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섰다

 

10억이나 묻힌 큰판에 군침 돌지 않을 이 누가 있을까. 카메라도 피하고 커피에 탄 약도 피하고 배신자까지 섭외했지만, 고니에겐 마지막 한 방이 필요했다. 

 

호기롭게 묻고 떠블로 간 곽철용도 두끗 들고 1억을 박았지만, 한 끗에 오억을 태우는 고니의 목숨 건 베팅에 결국 패를 구겼다. 이 노름의 이름이 '섯다'인 이유다.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고 서야' 끝내 판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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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이 삶이 돼서는 안될 일 이지만, 삶이 도박 같은 경우는 종종 있다. 버티고 서지 못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과 싸우지 않는 이, 또한 누가 있으랴.

 

제주 오징어의 습격

 

노량진 수산시장 59번 중도매인이 선어 경매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날 20마리씩 포장된 아구찌(최상품) 오징어 한 박스 낙찰가는 23000원. 59번 모자를 쓴 남자의 표정이 어둡다. 이날 오징어는 동해 산지에서 27000원에 출발했다. 가격이 ‘까진’ 것이다.

 

오징어의 상경에는 여러 가지 비용이 발생한다. 일단 운임. 산지에서 서울까지 적재되어 오는 비용이다. 다음은 노량진 수협의 수수료 4.3%. 시장에 들어오는 입장료다. 끝이 아니다. 하차비와 노조비도 박스마다 부과된다. 동해 묵호항에서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 경매대 앞까지 오는 동안 오징어의 몸값은 총 13~15% 정도 상승한다. 일반적으로는.

 

“어젯밤 제주도 한치배에 오징어 어군이 들어와서 시장에 600개(박스)가 풀렸어요. 큰일이네”

 

요즘은 수온의 변화로 오징어들이 남해, 서해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기습 출몰할 때가 있다. 난데없이 서울로 진군한 제주산 오징어의 습격으로 노량진에 오징어 초과공급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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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까지 ‘일반적’이었던 오징어 가격은 30000원 정도의 시세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날은 기껏 서울까지 올라온 오징어가 산지가격 밑으로 폭락한 것이다. 가격이 까지다 못해 작살났다. 오징어의 상경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밤새 헛일을 하게 된 꼴이다.

 

심야의 베팅

 

사실 서울의 상인인 59번 중도매인 입장에선, 어찌 되었든 싸게 살 수 있으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날은 사정이 달랐다. '산지 거래'를 한 날이기 때문이다.

 

산지 거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장키스키'와 '위탁판매'. 

 

장키스키는 중도매인이 직접 산지의 위판장 경매에 참여해 낙찰받아 서울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다. 수요와 어획량을 예측해 조금 더 좋은 가격에 수산물을 선점하려는 공격적인 방식이다.

 

장키스키라는 단어 역시 '아구찌'와 마찬가지로 정체불명의 업장 용어다. 일제강점기 경성역 앞에 형성된 '경성수산시장' 시절부터 흘러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왜색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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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로에서 이전한 노량진 수산시장 초기의 경매 모습

출처 -<서울시>

 

다른 산지 거래 방식은 위탁판매. 산지의 출하주가 서울의 중도매인에게 물건을 위탁한다. 중도매인은 위탁된 물건을 수수료를 받고 당일 시세에 맞춰 수도권 전역에 분산한다.

 

산지 거래는 기본적으로 수익을 중도매인과 출하주와 나누는 방식이다. 그 말은, 가격 변동에 의한 위험부담도 같이 진다는 말이 된다.

 

이날 오징어 가격 폭락에 59번 중도매인의 낯빛이 어두웠던 이유는, 동해 등지에서 사입한 오징어 2000박스 때문이었다. 망연자실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동이 트기 전에 비싸게 산 오징어 4만 마리를 밑진 가격이라도 뿌릴 곳을 찾아야 한다. 중도매인은 박스더미를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깊게 빨고 툭툭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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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는 사람들

 

낙찰가, 즉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에 상인들은 가격이 ‘섰다’라는 동사를 쓴다. 낯설지만 절묘한 언어감이다. 수많은 변수에 의해 위아래로 휘청대던 생물가격이 마침내 명확한 위치를 잡는 과정은, 막대 추가 진동을 멈추고 똑바로 서는 모습과 같다.

 

가격이 ‘서는’ 그 순간 출하주, 중도매인 소매인 유통업자 하다못해 노량진 굴다리너머 새벽 선술집 업주들까지, 모두의 운명이 결정된다. 오늘 서있는 곳이 살얼음판인지 아닌지. 모두들 기를 쓰고 각자의 생존을 위한 가격을 밤새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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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상인들이 밥상 앞에 둘러앉는다. 이들에겐 점심이다. 혹은 새벽에 먹는 브런치. 밑반찬 몇 가지와 뜨근한 국이 나온다. 노량진 신시장 구석에는 상인들에게 식사를 파는 간이식당이 있다. 

 

“손님 왔는데 계란 안 볶아?”

 

거칠지만 친근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59번 중도매인이 음식을 내오는 아주머니를 타박한다.

 

“계란 맛도 없는 거 뭐 하러. 오늘은 제육 했어.”

 

쏘아붙이는 목소리도 역시 정겹다. 말씨가 조금 달라서 물어보니, 중국에서 온 동포다. 그래서 그런지 계란 부침이 묘하게 중식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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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좀 잘 해결되셨나요”

 

“예 뭐. 선주문 받은 것도 있고, 마트 MD, 재래시장 이런데 이래저래. 있는 채널 없는 채널 다 돌렸죠. 밥 먹고 지하창고도 한번 내려가봐야죠. 급랭해서 보관하는 방법도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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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수산시장 지하2층 냉동보관장. 상인들은 이곳을 수협으로부터 팔레트 단위로 임대받아 사용한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바닷속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 예측하기가 힘들죠. 고깃배 타는 사람들과 같은 운명이에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오늘 오징어가 저지른 손실액은 상당했다. 59번 중도매인은 그 짐을 동해의 어부들과 나누어진다. 오늘만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손익보다 서로의 신용이 이들에게는 더 값지다. 그래야 또 좋은 날을 기약할 수 있다. 잡는 사람과 파는 사람은 절대적 공생관계다. 승자독식과 각자도생은 수산업의 생존법이 아니다. 시장이 아무리 냉정할지라도.

 

“많이 드세요. 이거 500만원짜리 밥입니다. 우하하”

 

새벽 3시에 점심밥을 밀어 넣는 59번 중도매인의 숟가락질은 꺾이지 않고 왕성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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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새벽,

촌각을 다투는 상황속에서도

취재를 허락해주신

 

노량진 수산시장 중도매인 59번

대운수산(링크) 임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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