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많은 나라가 한반도를 거쳐갔지만, 지형이나 지정학은 변하지 않았다. 삼국시대가 그러했고, 고려시절 몽고와의 항쟁, 거란과의 전투 등등, 한민족은 기본적으로 산성에 의지해 유목민족과 싸워야 했다. 이러다 보니 산성전투는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조선 성종 때 발행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조선 초기 전국에 759개의 성곽이 있는 걸로 나와있다. 이들 중 산성이 무려 182개로 성들 중에서 가장 많았다. 놀라운 건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산성을 쌓아나갔다는 거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외적을 방비하기 위해서는 산성에 의지해 싸우는 게 최고라고 판단해서 산성 개축과 신축에 열을 올렸다. 농한기를 활용해 백성들을 동원해서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쌓았던 산성을 개축하거나 신축 산성을 쌓았다. 

 

생각해보면, 한반도 지형에서 산성만큼 합리적인 선택이 없다. 한반도 지형의 70%는 산지다. 전통적인 취락형태는 배산임수라고, 앞에는 물 뒤에는 산이 버텨주는 지형에서 사는 게 기본이었으니 전쟁이 발생했을 때 산에 의지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활에 대한 집착

 

common.jpg

영화 <최종병기활>

 

조선시대 활에 대한 집착은 전대의 왕조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당장 나라를 세운 태조 이성계 본인 스스로가 신궁이라 불렸던 인물이었고, 조선이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나라란 것도 있다.

 

선비들이 갖춰야 할 기본소양을 육예(六藝)라 했는데, 여기에 궁시. 즉, 활쏘기가 들어가 있다. 영조가, 

 

“공자가 이르길 활쏘기로 경쟁하는 것이 군자답다고 하지 않았느냐?”

 

라면서 활쏘기에 매진했고, 조선시대 왕이 함께 하는 활쏘기 의례인 대사례가 빈번히 개최된 걸 보면, 조선에서 활쏘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창덕궁에 부용정(芙蓉亭)이란 연못이 있다. 정조가 낚시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고, 규장각의 신하들을 유배(?!)보낸 장소이기도 하다. 정조는 활쏘기에 미쳐 있는... 아니, 일종의 구도자적인 심정으로 활을 쏘던 이였다. 1순은 5발인데, 50발을 쏘면 49발을 맞추는 이였다. 

 

“내가 요즘 활쏘기에서 49발 명중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는 멘트를 날렸다. 대단한 자신감과 자부심인데, 이건 빈말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을 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49발을 맞춘 기록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정조가 규장각의 총신들에게도 문무겸전을 말하며 활쏘기를 권장한 건 당연한 일일 게다. 툭하면 활쏘기를 시켰는데, 이때 거의 늘 꼴찌를 했던 게 ‘정약용’이다. 이분은 몸이 비대하고 둔하다며 군사 쪽에서는 늘 젬병이었다(정조가 조선시대 필드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 병학통을 선물로 건네자, 자신을 군사분야에 활용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며 괴로워했을 정도였다). 정조는 그런 정약용을 부용정에서 배를 띄워 연못 한 가운데 있는 섬으로 잠깐씩 유배를 보냈다. 장난 아닌 장난인데, 정약용이 활을 못 쏘긴 했는가 보다)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군 체계를 보면, 팽배수, 그러니까 방패를 든 병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활을 차고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병종을 막론하고 활을 지참시켰다. 무과 시험 역시 말타기와 활쏘기를 확인하는 시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기생들까지 활쏘기를 할 정도였으니, 활쏘기는 그야말로 온 국민의 스포츠라 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이 활을 쐈는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난중일기는 1593일 분인데, 이 안에서 이순신 장군이 총 264회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대략 6일에 한 번씩 활을 쏜 걸로 나온다. 한 번 활을 쏠 때마다 평균적으로 35발을 쐈으니까, 임진왜란 7년 동안 이순신 장군은 최소 9천 발 이상의 화살을 쏘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활의 한계

 

문제는 활쏘기가 실전에 얼마나 효용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만약 이렇게 미친 듯이 활쏘기에 매진했는데, 실전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면? 그 자체로 바보짓을 한 게 아닐까? 조선인들의 활쏘기에 대한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책이 하나 있다. 바로 <무예제보(武藝諸譜)>다. 

 

무예제보.jpg

<무예제보(武藝諸譜)>

 

임진왜란 직후 조선 조정은 왜란의 원인, 그 중에서 조선군이 고전했던 원인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을 한다. 

 

“우리 군대가 왜 이렇게 힘들게 싸웠을까?”

“우리 군대는 야전에서 왜 일본에게 밀린 걸까?”

“우리는 왜 성벽을 의지하고만 싸우려 한 걸까?”

 

임진왜란이 발발 직후에 벌어진 용인전투(1592년 7월 13일)를 보면 조선군의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왜군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 무혈 입성했고, 조선 전토는 뒤이어 두 갈래로 갈라져 평양방면으로 진격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경도 쪽으로 진격하던 가토 키요마사에 의해 유린당하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이 때 들고 일어난 게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뭉친 삼도 근왕군(三道 勤王軍)이었다. 

 

이들은 병력수로만 따져도 최하 7만의 대병력이었고, 초기에는 사기도 높았다. 결정적으로 시기가 절묘했다. 이 시기에는 고니시와 가토가 북진을 하는 시기였기에 한양을 탈환했다면, 이들을 배후에서 압박하는 것과 동시에 보급을 끊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초기에 변곡점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용인 땅에서 이 7만의 대병력이 와키자가 야스하루의 1,600명에게 허무하게 당한 거다(전초전에서 패하고, 사기가 떨어져 군대가 흩어졌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병농일치의 국가였던 조선이기에 여기저기 급조한 병력에, 지휘체계도 불분명했고 비효율적이라서 한 번의 전투 패배로 병사들이 흩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전투의 피해는 의외로 적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전투로 인해 까딱했으면 조선의 곡창지대이자, 보급창고였던 삼남지방이 날아갈 뻔 했다. 

 

중요한 건 이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는 대목이다. 

 

조선군은 원거리 투사병기인 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칼이나 창 같은 근접병기에 대해 소홀했고, 근접전에 약했다. 성벽에 의지해 화살을 날릴 땐 별 문제의식이 없었지만, 야전에서 단병접전에 들어갔을 때는 큰 문제가 됐다.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로 만든 책이 <무예제보>다. 왜구와의 전투로 잔뼈가 굵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継光)이 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바탕으로 곤봉이나 장창, 방패 같은 6개의 근접병기를 훈련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조선의 ‘활’ 편식에 대한 자기반성적 의미가 담긴 책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조선군에 끼친 영향은 정말 대단했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 한 가지를 말하라면 단연 ‘조총’이다. 임진왜란 시작과 동시에 조선군은 조총을 국산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이순신 장군도 정철총통을 만들었지만, 역시나 방아쇠를 만들지 못했다). 

 

다행히 항왜(降倭 : 항복한 일본군)를 통해 조총에 대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게 됐고, 임진왜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우수한 화약무기 제조기술이 결합되면서 빠르게 조총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이러다 보니 정묘호란 정도가 되면, 조선군의 주력은 조총수가 됐다. (명나라가 심하전투 때 믿었던 게 강홍립이 끌고 간 포수들이었다. 1만 3천의 병력중 핵심이 되는 건 5천의 포수들이었는데, 이 당시 명나라 장수들은 이 포수들만 따로 빼 먼저 돌리려 했다. 광해군도 이 부분에 대해선 재삼재사 강홍립에게 당부했지만, 그 결과는...) 나선정벌 때도 조선군 포수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매치락 머스킷을 들고 플린트 락 머스킷과 싸워 이기다니).  

 

남한상.jpg

영화 <남한산성>

 

common (1).jpg

영화 <최종병기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게 한국 영화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조선군이 조총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군은 조총에 의지해 청나라 군과 일전을 벌였고, 소소한 전투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같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 <최종병기활>을 보면, 박해일이 편전(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화살)을 날리며 청나라 군을 죽인다. 이게 뭘까? 같은 배경의 전쟁인데, 누군 총을 쏘고, 누군 활을 쏜다. 고증이 잘못된 걸까? 

 

아니다. 둘 다 맞다. 

 

다른 나라에선 화약무기가 등장하고 나선 활이 서서히 퇴조하다가 조금 지나면 아예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런데, 조선은 특이하게도 조총을 손에 넣고, 이걸 주력으로 사용하면서도 활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않은 ‘특이한’ 나라이다. 

 

이 정도면 활 성애자로 봐야 할까? 조선의 활에 대한 집착은 나라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끈질기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