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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953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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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9월,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소속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고, 국가 주권을 승인받았다. 이른바 전후 일본의 "독립"이다.

 

일본 정부가 직면했던 급무는 피폐된 산업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특히 "해운 대국 일본"의 부활은 기간 산업 재건이라는 과제 중에서도 특별한 무게를 갖고 있었다. 조선업이 전후 일본의 산업 복구의 선투 타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복구금융금고를 설립, 기간 산업을 영위하는 민간 회사에 우선적으로 융자하고 있었으나 쇼와덴코사건을 계기로 동 금고에 의한 융자는 축소되어 버린다(쇼와덴코사건에 대해서는 지난번 글을 참조-링크).

 

그렇다고 '산업 복구'라는 과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복구금융금고에 의한 융자를 대신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정부는 정부가 원조 물자를 불하해서 얻는 자금을 충당할 특별 예산을 마련한다. 미국에서 받은 무상 원조 물자를 팔아넘겼을 때에 들어올 달러 가액에 상응하는 엔화, 이것을 적립한 자금을 충당할 예산 말이다.

 

이 특별 예산에 의한 돈이 1949년부터 선박 관련 업계에 융자되기 시작되었는데 그 조건이 매우 유리했다. 13년 분할 상환, 또 원금 상환은 3년간 유예. 융자 규모 역시 파격적이었다. 1953년 제9차 계획 조선까지 총 290척, 총액 1,890억 엔(현재 가치로 약 40조 엔)에 달하는 규모였다.

 

해운용 선박 수는 해운사가 정부에서 배당받고 조선사에 발주하는 방식이었다. 정부 배당수가 수익에 직결하는 구조인 만큼 각 해운사는 건조 배당수를 획득하기 위해 혈안이었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터진 것도 있어서 수요가 늘어난 상황에서 해운업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휴전되면서 양상은 일변한다. 해운 수요가 격감하며 해운업계는 불황에 빠지게 된다. 해운 업계는 위와 같은 융자 조건보다 한층 더 유리한 조건으로 융자를 받으려고 획책했고,

 

외항선박건조융자이자보급법

(外航船舶建造融資利子補給法)

 

으로 결실했다. 이 법에 기초하여 대형 해운사가 조선사에 배를 발주하기 위해 받은 융자로 인한 이자는 절반이 되었다. 너무나 유리한 융자 조건에 더해서 국회에서 이 법을 제정하기 위해 쓰인 심의 시간이 고작 이틀 뿐이었다. 속된 말로 "냄새나는" 현상이지만 검찰은 의외의 구석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1. 사건의 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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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이 신타로(河井信太郎) 검사

 

1953년 여름. 한 유명한 사채업자가 도쿄지검 특수부에 신고를 한다. 자신이 보유하던 어음 등이 도난당했다는 내용. 신고를 접수한 카와이 신타로(河井信太郎) 검사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피해 내용에 포함되었던 어음 중에 야마시타기선(山下汽船)이 발행한 1,000만 엔 짜리 어음이 3장이나 포함되었던 것이다.

 

카와이 검사가 느낀 위화감은 바로 여기서 왔었다. 야마시타기선 정도의 대형 해운사가 자금을 조달할 경우에는 먼저 주거래 은행이 자금 지원에 나서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액의 어음을 발행했다면, 아예 회사의 경영 상태가 부실히지 않은 이상 회사 임원이 개인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거나 회사 차원에서 비자금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말이다.

 

해가 밝자 특수부는 야마시타기선 등을 대상으로 가택수색에 착수한다. 그리고 요코타 아이사부로(横田愛三郎) 야마시타기선 사장의 일기장과 "S 200", "I 300" 등 알파벳과 숫자가 적힌 메모지가 발견된다. 특수부는 야마시타기선 외의 회사 간부들도 출두시켜 조사, 철저히 수사하기로 결정한다.

 

메모지의 "S"나 "I"가 누군지를 아는 요코타 사장을 특별배임 용의로 체포하였다. 익일, 해운사의 업계단체인 선주협회 사무실을 수색했고, 선주협회가 여당 자유당의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간사장에게 2,000만 엔(현재 가치로 약 4억 엔)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마어마한 액수이지만 새로 제정된 이자보급법에 의해 면제될 이자 액수가 약 33억 엔이었다고 하니 2,000만 엔은 선주협회 입장에서 충분히 굿딜인 것이다.

 

 

2. 특수부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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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지검 특수부는 사토 간사장 체포를 향해 수사를 본격화한다. 익년 1월 15일에 "요코타 일기"에 등장한 해운사 사장들을 잇따라 체포했고 25일 운수성(運輸省) 간부를 체포했다. 26일에는 자유당 부간사장인 아리타 지로(有田二郎) 의원이 정치인으로서 처음 체포된다.

 

특수부의 공세는 적어도 사토 간사장에게는 검찰의 폭주로 비쳤을 것이고, 그 폭주를 억누르지 못하는 이누카이 타케루(犬養建) 법무대신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사토 간사장을 부추겼을 것이다.

 

'왜 법무대신 자리에 있는 이가 검찰을 억누르지 못하는 건가?'

 

사토 간사장도 이누카이 법무대신도 2차대전 후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후진을 육성하기 위해 조직한 정치인 그룹, 소위 말하는 "요시다 학교" 출신이다. 그 점에서 둘은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그러나 이누카이는 애초 민주당 소속 의원이었고 쇼와덴코 사건으로 체포된 당 총재 아시다 히토시의 자리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가 자유당에 입당한 것은 의회 내 보수연계를 꾀한 결과에 불과했다.

 

한편 사토 간사장은 쇼와덴코 사건 후 다시 요시다 시게루가 수상으로 복귀하면서 관방장관으로 발탁한 인물. 당 간사장을 시작으로 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자 요시다 정권의 핵심 인사다. 말 그대로 자유당 요시다 정권의 “본류”다. 소속한 당은 똑같아도 충성심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 정치인의 체포자가 나온 26일자 일기에서 사토 간사장은 조마조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케다 군(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요시다 수상의 오른팔로 당시 사토와 어깨를 나란히 한 유력 국회의원) 등과 요근래 조선 문제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음. 꽤나 어려운 문제이므로 취급하기 실로 어렵다. 정계를 위해, 또 국제 신용, 국내 정치라는 면에서도 진심으로 (더 큰 문제로) 발전되지 않기를 바람.”

 

당시 조선 업계에서는 선박을 발주하는 해운사가 조선회사로부터 건조대금의 1% 수준의 리베이트를 받는 관행이 만연해 있었다. 그 일부가 뒷돈으로 정계에 흘러가고 있는 구조였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사토는 당을 위해 선주협회로부터 평상시보다 많은 2,000만 엔을 받았을 뿐인데, 당 아니면 정권 차원에서 나를 지켜주는 것은 당연하지 않으냐는, 본인의 기준에선 지당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쇠를 쥐고 있는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검찰을 적극 제어하려 하지 않고 있는 행태가 사토에게는 정치의 문법에 어긋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3. 사채업자의 증언

 

1954년 2월 19일 중의원 결산위원회. 사건의 실마리가 된 도난 사건을 신고한 사채업자가 참고인으로 출석해서 충격적인 증언을 한다. 

 

“조선 융자에 대해 현직 대신을 포함한 정・재계의 중요인물이 요정(料亭)에서 간담을 했다.”

 

증언을 들은 결산위원장은 “요시다 내각이 무너지겠어!”라고 외쳤다고 한다. 증언이 국회라는 공개된 자리에서 이루어진 만큼 금방 국민에게도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국민이라는 원군을 얻은 검찰은 공세를 펴기 시작한다. 3월에 들어 이자보급법 제정을 위한 정계 공작의 중심인물인 마타노 켄스케(俣野健輔) 이이노해운(飯野海運) 사장이 체포된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선박회사가 자유당 간사장인 S씨한테 의뢰하러 갔더니 ‘좋아, 그 법률안을 당 차원에서 밀어주겠어. 그 대신 지난번 선거 때 당이 진 2,000만 엔의 빚이 남아 있으니 그 2,000만 엔을 갖다 주게’라며 S씨가 요구했고 … 해운회사들의 모임인 선주협회가 아무리 금리부담이 가벼워질지 계산해 봤더니 2,000만 엔은 싼 액수라는 결론이 나서 S간사장한테 내밀었더니 ‘그럼 해줄게’라는 것으로 됐다”

 

라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조사에 임한 카와이 검사는 분노하며, S를 꼭 체포할 것이라 마음속으로 맹세한다.

 

한편 보도를 통해 검찰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게된 사토의 초조함은 더해가기만 했다. 사토는 3월 10일 일기 내용은 이렇다.

 

"(지검에 임의 출두한 의원한테 그간 경과를 듣고 나서 자리를 같이 하던 이누카이 법무대신에게) 내 건은 이제 정계에 미칠 영향이 크므로 잠시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지만, 이누카이 군의 의향은 참으로 애매하며 의지할 데가 없을 듯함"

 

신문 보도를 통해 자신이 수사 대상이 되었음을 아는 상태인데다 이누카이가 그때까지 검찰에 의한 수사를 인정해온 것을 지켜보는 사토의 심정이었다.

 

4월에 들어 사토 간사장의 초조감을 외면하듯 특수부는 수사에 박차를 가한다. 2일에는 다섯 번째 전면 수색을 실시, 조선공업회 부회장이자 이시카와지마(石川島)중공 사장인 도미츠 토시오(土光敏夫)에 더해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3명을 체포했다. 10일에는 자유당 본부를 조사하며 당 본부 회계 책임자를 수뢰(뇌물을 받음) 방조 용의로 체포했다.

 

사토 간사장은 국회의원 체포를 막지 못한 이누카이 법무대신에 대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갖기 시작했고, 수상인 요시다 시게루 역시 이누카이의 소극적인 태도를 방관하기가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당내 정세를 자세히 보고하며 수상의 결단을 구함. (당 회계 책임자의) 체포 건에 대해서는 수상도 중대한 결의를 한 듯 이누카이를 질책함.”

 

사토 간사장의 4월 11일 자 일기의 내용이다. 이제 이누카이 법무대신의 거취가 정권과 당 차원의 문제가 된 셈이다.

 

 

4. 드디어 “S 200”과 “I 300”이 수사 대상으로

 

조선 의혹 사건의 실마리가 된 야마시타기선(山下汽船) 사장이 남긴 메모, “S 200” 그리고 “I 300”.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이것들이 “사토 간사장에게 200만 엔”, “이케다 하야토 의원(사토와 함께 “요시다 학교”의 필두 격. 후일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에게 300만 엔”을 뜻하는 것이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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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간사장(좌)과 이케다(우)

 

사실 이케다는 2월 말부터 특수부에 의한 조사를 받았으나 돈을 받은 것으로 의심된 시점에 미국 방문을 앞두고 있었기에 야마시타기선으로부터 이케다로 간 금전이 “전별금”이었다는 해명도 어느 정도 말이 된다는 사정이 있었다. 특수부는 신중을 기하여 일단 이케다를 놔두기로 했다.

 

한편 사토 간사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되었다. 4월 12일 특수부의 카와이 검사가 사토한테 임의로 출두하기를 요청했으나 그 정보가 보도관계자에게 유출이 돼버려서 결국 사토 간사장에 대한 조사는 14일 낮까지 미루어졌다.

 

같은 날 사토의 일기에는 카와이 검사에게 조사를 받은 것, 이자보급법 제정 당시 상황과 함께 마타노(이이노해운 사장), 요코타(야마시타기선 사장), 도코(이시카와지마중공 사장)와의 관계나 이들과의 금전 수수에 대해 물어봤다는 것이 기술되어 있다.

 

“특히 지난 가을에 마타노 군한테 받은 200만 엔에 대해, 그 수령 당시 상황에 관해서는 마타노 군으로부터 정치자금이 필요하겠고, 여기에 200만 엔 있으니 써주십사라는 말이 있기에 감사의 뜻을 전하고 가져갔다. 또 당에 대한 기부인 선주협회 및 조선공업회 것은 단순한 정치자금성 기부로 법안과는 상관없다고 (조서에) 명기시킴.”

 

카와이 검사가 이러한 진술에 납득할 리가 없고, 사토 역시 특수부의 조사가 이렇게 끝날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사토는 서둘러 주임 변호인인 마츠자카 히로마사(松阪広政)를 만난다. 그는 2차대전 중 검사총장을 역임한 인사로, 코이소 내각, 스즈키 내각에서 사법대신을 맡아 법조계 뿐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거물로 통하는 인물이다.

 

다만 사토는 자신에 대한 체포장이 집행될 시나리오도 예상하고 있었다. 사토는 오가타 타케토라(緒方竹虎, 당시 부총리)와 이케다 하야토를 만나 자신이 체포될 경우의 내각 개편에 대해 논의했다. 그리고 “이 경우 이누카이(법무대신)을 ‘정리’해서 법조계에서 새 대신을 등용”(17일 자 사토 일기)하는 방안, 즉 '이누카이 법무대신의 경질'을 건의해 두었다.

 

그리고 4월 17일. 사토는 도쿄지검의 바바 요시츠구 검사정(検事正, 각 지방검찰청의 장)한테 재조사를 구하는 상신서(上申書)를 제출했고 ,바로 그날 밤 카와이 검사에게 두 번째 조사를 받았다.

 

 

5. 흔들리는 법무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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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타 부총리

 

사토 간사장이 수비를 굳히며 새로운 정권 구상을 제기해서 검찰 품에 뛰어들어 조사를 받고난 후, 이누카이 법무대신이 갑자기 오가타 부총리에게 사의를 전한다. 요시다 수상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사택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기에 내각은 실질적으로 오가타 부총리가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가타 부총리에게 있어서 극히 어려운 극면이었다. 이누카이의 사의를 받아들여 법무대신을 교체한 다음, 새로 법무대신이 된 이에게 특수부 수사를 그만두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조선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를 억누르게 하기 위해 법무대신을 경질시킨 것으로 비칠 우려가 있다. 가령 현역 대신이 먼저 사표를 냈다 하더라도 항간에서 그런 사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한편 이누카이를 계속 법무대신 자리에 앉힐 경우 조선 의혹 수사가 계속 이어지며 사토가 체포되는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요시다 내각의 핵심인사가 거액 뇌물 사건의 실행범이 되며, 뇌물 자체는 자유당에 흘러갔다는 사실이 재판에서 확정되면 정권을 흔드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 확실했다.

 

어느 쪽을 택해도 요시다 정권이 궁지에 밀리게 될 것은 명백했지만, 오가타 부총리는 후자의 길을 택했다. 즉 이누카이 법무대신을 유임시키고, '사토 간사장의 체포를 미루게 하도록 검사총장에게 지시하라'는 답을 이누카이에게 전했던 것이다.

 

검찰은 4월 17일, 19일, 20일에 걸쳐 “검찰 수뇌 회의”를 열었다. 회의 자리에는 사토 토스케(佐藤藤佐) 검사총장을 비롯, 도쿄고검장, 도쿄지검 검사정(検事正, 지검의 장), 카와이 검사 등 주임검사, 법무성 간부가 모였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인 만큼 신중론도 나왔으나 바바 검사정과 카와이 주임검사는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다 확보되어 있으니 먼저 사토 간사장을 체포하고 이어 이케다를 체포하자고 주장했다. 회의는 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사토 토스케 검사총장은 이누카이 법무대신에게 사토 간사장 체포를 허락해달라 요청했다. 사토와 이케다를 겨냥한다면 증회(贈賄, 뇌물을 줌) 측 사장들을 구류하는 중에 둘을 구속해서 조사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누카이 법무대신은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