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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요약

 

2019년 10월, 지하철 요금 30페소(약 50원) 인상으로 인해 엄청난 시위가 일어났다. 주인공은 중남미(라틴아메리카) 국가 칠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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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칠레에 큰 관심이 없던 우리나라 언론마저 꽤 다뤘던 이 대규모 시위(저항)의 본질은 1973년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그 46년 동안의 칠레 사회에 대한 저항이었다.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대통령으로 군림했던 1973~1989년 동안 ‘신자유주의’를 세계에서 첫 번째로 정착시키며 칠레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하였다. 서류 위의 수치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1980년에 상위 1% 소득이 전체 국민소득의 11%를 차지하던 것이 2019년에는 33%까지 오를 정도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최상위 계층 외에는 갈수록 가난해지는 삶을 살 게 되었다.    

 

피노체트(1915~2006)는 죽었지만, 피노체트가 도입한 독특한 비례대표제로 인하여 불평등의 주범인 피노체트 세력은 여전히 칠레를 지배하고 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에서 물러나기 직전, 그의 세력이 의회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게 하였고, 민주화가 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세력은 유지되며 집권 중에 있다.

 

그리하여 칠레 국민들은 2019년 칠레 시위(저항)를 시작하며, 피노체트 체제 헌법을 수정하려 한다. 이제 그들은 전면적 사회개혁을 원한다. 그리고 2019 칠레 시위의 첫 출발은 15년 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인 중고등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돈이 없으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고, 더이상 국민의 기본권이 아닌 이윤 추구 목적의 사업이 되어버린 ‘교육’의 개혁을 요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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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칠레 시위(저항)

 

피노체트 시절, 온갖 사회간접자본들이 민영화되고, 그중에서도 변화가 가장 시급한 부문으로 손꼽히는 부문은 교육, 연급, 의료이다. 칠레 중고등학생들은 부단히도 지속적으로 교육개혁을 요구했으며, 이 미래세대의 지속적인 교육개혁 시위와 2019년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 시위는 기성세대마저 칠레 사회의 불평등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기사에선 지난 편에 말한 칠레 교육의 실태에 이어 가히 충격적인 연금과 의료의 현실에 대해 다룬다. (지난 기사 링크)

 

 

비정상적 민영연금제도의 시작, 피노체트

 

칠레에서는 민간보험회사(AFP)에만 연금 가입이 가능하다. 경찰과 군인을 위한 국민연금은 별도로 있지만, 일반 시민들은 민간보험회사 중 한 곳을 선택하여 가입해야 한다. 칠레는 일찍이 사회보장제도 도입해 1820년 군인연금제도를, 1924년에는 국민연금제도를 시행한 국가였지만, 피노체트 정부가 들어서고 1981년에 세계 최초로 공적연금 민영화를 단행하였다. 

 

개인저축계좌를 통한 저축 동기를 부여하고, 연기금의 민간 관리를 통해 자산운용의 효율성을 제고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민간보험회사 선택을 통한 경쟁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재정건전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다. 

 

의무적으로 민간보험에 가입하게 되면서 칠레의 총저축량은 늘어났고, 연평균 자산운용 수익률도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가 칠레 모델을 도입하자고 했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연금제도의 효율성에서 칠레 모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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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2017년 열린 '연금 시스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 사진 속에 AFP(민간보험회사)를 없애라는 요구가 담긴 피켓이 보인다.

 

 

민간보험회사만 좋은 칠레의 연금제도

 

칠레의 연금은 가입자가 전액 부담하며, 가입 시 급여액을 알 수 없고, 적립한 기여금과 기여금의 투자수익에 의해서 급여액이 결정되는 방식이므로 투자 손실이 나면 적립한 기여금보다 적은 액수를 수령하게 된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면서 국가 역할을 최소화하는 것이 칠레 연금개혁의 핵심이고, 사실상 ‘개인저축형 연금제도’인 것이다. 

 

칠레 시민들은 평균적으로 남성은 그들이 납입했던 기여금의 38%, 여성은 28%만을 연금으로 받는다고 주장하며 민영연금반대(NO AFP)를 외친다. 민간보험회사의 자산운용 수익률이 높았을 때는 좋았지만, 민간보험회사의 지나친 경쟁으로 기금이 고갈되고 운용수익률이 갈수록 낮아지면서 납입원금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소득자와 실업자, (노동 기간이 남성에 비해 짧은) 여성들은 퇴직 후 생계가 불안해지지만, 납입료가 높은 고소득자들에게는 더 많은 연금을 보장하는 것도 이 제도의 맹점이다. 그렇다고 민간보험회사의 수익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칠레의 독립적 시민단체인 솔 재단(Fundación Sol)은 2019년에 퇴직한 민간연금 가입자의 50%가 148,260페소(약 226,000원)를, 그중에서도 여성의 절반은 25,775페소(약 39,000원)를 매월 연금으로 받는다고 밝혔다. 민영화 당시 은퇴 직전 월급의 70% 수준을 연금으로 받을 것이라는 정부 발표와 달리 실제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최저임금보다 적은 금액을 받고 있다. 

 

칠레 시민들은 이제 민간연금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연금으로 돌아갈 것을 원한다. 은퇴 이후 존엄한 한 끼가 보장되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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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2017년 열린 '연금 시스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

 

 

칠레에는 국가의료보험이 없다

 

칠레 시민들은 ‘칠레에 국가의료보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가의료보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구의 70% 정도가 가입해있는 공공의료보험 국민건강보험(FONASA: Fondo Nacionalde Salud)가 있고, 인구의 17% 정도는 민영의료보험인 건강증진기구(ISAPREs: Las Instituciones de Salud Previsional)에 가입해있다. 

 

국민건강보험과 민영의료보험 중 택일하여 가입하고, 세전 월급의 7%가 보험료로 강제 징수되며, 민영의료보험 가입자는 추가 보험료를 별도로 납입해야 한다. 군인과 경찰이 가입하는 의료보험은 별도로 있다. 

 

그러나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공공의료기관의 의료시스템이 열악한 데다 약값이 너무 비싸 진료를 포기하고 참는 경우가 많다. 민영의료보험도 보장 범위가 적어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다. 보험료에 따라 보장 범위와 갈 수 있는 병원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병원도 운영하기 때문에 지정된 병원이 아니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모순이다. 지정 병원의 수가 매우 제한적이라 여행 중 아프거나 다쳤을 때, 근처에 지정병원이 없다면 집으로 돌아와서 근처의 지정병원에서 가거나 여행지 근처 병원에서 비보험으로 진료를 받아야 한다. 지정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진료비와 약값이 비싼 것도 부담이다. 필요한 날짜만큼 조제하는 것이 아니라 약을 약통째로 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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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보험료 그만 올려라” “이사프레 (보험료 인상은) 더는 안 된다”는 민영보험 무효화 지원단체의 안내문이 칠레 산티아고의 한 전봇대에 붙어 있다. / 이미지 출처-<한겨레>

 

칠레 보건부 자료에 의하면 2020년 민영의료보험의 월평균 보험료는 69,706페소(약 105,000원)이다.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 의료보험료가 40만 원이 넘는다(칠레의 최저임금은 약 49만 원). 가입을 원해도 가임기 여성과 노년층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가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과 노년 인구는 젊은 남성보다 두 배 많은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고, 젊은 시절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했던 남성이라도 나이가 들면 보험사가 과도한 납입료를 요구하기 때문에 의료시스템이 열악한 ‘국민건강보험’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공공의료보험 재정부담이 커지면서 공공의료시스템이 약화하는 사이 민간보험회사의 이익은 지속되고 있다.

 

물론 앞서 말한 ‘교육민영화’와 ‘연금민영화’처럼 ‘의료민영화’도 피노체트가 도입한 것이다. 1981년에 전 국민 의료보험제 대신 도입된 의료민영보험은 다른 사회보장제도 민영화의 명분처럼, 공공분야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제고하고 국민들에게 보험회사 선택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 맡긴 것이다.

 

2014년 집권한 중도좌파연합의 미첼 바첼렛(Michelle Bachelet)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보건 정책을 강화하였다. 소아과 의사 출신이자 보건부 장관이었던 대통령은 공공의료시설 확충을 위해 병원을 건립하고, 원격진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국민의료보험(FONASA)을 개선하였다. 또 남녀 간의 보험료 차이를 없애고 소비자의 의료보험사 이동을 허용하도록 민영보험(Isapre) 시스템을 개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료서비스 격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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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전 대통령 ‘미첼 바첼렛’ (재임 2014~2018)

 

 

칠레 국민들은 헌법에 국가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려 한다

 

2019년 칠레 노동자 절반 정도가 400,000페소(약 60만 원)를 월급으로 받고, 전체 노동자 평균 임금이 620,528페소(약 947,000원)임을 감안하여 부부가 맞벌이를 하고, 중학생 자녀가 있는 3인 가정의 가계지출을 계산해보면, 교육비, 의료보험료, 연금보험료만 해도 한 사람의 월급을 훌쩍 넘는다. 

 

여기에 주거비, 교통비, 식비까지 합치면, 이 가정이 저축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서비스 민영화로 교통비나 전기세 등의 부담이 크고, 칠레의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높기 때문이다. 생수 한 병 가격이 한국의 두 배이다. 

 

코로나 시대 더 벌어진 불평등. 그러나 연대와 협력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만큼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불평등 없는 사회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칠레 집권 우파연합의 2020년 국민투표 광고영상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연대란 시민들의 협력을 뜻하는 것이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40년 전 연금민영화를 주도했던 노동부 장관 호세 피녜라(José Piñera)의 주장, 사회보장제도라는 것은 소위 사회연대(solidarity)라는 윤리적 가치를 내세워 자기들의 명분을 고귀하게 보이려는 흔한 속임수라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의 형이자 현 대통령 ‘피녜라’는 코로나19의 경제 위기 속에서 국가가 재난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민간연금회사에 납입한 금액에서 10% 중도인출을 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칠레 시민들은 헌법에 국가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려고 한다. 

 

2021년 4월에는 제헌의원을 선출하는 국민투표가, 2022년 8월에는 새 헌법 안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다. 새 헌법 제정으로 현재의 극단적인 불평등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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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칠레 시위(저항). 한 시민의 손에 든 팻말엔 “새 헌법이 아니면 죽음을‘(의역)이라 적혀있다.

 

그러나 기존 헌법의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폐기하고, 새 헌법에 원주민과 여성 등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민주사회, 더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지향함으로써 국민이 존엄하게 살 권리를 국가가 보장하는 새로운 칠레로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임수진 (대구가톨릭대 교수)

 

 

 

추천

 

-2019년 대규모 칠레 시위를 직접 경험한 칠레가톨릭대학 민원정 교수의 딴지일보 칼럼기사 (링크)

-임수진 교수가 출연하여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민영화에 대해 다룬 영화 ‘블랙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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