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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왜 활에 집착하는가'에 대해서, 한민족의 군사전략을 떼놓고 말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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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정착한 한민족은 군사적으로 상당한 핸디캡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 이건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전근대 시절, 그러니까 화약무기가 나오기 이전인 냉병기가 전장의 주력무기로 활용되던 시기의 군의 전력은 곧 ‘머릿수’와 비례한다. 즉,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하느냐가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숙련도나 전술 전략 등등은 논외로 하고, 1대 1의 단병접전을 위주로만 생각한다면 머릿수가 핵심이란 소리다. 아무리 뛰어난 전술을 사용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체급의 차이’를 극복하긴 어렵다.

 

한반도는 아슬아슬하게 벼농사 재배 한계선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만주에서도 벼농사를 했지만). 벼가 밀보다 훨씬 높은 인구 부양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한반도는 척박한 지역이다. 게다가 대부분이 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이 척박한 땅에 정착을 하게 됐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농사를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농사를 지은 걸 보면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동남아에서는 1년에 3~4번씩 벼농사를 짓는데, 한반도에서는 잘해봐야 2모작이니 생산성 자체가 다르다)

 

이러다 보니 인구를 늘리기가 어려웠다. 식량 생산이 곧 인구부양력의 핵심인데, 그 뿌리가 되는 식량부터가 부족했던 거다. 이러다 보니 한반도에 등장한 국가들은 언제나 ‘최소한의 상비군’만을 가지게 됐다. (고구려 말기의 호수가 69만 호였으니, 단순 계산으로 1호 당 5명 씩만 잡아도 345만이었다. 물론 이 호수에 대해선 재론의 여지가 있다. 백제 말기의 호수가 76만 호였던 걸 생각해보면, 신빙성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대략적으로 이 숫자 언저리에서 고구려 인구를 추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군대는 생산과는 거리가 먼, 아니, 생산이 아니라 오로지 소비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집단이다. 군대 병력이 빠져나간다는 건 사회적으로는 ‘생산인력’이 빠져나가는 것이고, 국가적으로는 ‘예산’의 증가다. 이 모든 것들의 총합은 "사회적 부담" 된다.

 

한민족 역사상 ‘이름’을 날린 고구려 시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고구려의 방위체계는 이후 한반도 전략전술의 기본이 됐으며, 고구려 이후 등장한 국가에도 상당부분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가 목숨을 걸고 차지하려 했던 땅이 요동이었다. 만주는 요수(遼水: 요하)를 경계로 요서와 요동땅으로 나뉜다. 여기서 요동 땅을 가지게 된 민족은 중국과 함께 만주를 반분(半分)하고, 북방의 패자로 자리 잡는다.

 

어째서 요동일까? 고구려에게 요동은 생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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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크게 3가지인데,

 

첫째, 천험의 방어선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기 246년 8월, 위나라의 침공 앞에서 고구려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관구검이 이끄는 위군에 맞서 동천왕은 초반 접전에 승리하였지만, 이후 위군의 방진에 밀려 그대로 1만 8천의 병력을 잃고 패퇴하게 된다. 바로 양맥곡 전투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요하를 넘어선 다음부터 고구려의 수도인 환도성까지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었다. '만주벌판'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요하만 건너면 전투 한두 번에 고구려의 수도까지 갈 수 있는 상황. 고구려로선 요동방어선을 확보하는 것이 곧 나라의 존망을 결정짓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둘째, 요동 방어선을 확보한 후에야 한반도에 눈을 돌릴 수 있다.

 

중원세력이 호시탐탐 북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내륙으로 눈을 돌릴 수 있을까? 북방전선에 중원세력이란 거대한 적을 놔두고 함부로 남방원정을 감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백제와 신라를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언제 발밑을 파고들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한반도 내에서의 일전을 위해서도 북방전선에 대한 안정은 필요했고, 이 북방전선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것이 바로 요동 방어선과 요하였다.

 

셋째, 고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필수적인 ‘철’의 생산이었다.

 

현도성 지역(지금의 무순)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철광산지였다. 철이란 곧 생산력을 배가시키는 철제 농기구를 의미하는 동시에 강력한 군사력을 뜻했다.

 

양맥곡 전투를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고구려가 만주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방어선’ 구축이었다. 물론, 대단위 병력을 구축해놓고 적을 요격하면 되겠지만, 만에 하나 이 병력이 패배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투 한두 번에 수도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다 보니 고구려는 목숨을 걸고 요동 방어선을 구축한다. 요동 방어선이 가장 강력하게 만들어진 시기가 631년부터 647년까지다. 교과서에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 바로 그 시기다.

 

이 시기 고구려는 신성-현도성-개모성-요동성-백암성-안시선-비사성으로 이어지는 일자 수비선을 축조해 놨다. (천리장성이라 해서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성을 연결해놓은 게 아니다. 각각의 성이 저마다를 지원하고, 적을 협격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시성의 경우는 북으로 백암성, 서쪽으로 건안성이 지켜주는 요충지로, 고구려 평양성으로 향하는 통로이자 이 지방의 철광을 지켜주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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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안시성 전투는 잘 알려져 있다(안시성 전투의 진위여부, 양만춘이란 존재의 실존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외로 치자). 그러나 여수대전, 여당대전 당시 고구려에게 가장 중요했던 성은 바로 요동성이었다.

 

요동 방어의 핵심이자, 고구려 일자 방어선의 중추가 바로 요동성이다. 이 성은 요동지방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떡하니 자리잡아 요동정벌의 첫 번째 타겟이 될 수밖에 없다. 즉, 이 성이 뚫리면 요동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이 열린다는 의미다.

 

문제는 일자방어선 상의 다른 고구려성, 예를 들면 신성, 백암성, 안시성들은 산성이었으나 요동성은 평지에 만들어졌다는 거다. 다른 고구려 성이 쌀과 화살만 있다면 끝까지 버틸 수 있다며 자신만만해 했지만, 평지성인 요동성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어쨌든 요동성은 고구려가 요동에 가진 성 중 최대의 성이자, 최대의 병력이 밀집돼 있고, 위기 시 제일 먼저 지원 병력을 보내는 곳이었다. (당태종이 645년 요동성을 침공할 당시 고구려는 바로 4만명의 지원 병력을 보내 구원하려 했다)

 

고구려로서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했기에 언제나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와 최대의 상비군이 준비돼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휴전선 경계를 서는 전방 철책사단과 그 2선에 있는 예비사단을 합쳐 놓은 것과 같은 중요 요충지란 소리다.

 

645년 5월, 이 요동성이 당태종에 의해 떨어진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게 당시 요동성의 고구려 병력이다. 기록을 보면, 성이 함락하는 와중에 사망자가 1만여 명 정도 발생했다. 이후 성이 함락되고 항복한 숫자를 보면,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했다고 나와 있다.

 

즉, 고구려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에 고구려가 배치할 수 있었던 상비군의 숫자가 최대 2만 명 수준이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비책은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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