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장(移葬)

2010-03-22 12:28

작은글씨이미지
큰글씨이미지
뚜벅이 추천0 비추천0

2010.3.23.화요일


뚜벅이


 


 


 



 


공교롭게도, 어제 저녁 두어 시간의 시차로 전혀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물음으로 끝나는 넋두리를 들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거냐?'고 그들은 물었다.


 


그건 질문의 형식이었지만 질문일 수 없다. 거기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고, 누군가 답을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저, 아 하고 한숨을 뱉듯이, 조금 긴 문장의 탄식을 했던 것뿐이다.


 


나보다 세상을 덜 산 한 사람은,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마흔으로 다가가는 자신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행복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며, 자신은 기행(奇行)의 인생이냐며 늪처럼 눅눅하고 깊은 질감의 문자를 연속 보내왔다.


 


나보다 세상을 더 산 한 사람은, 예순이 넘어서 되돌아본 자신의 지난 시절이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했다.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잘난척하며 살아왔지만, 집안의 큰일을 겪고 보니 자신은 정말 헛똑똑이였으며 그것이 창피해서 앞으로 살아갈 용기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술 취한 음성은 고장 난 라디오의 그것처럼 불확실했고 불안정했다.


 


누군가는 미래가 불안하고 누군가는 과거가 혐오스러워서 혼란해한다. 이렇듯 우리가 탄 인생의 버스는 정거장에 멈추듯 정기적으로 막막한 안개 속으로 진입한다. 느닷없이 흐려져버린 시계(視界)에 당황해하며, 우리는 두 눈을 비벼대며 자문하고 탄식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 행복이 뭔지, 잘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며칠 전 부모님 묘를 이장했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단정한 공원묘지에서 부친 10년, 모친 8년을 모신 후였다. 풍수지리의 문제라거나, 현실적인 이해관계 탓은 아니었다. 큰 형님이 서울 근교 전원주택으로 이사 하면서 가까운 곳에 선친, 선비를 모시고자 했고, 자그마한 산을 하나 장만한 것이 이장의 이유였다.


 


장남 입장에서는 결정을 내리고, 동생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또 그 결정에 자기 확신을 하기까지 적지않은 고민을 했었겠지만 막내인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산 자가 이사를 하듯, 선령(先靈)을 큰 집으로 모시는 것이라고 나는 덜 무겁게 생각했다. 이장이 또 하나의 장례라 할만큼 대사(大事)라는 것은, 이장을 진행하면서야 알게 되었다.



더구나 이 두 번째 장례는 상주의 집중력을 더 많이 필요로 했다. 첫 번째 장례가 가족, 친지, 많은 조문객과 더불어 정신없이 치러진 것이었다면 이장은 직계 가족만의 힘으로 치러야 할 의식이었다.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부모와 한번의 작별을 더 하는 행위가 이장이었다.


 


10년의 세월은 부모의 죽음을 추상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때 되면 찾아가서 벌초를 하고 인사를 드리면서도, 저 묘지 속에 내 부모가 누워 계시다는 것을 점점 막연하게 만드는 세월이다. 자식의 기억 속에서 부모가 점점 사라져가는 동안, 땅속에서 부모는 유탈 중이셨다. 그리고 이제 잠시 세상에 나와 10년의 과정을 자손들에게 보려주려 한다.



유골이 된 부모를 확인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연의 순리라고 하더라도 두렵고 생경했다. 어른이 해야 할 행위치고는 경험도 없는 일이어서 회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내 눈 앞에 펼쳐진 유골 앞에서 나는 이물(異物)의 생경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유골이 내 아버지의 것이라는 근거는, 10년 전에 묻어 드렸던 바로 이곳에서 나왔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눈빛이 형형했으며 입술이 두툼했던 내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유골과 나를 연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하지도 못한 체 나는 당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감정의 후유증은 이장을 모두 마치고 난 이후부터 찾아왔다. 부모를 더 좋은 곳으로 모셨다는 생각에 마음은 편했으나, 아스라해가던 부모에의 기억을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 기억이 부모의 유골로 마무리 되는 것은 잔혹했다.


 


허무와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것은 벽면을 파고 드는 매운 연기처럼 스멀스멀하게 기어와서  나를 제압했다.


 




허무를 극복해야 한다.


 


부모의 유골을 보며 이물스러움을 느낀 죄인은 신음처럼 내뱉는다.


 


왜 살아야하는지, 행복이 뭔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는 '살아있음'의 지점에서 발생하는 자문이다. 지독하게도 치열하게 살아가기, 산자의 특권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가기, 삶에 애착을 가지고 진지하게 살아가기, 그리고 나서 언젠가는 당신의 모습으로, 당신처럼 쉬기.


 


귀밑머리 희끗해지며 모든 것에서 귀찮음만 키워가는 자식에게 그 뜻을 전하기 위해, 당신은 당신의 최후를 보여준 것이라고 나는 스스로 최면 건다.


 


그 최면에 걸려서, 산 것들은 살아있을 때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나는 주문건다.


 


 




 


뚜벅이 트위터 : @ddub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