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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정 추천20 비추천0

 

2019년 10월 18일. 저녁 8시쯤 학교를 나섰다. 길 건너 지하철역 앞에서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웅성거리고 경찰 몇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역사 안에서 누군가 개찰구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산티아고(칠레 수도) 시내의 중심 역인 바케다노 역에서 내렸다. 어두운 거리에 경찰차와 살수차가 깔리고 시위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입구는 이미 닫혔다. 

 

학생 한 명이 WhatsApp을 보냈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지금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한대요. 어디 어디 앞에 있는 지하철역 쪽문을 찾아보세요.” 

 

학생이 알려준 대로 가니 문을 닫는 중이었다. 얼른 뛰어 들어가 겨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 

 

한겨레.PNG

출처-<한겨레>

 

 

칠레의 대규모 시위가 터지며   

 

바케다노 역은 이후 1년 이상 폐쇄되었다. 시위와 약탈, 방화가 일상이 되었다. 재와 최루탄 냄새가 스멀스멀 온 시내를 누볐다. 밤에는 헬리콥터가 날아다녔고 길에는 몇백 미터 간격으로 총을 든 군인들이 늘어섰다. 외출은 고사하고 학교에도 거의 가지 못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지하철 열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의 신호등은 모두 파괴되었다. 가끔 동료들의 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동료들은 Waze가 알려주는 대로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 노선을 따라, 신호등 없는 길에서 스릴 넘치게 차를 몰았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갈 때 뉴블레 역의 지하 4층 환승역을 내려가노라면 “출구 없음, 환승만 가능”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용어 설명

Waze: 웨이즈(Waze)는 이스라엘 웨이즈 모바일에서 만든 사용자 참여형 내비게이션 앱이다. 

 

은행, 스타벅스, 휴대폰회사, 보험회사, 약국, 마트 등은 입구를 합판으로 덮고 철판으로 한 번 더 덮었다. 산티아고 거리가 벙커가 된 듯했다. 친한 독일 교수님께서 이메일을 보내셨다. 칠레에 있는 독일 연구소들의 보고서를 보니 칠레 상황이 심상치 않은데 얼른 칠레를 떠나지 않고 뭐 하는 거냐고. 시위야 이러다 그치겠지, 그리고 여기 내 직장이 있는데 어디를 가라고. 

 

칠레 시위의 한 장면.JPG

 

한여름의 성탄이 되었다. 칠레사람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다. 칠레 사람과 결혼한 미국 친구가 가족 모임에 초대했다. 칠레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고 선물을 교환한다. 

 

칠레 생활 초기에는 친구들이 불러주면 신이 나서 달려갔지만, 시들해진 지 오래되었다. 타국에서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는데, 가족 모임에 가면 내가 혼자라는 걸 새삼 느끼는 기회가 되었다. 

 

밤 9시가 지나 저녁을 먹는 일도 부대꼈고, 깍두기로 가족들의 선물 교환에 끼기도 거북했다. 그러나 외국인 배우자 노릇을 힘들어하는 친구의 고충을 아는지라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시국이 수상해지며 사람들은 평소에는 하지 않던 정치 얘기도 하곤 했는데, 지나치게 정치 성향을 드러내는 대화가 나에겐 힘들었다. 칠레에 사는 미국인들의 상당수가 트럼프를 지지하거나 아니면 남미의 매력을 즐기며 사는 낭만 좌파들이었다는 걸 시위 이후 처음 알게 되었다. 

 

일이 터질 낌새는 몇 년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지하철 칸칸이 노래와 춤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이 넘쳐난 지 꽤 되었다. 그러나 구심점도 보이지 않고 시위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술과 마약에 취해 시위 현장 한 켠에서 약탈과 방화를 저지르는,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않았다. 

 

백 년이 넘은 성당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불태우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칠레 친구들이 그동안 웃음 속에 숨겨둔 정치 성향을 마구 드러내며 매일매일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너도 칠레에 살고 있으니 이편, 저편, 네 의견을 말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른 일에는 외국인이라 낄 필요, 알 필요 없다더니, 나한테 왜 이래. 

 

 

칠레의 코로나19가 터지며

 

2020년.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칠레 코로나 사진 이거.jpg

 

SNS에는 [우한스프]라는 책자가 돌기 시작했다. 2월 여름 방학에 잠시 한국에 갔다 왔는데 같이 운동하던 친구가 메시지를 보냈다. “너 내일부터 바로 운동하러 나올 거야?” 친구의 염려를 눈치채고 강사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운동하기 무서우면 내가 몇 주 쉴까?" 그럴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친구들은 나와 볼키스로 인사하기를 꺼렸다. 

 

3월 3일. 칠레에서 첫 코로나 19 확진자가 나왔다. 시위는 멈춘 듯했다. 3월 중순부터 산티아고 시내는 락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코로나 19와 락다운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오히려 더 산발적으로, 더 심해졌다. 

 

처음에는 백 명 단위로 일일 확진자가 나오더니, 5월에는 하루에 3천, 4천 명씩 늘어서 6월 초가 되자 인구 천9백만 칠레의 누적 확진자는 십만 명을 넘었다 (2021년 2월 18일 기준으로 누적 확진자 수는 788,142명이다). 

 

용건에 따라 외출증을 끊을 수 있게 되니 사람들은 경찰청 홈피가 마비되도록 외출증을 끊어 돌아다녔다. 결국 1인당 1주 2회로 외출증 발급 횟수를 제한했다. 그러나 경찰력이 시내 곳곳에 미치지 못하니 사람들은 적당히 잘도 다녔고, 마트와 관공서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섰다. 중남미에서 가장 큰 항공사인 칠레 항공 LATAM은 5월에 미국에 Bankruptcy(파산) Chapter 11을 신청했다. 칠레에서 미국으로 가는 노선은 산티아고-마이애미가 유일했다. 

 

칠레줄줄.PNG

 

산티아고 병원은 곧 마비 상태가 되었고, 환자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칠레 남성이 코로나19로 산티아고 길에서 쓰러졌는데, 한 달 만에 눈을 떠보니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버스로 약 14시간 걸리는 푸에르토 몬트의 한 병원이더라는 뉴스가 나왔다. 칠레사람도 아니고 가족도 없는 내가 길에 쓰러지면 어디로 보낼까. 

 

 

뼛속 깊이 칠레인이 될 순 없었다

 

재일 한국인 교수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국악을 공부한 재일 한국인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늘 ‘조센’ 소리를 들으며 사셨어요. 그런데 내가 한국에 오니 선생님은 나를 이름 대신 ‘일본’이라고 불렀어요. 아이들도 나를 ‘일본 이모’라고 했죠. 나는 일본에서는 ‘조센’이고 한국에서는 ‘일본’이에요.” 

 

칠레에서 나는 많은 경우 “profesora coreana (한국인 교수님)”이(었)다. 어차피 학교에 한국인 교수는 한 명인데 뭐 어떠냐는 게 칠레 친구들과 학생들의 변이었다. “칠레에는 어떻게 온 거야? 칠레 남자랑 결혼했어?”라는 질문은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물었다. 17년을 같은 질문에 답하기가 귀찮아서 “어떻게 오긴, 비행기 타고 왔지.”라고 하면 칠레 친구들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한인교회나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칠레 친구들과 어울려 잘 지냈다. 그러나 칠레에서 살 만하다고 뼛속 깊이 칠레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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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가톨릭대학교 단과대 동료들과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스키장에서 민원정 교수. 가운데 자주색 점퍼를 입은 이가 민 교수이다.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차별쯤은 어쩔 수 없어 넘기고 살 경지에 이르렀고, 집에는 김치는 커녕 마늘도 없었지만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아플 때 기름이 둥둥 뜬 Chicken Noodle Soup를 먹기 힘들었고, 비 오는 날 기름에 튀긴 옥수수빵이 당기지 않았다. 긍정 마인드가 지나쳐 매사를 농담으로 넘기는 문화가 편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짜증도 났다. 

 

하루는 칠레 친구가 ‘칠레에 꽤 살았는데 칠레 국적을 받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왜?” 하며 발끈했다. “나는 이중국적 해당자가 아니고 한국 여권 파워가 세계 2-3위”라며 응수했지만, 친구에게 미안하고 당황스러웠다. 

 

한국 제자가 이 얘기를 듣더니 말했다. 

 

“교수님의 마지막 심정적 보루 같은 거 아닐까요? 언제든 상황이 되면 한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 거요. 언제든 한국에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니 또 거기서 버티실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아예 못 오신다고 생각하면 힘들잖아요.”

 

그 상황이 시위와 코로나19로 인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왔다.

 

 

익숙했던 한국이 낯설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 칠레 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전세기가 뜰 가능성은 없다. 상용비행이 가능할 때 되도록 빨리 떠나라”는 공고가 보였다. 

 

시위 이후 주위의 미국 친구들이 서둘러 떠나고 있었다. 대부분의 비행기가 연기와 취소를 반복해서 제시간에 이륙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산티아고-마이애미-로스앤젤레스-한국, 제시간에 비행기가 뜬다면, 약 50시간에 걸쳐 여행할, 한국행 항공권을 구했다. 

 

가방 두 개를 챙겨 난데없이 한국에 오니, 이번엔 “어떻게 칠레에 갔냐”는 질문을 받는다. 칠레에선 “칠레 남편이나 남친이 있냐”고 대놓고 물을 일을 한국에선 “가족과 같이 오셨나요? 다시 가족들 보러 들어가시나요?”라고 빙빙 돌려 묻는다. 

 

칠레에선 “비행기 타고 왔지” 하면 유머 감각이 제법이라며 함께 웃었는데, 한국에선 “비행기 타고 갔어요”라고 하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서울대 규장각에 와 계신 중국 연변대 교수님은 한국말을 정말 잘하신다. 그런데 빨래를 씻는다고 하셔서 내가 매번 “빨래를 빨다, 얼굴을 씻다, 머리를 감다”라며 잔소리를 한다. 내가 몇몇 칠레 친구들에게 단어의 미묘한 차이를 물으면 외국인이 그 정도면 잘하는데 뭘 더 알고 싶어 하냐며 안 가르쳐 주던 게 생각나서 나 혼자 오지랖을 떠는 게다.

 

염상섭의 [숙박기]와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에는 고아와 다름없는 식민지의 현실, 혹은 이런 상황을 부인하고 식민 모국의 주인으로 거듭나기를 시도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오랜 시간 칠레에 살면서 한 번씩 생각하는 것이 있다.  

 

스페인 식민기를 겪고 아직도 식민 모국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문화적 고아’ 칠레. 이 ‘문화적 고아 사회’에 살며, 한국과 칠레의 문화 코드가 섞이기도 꼬이기도 하는 나는 ‘문화적 고아 사회’ 속의 ‘문화적 고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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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제10회 국제한국학세미나에서 민 교수(왼쪽에서 두 번째).

 

17년 전 칠레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17년 만에 한국에 오니 이젠 익숙했던 한국이 너무 낯설어서 당황스럽다. 그러나 달리 보면, 문화적 고아는 경계인이나 주변인이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는 자유로운 영혼, 문화적으로 유연한 사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안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이다. 

 

민원정 (칠레가톨릭대학교 교수 & 서울대학교 규장각 국제한국학센터 규장각 펠로우)

 

 

 

읽어볼 책

 

-민원정 [한국에서 버틸 용기]. 바른북스, 2020. 

-염상섭 [두 파산: 염상섭 단편선]. 문학과 지성사, 2006. 

-이태준 [이태준 문학전집]. 깊은샘, 1988. 

 

들어볼 노래

 

-j-hope (feat. Becky G) “Chicken Noodle Soup”

-피터아저씨 “옥수수”

 
 

 

편집부 주

 

민원정 교수가 칠레에 가는 순간부터

칠레에서 오랜 시간 버텨온 여정과

그 길에서 마주친 현실을 담은 책이다.

 

직설적이며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쭉쭉 읽는 재미가 또 있는 책이다.

 

외출 줄이고 방콕하며

 한번 읽어보시라!

 
 

 

민원정 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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