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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과 칼

2010-03-21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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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룡 추천0 비추천0

2010.3.22.월요일


김지룡


 


‘갑옷 육아’와 ‘칼 육아’


 





요즘 바쁜 엄마들이 많다. 아니, 초인적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이의 건강과 두뇌 발달에 좋다는 음식을 준비하고, 아이를 깨워 먹이고, 차로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로 보내고, 아이에게 직접 가르치기 위해 오전에는 영어나 중국어 학원에 다니고, 아이가 돌아오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아이를 실어 나르고, 학원 앞에서 대기하면서 과외교사와 통화해 과외시간을 잡고... .


 


마치 연예인의 로드 매니저처럼 하루 24시간 아이를 매니지먼트하는 엄마들이 많다. 과연 그 엄마들은 행복하고, 아빠들은 만족하고, 아이들은 잘 자랄 수 있을까. '슈퍼맘'이라고도 불리는 엄마들은 '양육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한다.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이도 그렇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정신 상담을 받는 일도 많다고 한다. 아빠는 사교육비를 마련하느라 등골이 휜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다.


 


"지금은 힘들지만 그래도 아이가 잘되면 보람을 느끼고 만족을 얻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렇게 하면 아이 성적을 조금 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과외나 학원이 범재를 천재로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시험에서 정답을 골라내는 일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니까. 하지만 그까짓 것을 얻기 위한 것치고는 너무 출혈이 심한 것 같다.


 


게다가 '아이가 잘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이가 커서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문제이지, 부모가 깔아놓은 선로를 따라 달려가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극성을 부리면 아이가 세속적인 성취라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무서운 점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삼무(三無)'에 빠질 수 있다.


 


'삼무(三無)'는 일본에서 만들어낸 조어로, '무기력', '무책임', '무감동'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24시간 매니지먼트'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엄마들처럼 어린 아이들을 입시 명문이라 불리는 중학교나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아이를 하루 종일 '뺑뺑이'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키워진 일본의 아이들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무기력하다는 젊은이들(어느 미국 저널리스트의 표현이다)이 되었다.


 


'무기력, 무책임, 무감동'. 모든 일을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으므로 무기력하고, 자신의 의지로 해 본 일이 없으므로 무책임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결과에도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취직도 하지 않고 교육도 받지 않는 젊은이들을 말하는 NEET(Not Employed and Education Training)족이 85만 명을 넘어서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삶에 대한 그 어떤 의욕도 없이 부모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 엄마들에게 이런 위기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뺑뺑이' 돌리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인지 회의를 느낀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다. 아이의 미래와 삶이 모두 엄마의 책임으로 떠넘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자녀 교육의 책임을 함께 져주지 않는 이상 이런 무의미한 소모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아이를 키우는 데 엄마는 방어적이고 아빠는 공격적인 성향이 있다. 엄마는 어떤 일을 하지 않았을 때의 불리함이나 피해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좋다는 것은 모두 시키게 된다. 아빠는 어떤 일을 했을 때의 유리함이나 이득을 먼저 생각한다. 아이에게 가장 득이 될만한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은 엄마보다 아빠가 내리기 쉽다.


 


성적이 무척 좋은 편도 아닌데, 아이를 학원에 전혀 보내지 않는 나와 아내를 두고 주위에서는 '아이들을 학대한다.'는 말까지 했다. 때때로 아내가 흔들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 말 한 마디에 아내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애들 나중에 공부 못하면 내가 책임질 게."


 


사실 어떻게 책임져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말 한마디가 아내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나는 곧잘 엄마의 육아 방식은 '갑옷', 아빠의 육아 방식은 '칼'에 비유한다. 아이도 경쟁 사회에 뛰어든다. 부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열 살 정도가 되면 성적을 신경 쓰고, 특목고 입학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전쟁 같이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쟁은 대학 입학 후에도, 졸업 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줄곧 계속 된다.


 


아이가 평생 마주하게 될 전쟁터에 갖고 가야 할 물건은 무엇일까. 엄마들은 아이에게 든든한 갑옷을 마련해주려고 분투한다. 상대의 칼날에 베이지 않도록 두터운 갑옷을 입혀주려는 것이다. 갑옷은 단단한 철판을 여러 겹으로 붙여 놓은 모양새다. 영어라는 철판, 영재교육이라는 철판, 예능교육이라는 철판, 조기유학이라는 철판, 명문대 출신이라는 철판, 재산 상속이라는 철판.


 


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어도, 갑옷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갑옷만 입은 채 전장에서 우두커니 서있으면 언젠가는 칼에 찔린다.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는 '갑옷'이 아니라 '칼'이다.


 


'칼'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나가겠다는 의지와 능력이다.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것(자기 방 청소하고, 아침에 알아서 일어나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 자신의 생각에 대해 자신감을 갖는 것 등등. 나는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튼튼한 갑옷이 아니라, 자신 만의 '칼 한 자루'를 쥐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