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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선물이란 걸 해본 적 있던가

 

직업이 노가다꾼이어서 겪게 되는 불편함이 여럿 있다. 내 경우, 불편함을 넘어 서럽다고 느낀 적이 한 번 있다. 그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작년 봄으로 거슬러 간다. 문득, 차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한국 30대 남자치고 자동차에 참으로 관심 없는 편이다. 친구들이 BMW, 아우디, 벤츠, 포르쉐 같은 브랜드 따져가며 갑론을박할 때도 나는 딱 이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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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그냥 뭉뚱그려 외. 제. 차. 인 것이다. 국산차도 마찬가지다. 차 뒤에 적힌 모델명을 보지 않는 이상 뭐가 뭔지 잘 모른다.

 

올해로 차를 끈 지 딱 10년이다. 첫차는 98년식 코란도였다. 당시 400만 원 주고 샀다. 폐차할 때까지 탔다.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이제 그만 날 놔줘.” 하는 표정으로, 아니 그런 굉음을 내더니 멈춰 섰다. 그래, 넌 할 만큼 했어! 그동안 고마웠어~~! 눈물로 보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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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06년식 그랜저TG였다. 이건 300만 원 주고 샀다. 코란도를 잠시라도 타 본 사람은 알 거다. 그 미친듯한 소음과 거친 승차감.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거 같다. 한동안 잘 탔다. 이 녀석은 생각보다 빨리 자신을 놓아달라 했다. 카센터 사장은 “이거 고쳐서 타느니 새로 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굳이 타겠다면 임시로 고쳐는 드리는데 오래는 못 갈 거예요.”라고 했다. 고쳐서 꾸역꾸역 또 탔다.

 

10년 동안 그런 썩은 차를 타고 다녔어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친구들이 30대로 넘어가며 하나같이 외제차 살 때도 부럽다고 느낀 적, 단 한 번도 없다. 진짜X100 진심이다. 말 그대로 그냥 관심이 없는 거다.

 

그런 나에게도 물론, 드림카는 있었다. 어느 외국영화에서 본 차다.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사막을 횡단하는 장면이었던 거 같다. 너무 멋있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자동차가 멋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언젠가 나도 저런 차를 타고 해안가 한 번 달려봤으면 좋겠다, 정도의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게 다였다. 언감생심 죽기 전에 그런 차를 타보기나 할까 싶었다. 그야말로 판타지.

 

작년 봄, 그랜저TG가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차를 바꾸긴 해야 할 판이었다. 늘 그랬듯 중고차 사이트를 뒤적이던 참이었다. 친구가 불을 질렀다.

 

“야! 너 그 차 타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냐? 이참에 질러~~~!!!”

 

“에이 말도 안 돼! 내가 돈이 어딨어.”

 

“누구는 돈 있어서 차 사냐? 은행에서 우선 사주고 타면서 갚는 거지. 중고로 사면 생각보다 안 비싸~”

 

진짜로 그랬다. 한 번도 현실감 있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찾아볼 생각도 안 했다. 막상 찾아보니 못 꿀 꿈은 아니었다! 물론 엄청난 무리가 따르겠지만 말이다. 그때부터 난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날 설득했다. 그래, 30년 이상 열심히 살았잖아. 언제 한 번 너 자신을 위해 근사한 선물해본 적 있냐? 늘 썩은 차 끌고 다니며 고생한 기억을 떠올려봐. 너 스스로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 없다? 요즘 벌이도 괜찮잖아?

 

그… 그… 그렇지?? 에라 모르겠다!! 사자!!!

 

진작, '일용직 제외'라고 하던가!!

 

평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주의다. 당연히 은행에서 대출받아 본 적도 없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주거래 은행에 갔다. 직장인 신용대출을 신청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조회해 봤는데 신용대출은 어렵겠네요.”

 

“아니, 왜요? 통장 내역 다 나오잖아요? 매달 월급도 잘 받고, 1년 수입도 나쁘지 않을 텐데?”

 

“아네~ 그렇긴 한데요. 일용직으로 분류가 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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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원라인>

 

은행 직원은 한참이나 빙빙 돌려 설명했지만, 결국 이 말이었다.

 

‘현재 벌이도 있고, 이전에도 꽤 벌었던 거 같긴 한데,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당장 내일이라도 백수 될지 모르는 널 어떻게 믿고 우리가 돈을 빌려주니???’

 

당연히 될 줄 알았다. 당시 현장 상황이 괜찮았다. 주말에도 일하고 잔업도 제법 하던 때였다. 까놓고 말해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호기를 부렸겠지, 멍청이. 근데 하……. 일용직이라는 게 여기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아니, 그럴 거면 직장인 신용대출이라고 하지 말던가!!! 아니면 직장인, 괄호 열고! 일용직 제외! 괄호 닫고! 신용대출이라고 하던가!!) 그래요? 아~ 어쩌지. 그럼 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혹시 모르니까, 다른 쪽으로 한 번 알아볼게요. 잠시만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노가다꾼은 왜 일용직이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유럽의 몇몇 국가는 원청에서 직접 노가다꾼을 채용한단다. 정규직으로 말이다! 자신들이 관리하는 여러 현장에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노가다꾼을 로테이션으로 배치하는 거다. 그렇게 하고도 현장이 없어 놀게 되는 노가다꾼에겐 임금의 60% 이상을 보장해준다나 뭐라나.

 

그러자면 물론, 그에 수반하는 여러 비용이 발생한다. 관리자도 있어야 하고, 4대 보험부터 퇴직금과 보너스, 각종 복지혜택 등등까지. 그런 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여전히 발주처-원청-하청-오야지-일용직 시스템으로 서로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거지만 말이다.

 

어쨌든!! 보수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은행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괜히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신뢰다. 내 편이라 생각하면 설령 도둑질했다 해도 ‘사정이 있었겠거니…’ 하고 우선은 믿어주는 것. 그게 내가 정의하는 신뢰다. 신뢰가 무너지면 그 관계도 끝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20대 언젠가 이런 일도 있었다. 여러 사정으로 연애 2년 차에 장거리 커플이 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관계가 소원해지던 참이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별 통보를 해왔다. 말 그대로 ‘통보’였다. 자신의 친구가 봤단다. 내가 다른 여자와 히히덕 거리며 밥 먹는걸. 한 번이면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자신의 또 다른 친구가 또 봤단다. 내가 또 다른 여자와 히히덕 거리며 차 마시는걸. 그러니 헤어지자는 얘기였다.

 

황당했다. 우선, 변명부터 하자면 당시 난 잡지사에 다녔다. 기자는 물론, 디자이너들까지 온통 여자뿐이었다. 국장급들을 제외한 젊은 남자는 내가 유일했다. 여자 사람과 밥 먹고 차 마시는 건 당시 나에게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 사람인 직원들에게 흑심을 단 한 번이라도 품었다거나, 하다못해 어쩌다가 분위기가 므흣해져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다거나,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절대 아니올시다. 회사 안에 이상한 소문 돌까 봐 더 조심했다.

 

“우리가 2년이나 만났는데, 넌 아직도 날 모르니? 친구한테 그런 얘길 들었어도 헤어지자고 할 게 아니라, 우선은 날 믿고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이건 바람을 피웠고 안 폈고의 문제가 아냐. 지금 너는 우리가 2년 동안 쌓아 올린 신뢰를 무너뜨린 거야. 내가 여기서 바람 안 피웠다고 한들 네가 날 믿겠어? 이미 신뢰가 무너졌는데.”

 

난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순 없을 테니.

 

나에게 신뢰란 그런 거다. 그렇기에, 널 믿지 못하겠다는 은행의 답변은 생각보다 데미지가 컸다. 노가다꾼으로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을 부정 당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열심히 일해서 갚겠다는데, 왜 날 믿지 못하냐고요~~~!!!

 

숫자로 사람 점수 매기는 세상 말고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나는 이미, 드림카 타고 해안가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한적한 강가에 드림카를 박아놓고, 장작불 피우며 모카포트로 커피 내리는 상상을 하고 있었단 말이다. 김칫국을 이만큼이나 마셔놨는데, 떡을 안 주겠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었다. 은행 직원과 난,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했다.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아무래도 여기선 안 될 것 같아요. 저희가 저축은행도 있는데 그쪽으로 한 번 연결해드릴까요?”

 

“그럼 금리가 높잖아요?”

 

“그렇긴 한데, 말씀드렸다시피 일용직이셔서…….”

 

그렇게 난, “네가 일용직이어서 믿을 순 없지만, 이자를 더 내겠다고 하니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가 빌려줄게.”라고 하는 저축은행 손을 덥석 잡았다. ‘카푸어’ 비슷한 놈이 된 거다. 푸하하하. 인생 뭐 있겠나.(잠깐, 눈물 좀 닦고.)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나서야 은행을 나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엉뚱한 상상을 했다. 이름하여 ‘신용 스캐너’다. 공항에서 쓰는 휴대용 금속탐지기처럼 은행 직원마다 ‘신용 스캐너’를 하나씩 들고 있는 거다.

 

“대출받으러 왔습니다.”

 

“이쪽으로 앉아보시겠어요?”

 

은행 직원이 고객 머리 위로 ‘신용 스캐너’를 휘적휘적한다. 띠-띠-띠-띠.

 

“예~ 됐습니다. 5분만 기다려주세요.”

 

말하자면 뇌를 분석하는 기계인 거다. ‘신용 스캐너’로 입력된 정보는 그 즉시 컴퓨터로 전송되어 그 사람의 종합적인 신용등급을 분석한다. 이를테면 그 사람의 비전과 역량, 성실함과 절박함 등 정성평가에 해당하는 정보를 말이다. 5분 뒤,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나온다.

 

“(기계음)OOO 고객님의 신용등급은 1등급입니다.”

 

“오~ 축하드려요. 1등급이시네요. 얼마나 대출해드릴까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하하. 1등급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럼 한 10억 정도 대출받을 수 있을까요?”

 

“10억이요? 물론이죠. 고객님~ 20억까지 가능할 것 같은데, 조금 더 해드릴까요?”

 

그런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숫자로 사람 점수 매기는 세상 말고, 뇌를 분석해 그 사람의 진정성을 알아주는 세상 말이다. 그럼 나는 한 100억쯤 빌릴 수 있을 텐데!!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