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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요약

 

약 한 달 전 미얀마에서 발생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2008년도 헌법 조항 417과 418’을 근거로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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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에서 이번 군사 쿠데타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린 모습. / 이미지 출처-<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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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도시 만달레이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한 시민이 군경에 구타를 당해 피를 흘리면서 끌려가고 있다. / 이미지 출처-<로이터 연합뉴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 수찌 국가 고문,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을 감금하며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미얀마의 헌법과 시스템상 1962년 이래 미얀마는 항상 군부의 손아귀에 있었다. 2011년 준민간정부로 권력을 이양되었다고 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영국으로부터 미얀마 독립을 앞둔 6개월 전, 미얀마를 하나로 묶어주던 ‘민족의 영웅’ 아웅 산이 암살되며 미얀마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아웅 산이 죽은 뒤, 독립건국 세력(AFPFL)이 쪼개지고 소수 민족들은 독립을 요구하며 내전이 발발하는 등 독립이 된 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혼란이 지속되던 1962년, 네 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며 군부 정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네 윈은 ‘버마식 사회주의’를 추구했고, 1974년 헌법을 개정하며 독재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의 정권하에서 미얀마의 경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미얀마는 세계 10대 빈곤국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1988년 랑군(현재의 ‘양곤’)의 대학생들끼리 벌인 사소한 말싸움이 도화선이 되어 군부 정권에 대한 불만이 터지며 미얀마 최대 민주항쟁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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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민주 항쟁에서 연설하는 아웅산 수찌.

 

전국적 규모의 민주항쟁으로 인해 당시 군부는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했으나, 이런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군부 내 다른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신군부는 이미 네 윈 정권에서 수용하기로 했던 국민의 요구 ‘다당제 선거’를 수용했다. 40여 년 만에 총선이 치러지고 민주항쟁의 열기를 반영하듯 아웅산 수찌가 이끄는 NLD(민족민주동맹,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은 총 492석 중 392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신)군부와 후속 조치를 두고 충돌이 벌어졌고, 결국 군부의 주장대로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새 헌법을 논의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기구(국민 회의)의 구성원은 의회 다수인 NLD가 아닌 친군부 성향의 인사들로 포진이 되었다. 

 

NLD는 이런 부분을 끝까지 비판하였고, 이를 빌미 삼아 군부는 NLD를 더 이상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새 헌법 제정 논의는 다시 시작하였으나, NLD는 참여하지 않았다

 

군부 정권과 NLD의 의견 차이로 인해 1996년 국민 회의가 무기한 휴정에 들어감에 따라 헌법 개정 및 체제 이행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2003년 8월 31일 당시 총리를 맡고 있던 군부 내 온건파 킨늉 장군이 ‘7단계 로드맵’이라는 정치 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전까지의 정치 개혁 논의 양상과는 다르게 단계별로 비교적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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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아웅산 수찌와 당시 대통령 딴 쉐(재임 1992-2011). 킨늉 장군과는 달리 딴 쉐는 민주화 세력에게 강경파였다.

 

물론 각 단계별 소요되는 기간 및 자세한 단계별 이행 방안 등이 제시되지 않아 단순한 정치 수사에 그친다는 비판도 있었다. ‘7단계 로드맵’은 소위 미얀마식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규율 민주주의(disciplined-flourishing democracy)”의 실현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휴정 상태에 있던 국민 회의를 재소집하여 새 헌법 제정을 위한 논의를 재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7단계 로드맵 발표 이후 약 9개월만인 2004년도 5월 국민 회의를 다시 개최하였다. 

 

하지만, 야당인 NLD는 2003년 군부에서 용역을 고용하여 NLD인사들을 공격한 Depayin 사태의 진상 규명 및 군부가 폐쇄시킨 NLD 지부 재개를 요청하며, 국민 회의에 불참을 선언하였다. 

 

 

합법적으로 군부를 절대 권력자로 만든 ‘2008년도 헌법’이 친군부 대표단에 의해 통과되다

 

첫 번째 국민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8개 분야의 대표단이 초청되었다. 총인원으로만 따지면 1,086명이 초청되어 지난번 회의보다 많은 인원이 초청되었다. 하지만, 그 비율을 살펴보게 되면 더욱 군부 정권의 편의에 맞추어 대표단이 구성되었다. 

 

기존 107명을 차지했던 의회 대표 숫자는 NLD의 불참 등으로 인해 13명으로 대폭 줄었고, 정당 대표 역시 29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국민 회의 소집 기구가 임의로 선발을 할 수 있는 민족 대표의 숫자는 약 3배가량 늘어 총 633명을 차지했다. 

 

여기서 대표단에 포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군부 성향의 인사들이었는데, 당시 군부 정권의 대중 지지 기반으로 활동하던 연방단결발전연합(Union Solidarity and Development Association, USDA) 소속 사람들을 대표단으로 뽑았기 때문이다.

 

2007년 9월 국민 회의는 성공적으로 회의를 마쳤다고 자축하며 헌법 제정을 위한 골자를 모두 마련하였다. 이어 설립된 헌법 개정 위원회는 그해 12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새 헌법 작성을 마쳤다. 그리고 2008년 5월 태풍 나르기스의 피해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10일과 24일 두 차례로 나누어 국민 투표를 시행했고, 찬성 92%라는 수치로 헌법을 통과시켰다. 

 

 

‘2008년도 헌법’은 어떻게 군부를 절대 권력자로 만들었나

 

이런 과정을 통해 개정된 헌법은 군부가 계획한 권력 이양의 가장 핵심을 이루는 제도적 장치로 작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며 미얀마 군부는 이때 개정된 ‘2008년도 헌법’을 근거로 들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2008년도 헌법’으로 인해 군사 쿠데타라는 비민주적 행위가 모순적이게도 합헌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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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 사령관.

 

‘2008년도 헌법’은 자유, 평등의 다당제 선거를 기반으로 의회 민주주의 채택하고, 삼권분립에 관해 규정하며, 무법 정치의 군부 정권에서 벗어나 법치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그 헌법에 명시된 민주적 조항의 이면에는 군부 정권에 의해 설계된 군부의 영향력 지속과 보호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중 가장 쟁점이 되는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 가장 많이 알려진 불합리한 조항 중 하나는 대통령 자격에 관한 것이다. 

 

59조(d)항에 따르면 대통령 입후보 자격 중 하나의 조건으로 “외국인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입후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조항의 표면적 취지는 외부 세력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은 국가의 원수가 될 수 없다는 취지이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은 사실 아웅산 수찌를 겨냥한 것으로 그녀가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그녀는 영국인과 결혼을 하였고, 두 자녀의 국적은 영국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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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찌(오른쪽)와 남편 아리스 교수, 첫 아들 알렉산더를 안은 수찌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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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아웅산 수찌를 대신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남편과 두 아들.

 

둘, 국회의 의원 구성에 관련된 조항들이다. 

 

우선 14조에 따라 연방 의회, 상원, 하원, 지역 의회 모든 수준의 의회에 최고 사령관이 임명하는 군부 대표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각 단위별 의회에 최소 25%의 군부 대표가 있어야 한다.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하원에는 110명, 상원에는 56명, 지역 의회에는 총 의석의 1/3을 군부 대표가 차지하도록 되어있다. 총선에서는 해당 의석수를 제외한 나머지 의석을 차지할 국회의원을 국민의 투표로 선출한다. 

 

군인들의 의석 차지는 단순히 입법권을 행사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종 입법안, 특히 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는 헌법 개정과 관련된 436조에 연관이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모든 헌법 개정안은 의결정족수인 재적 의원 75%의 찬성 득표를 얻어야 하고, 그중 국가의 기본 바탕, 국민 권리, 국가 권력 구조에 관련된 조항들은 국민 투표 절차까지 거쳐 개정안을 확정해야 한다. 

 

이 조항을 근거로 지난 2013년과 2020년에 두 차례 있었던 헌법 개정 시도는 대부분의 논쟁이 되는 개정안들이 의결정족수를 넘지 못하는 현실적 벽에 가로막혀 좌절되고 말았다. 

 

셋, 군부는 행정부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2008년도 헌법 20조’에 따라 땃마도(미얀마군의 공식 명칭)의 최고 사령관을 국군 통수권자로 규정을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민군관계를 규정하면서 대통령 혹은 국가의 원수를 군 통수권자로 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예로 들어봐도 74조에 정한 것처럼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미얀마의 군 통수권은 최고 사령관이 가지고 있다. 군 통수권을 민간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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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도심에 배치된 군인들. 미얀마 군부가 영장 없이 시민을 체포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도심에 장갑차를 동원하면서 시위대 강력 진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이미지 출처-<AP, 로이터 연합뉴스>

 

그리고 232조에 따라 최고 사령관은 국방부, 내무부, 국경부 세 개 부처의 장관을 임명할 수 있다. 국방부를 비롯해 내무부는 경찰력을 총괄하는 부처로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무력은 최고 사령관의 영향력 하에 있다. 

 

210조와 412조에는 국가안보회의 및 비상사태 선포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내용으로는 국가안보회의의 총 11명의 구성원 중 과반수인 6명을 최고 사령관이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비상사태 선포 시,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거치게끔 되어 있어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군부가 찬성하지 않으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없다. 대통령이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지 않더라도 군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싶은 경우, 헌법상 최고 사령관, 최고 부사령관, 국방부 장관, 내무부 장관만 동의하면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2008년도 헌법’ 하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그리하여 이 ‘2008년도 헌법’이란 이번 미얀마 군부의 비상식적 쿠데타마저 합헌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그들의 절대반지인 셈이다.

 

문기홍 (시드니대학교, 정부 및 국제관계학과 박사과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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