화 짱깨 녀석들!!!!" 양자 모두의 격렬한 저항으로 영국의 위임 통치 안은 생각보다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시대가 변해 더 이상 19세기식 식민지 통치는 열강들의 상호 견제 속에 힘을 잃고 있었다. 거기에 영국의 위임통치라고는 하지만 늘어나는 유대인 이민자들과 기존의 아랍 토착 세력들간의 갈등은 거의 내전수준이었고 유대, 아랍 양측 공히 영국의 위임 통치 안에 격렬히 저항하자 영국은 슬슬 손을 떼고 싶어 했다. 남는 것 없이 관리만 어려운 땅이 팔레스타인 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저물어가는 해였다. 이때 주목 할 만한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는 1930년대 독일에서 나찌즘의 부흥이고 둘은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영국 쪽으로 유입되었던 유대자본과 두뇌들이 점차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르는 기회의 땅 아메리카로 기수를 돌리기 시작한 것. 대세는 이제 영국이 아닌 미국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굽시니스트, 2차세계대전 만화



 



히틀러가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을 벌인 데에는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단순히 그의 고달픈 빈에서의 청년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백수시절 유대인 하숙집 주인이나 전당포 노파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된 것이라는 해석은 너무 순진하게 들린다. 대중들은 자기보다 반 박자 먼저 박수쳐줄 사람들을 따라나서는 법. 전후 궁핍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경기부양모델로 한계를 느끼고 전쟁을 결심한 히틀러는 군사, 경제적으로는 이미 1차 대전 당시 유대자본 유출로 겪은 치명타를 미연에 방지하고  사회적으로는 유서 깊은(!) 유럽의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이용해 거기에 자신의 광기와 탁월한 선동기술을 양념으로 얹어 내부의 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밖에 나가 전쟁을 치르기 전에 내부의 적을 숙청 한다는 말처럼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전시에 국가체제를 공고히 만드는데 희생시킬 내부의 표적으로 삼은 거다. 히틀러의 만행을 피해 유럽을 탈출해 팔레스타인으로 "엑소더스" 를 감행하는 유대인들의 수는 폭증했고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 정부는 더 이상의 유대인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선에서 발포를 허가 했을 만큼 탈출러시는 이어졌다. 더 이상 팔레스타인은 아랍 땅이 아니었고 팔레스타인 내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갈등은 터지기 직전의 종기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1947. 11.29. UN 안전 보장 이사회 팔레스타인 분할 안 제시



 



온 세계를 휩쓸었던 전쟁의 광기와 참화가 진정되자 열강들은 슬슬 팔레스타인이라는 폭발직전의 압력솥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무턱대고 이 압력솥에 불을 때기 시작한 영국은 더 이상 사태를 끌어갈 능력이 없었고 슈퍼파워로 등장한 미국이 중재자로 나섰다. 그러나 말이 좋아 중재자지 미국은 이미 유대인들의 대변자나 마찬가지 였으니, 2차 대전으로 심화된 유대자본의 미국유입은 미국 정재계에 기름진 밑밥을 깔아놓았고 그들의 입김은 거셌다. 그리고 그 전통은 반세기가 넘어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발 벗고 나서고 UN이 제시한 팔레스타인 분할 안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어차피 거기도 무슨 나라가 떡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래전으로 따져보면 유대 애들이 살았던 땅이고,, 근데 한 2천년 땅 관리는 아랍 애들이 해 왔고 지금 몰려든 유대인들을 당장 떠밀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 그러니 너희 둘이 적당히 금 긋고 그 안에서 사이좋게 살아보아라, 하고 팔레스타인 영토의 반절 정도를 유대인들에게 할애해 준다는 것이다.



 





노란게 아랍땅, 주황색이 유대땅



 



일견 56% 대 44% 면적 비율로 땅을 갈라 사는 이 안은 제법 합리적으로 보인다. (1차 대전 종전당시 6만선이었던 유대인 인구는 이때 이르러서는 60만을 넘어선 상태다) 그러나 국경선이 왜 이렇게 구불구불 불연속적인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사람이 살만한 초지와 바다에 접한 땅은 유대 꺼 나머지 산악지형과 사막은 아랍 꺼. 아주 기가 막힌 불평등 조약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아랍인들의 대답은 심플했다.



 







나 같아도 그랬겠다...



 





그러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본격적이 깡패수업이 시작된 것이다.





제2탄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온 유럽에 뿌리깊이 박힌 반유대주의의 기원과 역사에 몸서리치게 될지도 모른다. 언뜻 오늘날 미국을 등에 업고 '국제 사회의 일진' 노릇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걔들이 그럴 만도 해, 2천년을 맞고 살았는데 한에 찌들은 게지' 라고 면죄부를 주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손찌검 당하며 자란 아이가 똑같은 폭력가장이 되었다는 데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어도 변명은 될 수 없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