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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세계 각국이 사회, 경제적 위기에 처한 요즘, 다른 이유로 위기에 처한 나라가 있다. ‘황금의 땅’이라고(Golden Land) 불리는 미얀마이다. 

 

2021년 2월 1일 이른 새벽 시간, 군인들은 대통령, 국가 고문 ‘아웅산 수찌’와 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민주화 운동 인사 등을 감금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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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이날은 2020년 11월 8일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의회를 소집하기로 한 날로 주요 인사들은 수도 네피도(Nay Pyi Taw)에 모여 있었다. 

 

21세기에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는 군사 쿠데타 소식에 미얀마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각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름의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혹자는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일이라는 분석을 내어놓기도 했다. 

 

이번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을 위시한 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킨 당일 ‘2008년도 헌법 조항 417과 418’에 근거하여 앞으로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한다는 성명을 냈다. 쿠데타의 이유로는 지난 11월 총선 이후 지속해서 제기되어 온 부정선거 의혹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음에 있다고 밝혔다. 

 

올해 1월 아웅산 수찌 정부와 군부 간에 부정선거 의혹 관련 협상이 진행되었다고 알려졌는데, 군부가 제시한 최종 기한인 1월 27일까지 아웅산 수찌 정부가 관련 사안에 대한 조사 여부를 알리지 않았고, 협상은 최종 결렬되었다고 알려졌다. 

 

지난 2015년과 2020년도 총선에서 아웅산 수찌의 민족민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은 두 차례나 압승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민간 정부가 수립되며 지난 1962년부터 계속되어온 군부의 직간접 통치에 마침표를 찍는 듯했다. 그러나 군부는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켜 미얀마를 과거로 돌리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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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가 발발한 다음 날인 지난 2일, 미얀마 북부 만달레이 시내에서 군인들이 탄 장갑차가 이동하고 있다.

 

이번의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얀마 군부가 정권을 잡은 1962년부터의 간단한 미얀마의 정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현재만을 말하는 단편적 사실 몇 개로는 현재의 미얀마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미얀마뿐 아니라 어떤 나라든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과거를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본 기사에서 단순히 이번 군사 쿠데타만이 아니라 미얀마 군부 정권이 어떤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미얀마 정치, 경제,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또 자신들을 국가의 수호자(guardian)라 여기는 멘탈리티(사고방식)를 어떤 행태로 나타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미얀마의 군부 정권에서 민주 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군부에 의해 공학된(engineering) 계획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례적으로 오래 집권한 미얀마 군부 

 

“This is Burma, and it will be quite unlike any land you know about.”

이곳은 버마(미얀마)다, 그리고 이곳은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땅과도 매우 다를 것이다.

 

-러디어드 키프링(Rudyard Kipling), 1898-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미얀마 군부 정권의 역사는 세계의 다른 군부 정권과 비교해봐도 이례적으로 긴 편에 속한다. 정치학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수명을 분석한 통계가 있는데, 이를 보면 미얀마 군부 정권이 얼마나 오래 집권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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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쿠데타를 일으킨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최고사령관이 2015년 수도 네피도의 집무실에서 집권 국민민주연맹(NLD) 대표인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과 악수하고 있다. / 이미지 출처-<AFP연합뉴스>

 

저명한 정치학자 게디스(Geddes)가 1999년도에 발표한 권위주의 체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논문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겠다. 이 논문은 정치 체제 및 민주화 연구에서 여전히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녀는 이 연구에서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평균 수명은 7.3년이라고 제시했다. 

 

일당(single-party) 권위주의는 35.5년, 개인주의적(personalist) 권위주의는 18.8년인 것에 비해 매우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2년부터 시작돼 2011년도 준민간정부로 권력을 이양할 때까지 4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군부 정권을 유지한 미얀마의 사례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2011년에 민간으로 권력을 이양한 것도 표면적일 뿐, 이번 쿠데타 사태를 봐도 알 수 있듯 실질적 권력은 군부가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군부 통치기간은 49년이 아니라 59년이 더 맞는 표현인 듯하다.   

 

그렇다면 미얀마 군부 정권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군부 정권이 시작된 사건인 ‘1962년 군부 쿠데타’는 독립 이후 불안정했던 정치, 사회적 환경에서 태동했다. 당시 미얀마는 소수민족 독립 세력과의 내전, 연방 정부 수립 문제, 집권 세력 내부의 파벌 싸움 등 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이에 군부는 민간 정부가 정치, 사회적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있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이는 의회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미얀마 비극의 시작: ‘민족의 영웅’ 아웅 산의 죽음 

 

미얀마는 1948년도 1월, 아웅 산(Aung San) 장군이 중심이 되었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nti-Facist People’s Freedom League, AFPFL)의 주도하에 독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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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미얀마의 독립운동가로 현재까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아웅산 수찌 국가 고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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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의 가족 사진. 맨 왼쪽의 아기가 아웅 산 수찌이다.

 

독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AFPFL은 의회 민주주의를 채택한 헌법을 제정하고 소수민족과 연방 정부 수립을 논의하는 등 신생 국가로서 국가 건설을 위해 애를 썼다. 1947년 2월에 버마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삥롱 조약(Panglong agreement)을 체결하며 연방 정부 수립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등 독립을 위한 준비는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을 6개월 남기고 그해 7월 19일 미얀마를 하나로 묶어주던 아웅 산 장군이 암살당하며,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혼란은 1948년 꿈에 그리던 독립을 이룬 이후에도 지속된다.

 

아웅 산 장군이 죽은 후, 미얀마 여러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인물이 부재하게 되었고, 수도 랑군(Rangoon, 현재의 양곤)을 포위할 정도로 세력이 강했던 카렌민족연합(Karen National Union, KNU)을 포함하여 샨, 카친족 등 소수민족 독립 세력들은 독립을 요구했다. 

 

게다가 정권을 주도했던 AFPFL 내부에서도 정책적 노선의 차이로 분열이 일어났다. 총리였던 우누(U Nu)와 타킨틴(Thakin Tin)이 주도하는 Clean AFPFL과 쪼네인(Kyaw Nyein)과 바쉐(Ba Swe)가 이끄는 Stable AFPFL로 쪼개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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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샨주남부군이 식민지 독립 66주년을 맞아 도열한 모습. 카렌, 샨, 카친족 등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은 정부군에 맞서 수십 년간 무장조직을 운영 해 왔다. / 이미지 출처-<방콩포스트>

 

AFPFL의 파벌 싸움과 지속되는 내전으로 인해 정세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 후 정권을 잡은 우누 정부은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결국, 1958년 우누 수상이 물러나고, 네 윈(Ne Win) 장군이 과도 정부(Caretaker government)를 수립하며 임시로 정국을 이끌게 된다.

 

과도 정부 유지 기간이 지난 뒤, 우누가 이끄는 세력은 1960년 총선거에서 승리하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우누 정권은 연방 정부 설립 정책, 군대 개혁, 불교의 국교화 등을 추진하려고 하였고, 추진 과정에서 여러 정치,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해 사회 혼란은 계속되었다.

 

 

군부 정권의 시작, 1962년 쿠데타

 

혼란이 지속되자 1962년 3월 2일, 네 윈 장군은 땃마도(미얀마군의 공식 명칭)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군인들로 구성된 혁명 의회(Revolutionary Council, RC)를 설립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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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직후 당시 수도 랑군(양곤)에서 미얀마군(왼) / 네 윈 (오). 식민지 시절, 아웅 산과 네 윈은 독립운동 동지였다.  

 

네 윈과 땃마도는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 외세 배척 및 국가 단결이라는 정신하에 미얀마의 자주, 독립을 강조했다. 당시 추구했던 소위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of Socialism)가 그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네 윈은 집권 후, 사유재산 국유화 및 사회주의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네 윈 정부하에서 60년대를 보내며 미얀마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네 윈은 1974년 버마사회주의연방(The Socialist Republic of the Union of Burma)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공표하며, 표면적으로 일당-의회 체제를 수립했다. 

 

여기서 일당이라 함은 버마사회주의계획당(Burma Socialist Program Party, BSPP)을 의미하는데, 말이 정당이지 군인, 경찰, 공무원 등을 당원으로 한 군부 정권 친위조직에 가까웠다. 

 

네 윈은 지난 사회주의 경제 정책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시장 경제 정책(큰 틀은 여전히 사회주의)으로 선회하기도 했는데, 경제성장은 권위주의 혹은 독재 정권에서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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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오른쪽). 네 윈은 미얀마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버마식 사회주의는 성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70년대 조금씩 회복하던 경제성장률은 1980년대 들어 추락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1988년 미얀마에는 대규모 민주 항쟁이 일어나 본격적으로 군부 정권에 민주화를 열망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민주 항쟁은 굉장히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예상치 못하게 시작하였다.  

 

문기홍 (시드니대학교, 정부 및 국제관계학과 박사과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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