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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이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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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때였다. 우리 학교 양아치 무리 가운데 한 녀석에게 싸다구를 맞고 걷어차인 곳은 종례가 끝나 애들이 빠져나간 빈 교실이었다.

 

“왜 그래?”

 

한 패거리였던 다른 반 두어 명이 우리 교실로 들어오면서 때리는 그 놈과 맞는 나를 보고는 이유를 물었다.

 

“이 새끼가 말을 싸가지 없이 하잖아”

 

그건 순전히 ‘표면상’의 이유였다. 나는 그날 종례 직전에 우유 급식을 자기 이름으로 먹으라는 녀석의 말(아마도 자기 부모에게 우유 급식비를 슈킹할 목적으로)을 거절했다. 그 자식은 거절의 ‘태도’를 문제 삼았지만 진짜 원인은 거절 그 자체였을 게다. 왜냐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다지 깡이 센 편이 아니거든. 어지간하면 그 놈이 하는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들어주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들어줄 용의도 있었는데 왠지 그 순간엔 엄마, 아빠가 힘들게 번 돈을 남의 이름으로 먹는 게 영 마뜩잖았단 말이지(문제집 값은 잘도 삥땅쳤으면서 말야).

 

거절은 해야겠는데 후환은 두려워서 어떻게 하면 저 놈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언어적, 비언어적 스킬을 구사했는데 나를 때린 이유가 ‘말을 싸가지 없이 해서라니’ 그건 너무 억울하잖아. 내 언어 구사력이 그 정도 밖에 안 된다니...

 

분풀이를 마친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패거리 친구들과 노닥거리며 교실을 떠났다. 교실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친구가 다가와 토닥여주었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존나 억울해서.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결과적으로, 그 놈한테 맞은 건 그날 딱 한 번이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또래의 힘 센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해본 경험은 ‘운이 좋게도’ 없었다. 그날은 몹시 억울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때리고 짓밟는 이유가 합리적일리 없으니 그런 피해를 입은 누군가는 그저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것이고 나는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지독한 가해자와 엮이지 않았던 운, 그런 놈에게 눈에 띄게 거슬리지 않았던 운 말이다.

 

 

쌍둥이 배구 선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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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 소속의 쌍둥이 선수 이재영, 이다영의 학폭 논란이 터졌다. 쌍둥이 선수를 지목한 폭로 내용의 대부분을 당사자들 또한 인정한 가운데, 소속 구단은 무기한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고 한국배구협회는 무기한 국가대표 선수 선발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 문제를 놓고 전국민적인 여론조사를 벌인 건 아니지만 인터넷 공간에 드러나는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 무기한 출장정지 보다는 아예 리그에서 퇴출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얼마 전만 해도 여자 프로배구 인기몰이의 선두에 섰던 쌍둥이 선수들이 이제는 학폭 논란으로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에 빠졌다. 프로배구 선수로는 드물게 TV 자동차 CF도 찍고 <유키즈 온 더 블럭> 같은 잘 나가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게 엊그제 일이었는데 지금은 각종 매체들로부터 빠르게 ‘손절’ 당하는 중이다. 국가대표 공격수와 세터로 활약하며 리그 흥행을 이끌었던 슈퍼 쌍둥이는 요즘 ‘학폭 쌍둥이’, ‘꼬얌좌’로 불린다.

 

쌍둥이 배구 선수가 오래 전 학창시절에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제 눈덩이가 됐다. 무서운 속도로 크기를 키우며 굴러내려 온 눈덩이가 대한민국 스포츠계를 강타했다.

 

또다른 학폭 의혹을 받고 있던 남자배구 송명근, 심경섭 또한 폭로 내용 대부분이 사실임을 시인했고 소속 구단(OK금융그룹)은 구단 차원의 사과문을 발표하고 선수들에게는 시즌 잔여경기 출장 징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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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화재 소속 박상하는 학폭 사실을 인정하면서 은퇴를 선언했다. 최근 일어난 학폭 관련 의혹의 당사자가 스스로 은퇴를 선언한 것은 처음인데, 아무래도 서른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학폭 미투는 배구계를 넘어 다른 종목으로 확산됐다. 스포츠계를 넘어 연예계에도 의혹의 불길이 번졌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의혹이 제기되다 보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 증명할 길이 없어 몇몇 건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암튼 의혹의 당사자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이 상황이 졸라 난감할 거다. 사실로 드러나면 한 방에 커리어를 마감할 수 있을 만큼 좋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 피해자에게 뒤늦게 사과하고 합의한다 해도 이전처럼 멀쩡하게 활동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학폭 미투의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 선수나 연예인 말고도 오금 저려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그렇다고 그들을 관리하는 구단이나 소속사에서 “너는 어릴 때 누구 쥐어 팬 적 있어, 없어?” 하고 일일이 물어보기도 뭐할 거다. 물어본다 한들 “예”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으며 설령 미리 알았다 한들 달라질 게 무어란 말인가. “제발 우리 애한테 당한 사람이 폭로 안 하게 해주세요”하고 온종일 기도메타라도 돌려야 하나. 아님 학폭 가해자로 지목되었을 때, 같이 똥물을 튀겨가며 ‘증거 있어?’를 시전해야 하나. 이 또한 추잡하고 험난한 길이긴 매한가지다. (거짓 폭로의 경우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유명인들이 자신의 과거를 상대로 한창 쉐도우 복싱중일 거라는 데에 나는 고 1때 나를 때린 그 놈의 오른 주먹과 오른 발을 걸겠다.

 

지금 걸리면 무조건 조옷댄다.

 

 

이렇게 좋게되는 건 억울하다?

 

스스로 뿌린 씨앗이라지만 만약 학폭 미투로 커리어를 끝맺게 된다면 당사자들도 나름의 억울함이 있겠다.

 

먼저, 자신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나 스포츠계의 경우 스승과 제자 사이든 선배와 후배 사이든 훈육과 관리는 곧 ‘빠따’를 의미했던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동료 선수들 사이의 괴롭힘은 결이 다르긴 하지만 ‘약자에게 가해진 강자의 폭력’이라는 면에서는 동일선상이다.

 

‘리그 존폐가 우려된다’는 관계자의 말은 씁쓸하게도 허언으로 보이지 않는다. ‘학폭 전력 = 커리어 마감’이 공식으로 굳어진다면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살아남을 선수와 지도자는 몇 퍼센트나 될까? 부끄러운 현실이고, 지금 선수생명 위기에 놓은 그들 입장에서는 머릿속에 '억울', '불운’ 같은 단어가 충분히 연상될 법도 하다.

 

학폭이 이루어졌던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학생 신분이었고, 학폭으로 인한 제재와 처벌을 받지 않음으로써 뒤늦게 더 큰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점도 그렇다. 실력이 정말 깡패가 되어 깡패짓을 해도 애써 모른 척하거나 힘써 덮어주었던 지도자들을 비롯한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던 사회, 학교 운동부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온갖 폭력적 행태가 만연해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시절이 그리 먼 과거는 아니었다. 학폭을 저질러도 실력이 좋고 빽이 좋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게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모두에게 독이 된 거다.

 

‘그런 미성년 시절의 잘못으로 인해 평생을 바친 직업을 잃는 건 과하지 않은가’라는 항변, 역시 당사자 입장에서는 못할 것도 없다. 그들이 여기서 선수 생활을 마감함으로써 입게 되는 경제적, 비경제적 손실을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무게와 저울질 해보는 걸 뭐라 할 생각도 없다.

 

마지막으로, ‘만약 우리가 여기서 은퇴한다면, 앞으로 학폭 가해자였던 모든 선수들을 은퇴시킬 거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다. 따라서 이 사태로 은퇴하게 되는 선수가 더 나온다면, 이들 나름대로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고도 나만 더 큰 책임을 지게 됐다’는 나름의 억울 요소가 발생 가능하겠다.

 

 

그렇게 억울해 할 일만은 아니다

 

현재 논란의 당사자가 되고 있는 이들이 가질 법한 억울함, ‘억세게 재수 없었다’는 감정은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질 법한 억울함에 대해 건건이 반박할 여지 또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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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이들은 위에서 이야기한 재수없음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그동안 몹시 운이 좋았다. 어린 시절에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하나,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음에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않고 지금껏 승승장구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났으니 말이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자신들의 재능이 때를 잘 만나 부와 명예를 얻었으니 그것 역시 쉬이 얻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혹시나 포기하게 될 지 모를 앞으로의 기대 수입은 지금까지 누려온 엄청난 행운에 근거한 것이었으므로 그걸 반드시 손실로 계산할 이유는 없다.

 

학폭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만났다는 불운으로 피해 당시 뿐 아니라 이후에도 너무 큰 고통을 겪어왔고 훨씬 많은 것을 잃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승승장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난 가해자의 행운은 곧, 피해자에게는 겹겹의 불운이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 위에 가해자가 부와 명예를 얻는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 소금이 뿌려졌다.

 

운동선수든 연예인이든 어차피 대중의 관심으로 먹고 사는 업이다.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어떤 형태로든 자리를 잃게 된다면, 그건 법적 처벌이 아니라 대중이 등을 돌려 설 자리를 잃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왜 하필 나만 이정도까지 책임져야 하느냐’고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 사실 이건 책임을 지는 차원의 일도 아니다.

 

 

좋됨의 사례가 필요하다

 

이번 학폭 논란의 파장이 어떤 크기로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앞서 말한 대로 이번 논란으로 과거의 자신을 상대로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을 분덜이 차고 넘칠 테니 피해자의 폭로와 계속되고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면 지금 정도의 파장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할 수도 있다.(반대로 지금이 정점일 수도 있다)

 

그 정도로 만연해 있던 ‘과거의 잘못’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전국의 학교와 그 주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운동을 잘 한다는 이유로, 부모가 힘세다는 이유로, 그저 걸리지 않아서 처벌 받지 않거나 적당히 덮고 넘어가는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지금이라고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을까.

 

1차적 책임은 사회와 어른들에게 있고 시스템과 제도를 손 보는 일이 가장 시급하겠지만 ‘조옷의 사례’ 역시 필요하다.

 

지금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라도 언제든 ‘좋게됨’을 경험할 수 있다는 아주 극명한 사례, 그런 본보기 말이다.

 

그러니 학폭 가해 전력이 이미 드러났거나 앞으로 드러날 유명인 여러분,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너무 억울해 하시지는 마시라. 지금껏 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의 저 아래 주춧돌이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으로 놓인 것이라면, 그걸 빼내는 바람에 탑이 무너진다 해도 누굴 탓할 수 있겠나.

 

어쩌면 여러분이 그동안 대중에게 선사한 메달이나 우승컵, 크고 작은 승리와 좋은 작품 보다 더 긍정적인 사회적 영향을 이번 일을 통해 끼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좋됨의 사례’가 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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