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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쓰는 영어를 ‘필리핀 잉글리시(Philippines English)’라 부른다. 필리핀은 16세기부터 300년 이상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뒤이어 미국에 48년가량 식민 지배를 당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알래스카나 하와이처럼 한 주(州)로 만들어 자국의 영토화 하고 싶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필리핀은 아시아의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미국 정부는 스페인보다 훨씬 부드러운 정책으로 공들여 식민지를 일구었다.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영어를 집중적으로 보급했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정부에서 좋은 대우로 고용하는 등 영어교육 정책을 확장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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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식민지이던 이곳을 2차 대전 말미에 일본이 점령했다. 점령 기간은 약 3년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일본은 필리핀에 한국 못지않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철수하자 필리핀은 독립했다.

 

그러나 다른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처럼 필리핀 정부는 피폐해진 나라를 스스로 끌고 갈 힘이 없었다. 하여,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필리핀은 미국의 문화를 비롯한 교육과 정치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전에 미국으로부터 식민지 생활을 한 적이 있었고, 종전 후 점령군이 미군이었기 때문에 이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렇다 보니 일상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필리핀은 영어를 쓰기 싫어도 쓸 수밖에 없다

 

필리핀에는 ‘타갈로그어’라는 자국 표준어가 있다.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Luzon)섬 지방에서 사용하던 지역 언어를 필리핀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영어도 타갈로그어 못지않게 많이 사용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안내문이나 간판, 홍보용품 등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고 신문, 잡지를 비롯한 관청의 공문서도 타갈로그어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쓴다. 서점에 가보면 대부분의 잡지나 소설들이 영어로 발행되고, 영미권의 잡지나 책들은 원문 그대로 출판된다. 따라서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모르면 생활이 어렵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공용어’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건 자국어가 통일되어 한 가지 언어만 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국어가 통일되어있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생긴다.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의 대통령 궁에서 ‘세부 시청’으로 전화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떻겠는가? 통화가 안 된다. 마닐라에서 쓰는 말과 세부에서 쓰는 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스워 보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행정업무가 진행이 안 된다. 

 

기업의 경우, 마닐라의 본사가 세부에 있는 지사로 이메일이나 팩스로 업무 지시를 한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쓰는 언어로 쓰면 서로가 못 알아본다. 회사가 안 굴러간다.

 

가끔, 한국인들 중 ‘지역 언어’를 사투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방금 든 예를 ‘과장’이라 생각한다. ‘지역 언어’와 ‘사투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소위 말해서, “하나, 둘, 셋…. ” 등 헤아리는 것부터 사용하는 단어, 문법까지 다른 말을 사투리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투리처럼 억양과 명사 몇 개를 다르게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역 언어’는 다른 나라 말이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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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장에 대한 (위에서부터) 영어, 한국어, 타갈로그어, 비사야어, 스페인어 차이.

 

이렇게 지역 언어가 발달한 나라들은 전국에서 통하는 언어를 정해야 하는데, 그걸 ‘공용어(Official Language)’라고 부른다.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공문서나 기타 모든 문서는 영어로 작성하고 교과서도 영어로 만든다. 영어를 쓰기 싫어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필리핀은 섬이 많다 보니 지역 언어가 많이 발달했다. 내가 있는 세부만 해도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를 쓰는 사람은 없다. 세부(Cebu, Philippines)에서는 ‘비사야어’를 쓴다.

 

“비사야(Visaya)”는 필리핀의 중부지역을 말하는데, 두테르테가 시장으로 있었던 다바오가 속해 있는 민다나오(Mindanao)를 포함하여 광대한 지역에서 “비사야어”를 사용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사야 어’는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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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기본적으로 TV 방송이나 신문 등을 비롯하여 학생들의 교과서까지 모두 필리핀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로 만든다. 그런데도 현재 필리핀 국민의 타갈로그어 사용량은 약 60% 정도에 불과하다. 필리핀은 인구가 1억이 넘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40% 즉, 4천만 정도의 사람들이 표준어를 쓰지 않고 지역 언어를 쓴다는 뜻이다.

 

참고로, 세부에서 쓰는 ‘비사야어’는 전 국민의 약 30% 정도가 사용한다. 세부에는 ‘비사야 어’ 신문이 있고, TV나 라디오 방송도 ‘비사야 어’로 제작된다.

 

따라서 표준어인 ‘타갈로그어’는 세부에서 외국어처럼 받아들여진다. 당연히 마닐라에서는 '비사야어'가 외국어처럼 받아들여진다. 유럽의 나라들처럼 문자는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지만, 말이 다르니 서로 대화는 안 된다.

 

 

필리핀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하냐? 꼭 그런 건 아니다.

 

세부 어린이들은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족과 ‘비사야 어’로 이야기하고, 학교에 들어가면 ‘영어’와 ‘타갈로그어’로 된 교재로 수업을 받는다. 

 

집에 오면 TV나 방송이 모두 타갈로그어이니, 아이들은 비사야어로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타갈로그어 TV를 보는 것이다. 게다가 케이블에서 영화는 자막 없이 방영된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3개 언어를 동시에 배운다.

 

필리핀에는 우리나라와 개념이 조금 다른 국제학교와 사립학교들이 있다. 이 학교들은 영어로 수업을 한다. 상대적으로 공립학교들은 지역 언어로 수업하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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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한 국제학교의 모습.

 

대학의 경우는 대부분 영어로 수업을 하고 리포트나 시험도 영어로 치른다. 교수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서 지역 언어로 강의를 하는 교수도 있다고 하는데, 영어 수업을 기본으로 한다. 교수들도 영어로 공부를 했으니 영어 수업이 쉬울 것이다.

 

그럼 모든 필리핀 사람들이 다 영어를 잘하냐?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여행을 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필리핀 사람 중에는 영어를 못 하는 사람도 많다. 한국인은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하기 때문에 모국어를 잊어먹을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말은 안 쓰면 잊어버린다. 필리핀 사람의 경우 어릴 때부터 여러 종류의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지만, 성인이 되면 사용언어가 지역 언어로 한정된다. 그러니 실생활에 사용하지 않는 언어는 자연스럽게 잊어먹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평범한 세부(Cebu)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로 공부를 했으니 어릴 때는 당연히 영어를 잘했을 것이다. 그럼 졸업 후에는 어떻게 될까?

 

일상에서는 문서를 제외하면 대화는 모두 지역 언어로 한다. 아무래도 영어를 쓸 일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영어를 쓰지 않는 직장에서 3년 정도를 일했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의 상당 부분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결과는 비슷할 수밖에 없다.

 

영어로 된 영화나 책 혹은 신문, 인터넷 콘텐츠를 자주 보는 사람은 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려운 영어 단어에서부터 서서히 머릿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릴 때 배운 게 있으니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유창하게 쓰기는 어렵단 뜻이다. 이래서 필리핀 사람 중에 영어를 사용하지 않는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은 영어 실력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건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심하다.

 

 

‘필리핀 잉글리시’를 깎아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많이 사용되는 단어나 문장은 언어의 유행을 만든다. 필리핀 사람들도 자주 사용하는 영어단어와 문장들이 있다. 이것들이 필리핀 말과 조금씩 결합하면서 ‘필리핀 잉글리시’라는 것이 생겨났다.

 

언어가 바뀌는 것에는 발음도 크게 한몫한다. 필리핀 말에는 특유의 딱딱한 발음이 있는데, 이것이 영어 발음과 만나서 필리핀 잉글리시 특유의 발음이 생긴다.

 

'필리핀 잉글리시'는 현재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영어를 말한다. 일종의 영어 방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언어 변화는 영미권의 다른 나라들도 똑같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영국, 미국, 호주, 캐나다, 아일랜드, 남아공 등의 말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필리핀 잉글리시도 그런 맥락으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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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설픈 영어 사대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영국,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서 발달한 영어를 깎아내리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건 뭘 몰라서 그렇다.

 

그들은 말과 글을 헷갈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말’이 변한다고 ‘글’까지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대화에 사용되지만, 글은 교육과 기록 및 창작에 사용된다. 말에서 사용되는 발음이나 억양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지만 글로 된 콘텐츠들은 문법과 단어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국가에서는 기본적 언어 체계가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도 각 지역에서 사투리를 쓰지만, 글을 쓸 때는 사투리로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필리핀도 학교나 학원 같은 교육기관에서는 제대로 된 수준 높은 영어를 가르치고, 대학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기 때문에 영어 콘텐츠는 많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영어로 된 학문적 분야는 한국보다 필리핀이 훨씬 세계교류가 쉽다는 뜻이다.

 

필리핀에서 대학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영미권으로 진학을 할 때, 영어 수업에 대한 부담감은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필리핀 현지에서 발음이 안 좋거나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쓰는 영어를 보고 ‘필리핀 잉글리시’를 깎아내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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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대학 수업 모습.

 

한국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이 필리핀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소리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웃기는 건 실제로 ‘평범한 필리핀 사람’과 ‘영어 원어민’ 그리고 ‘한국 학생’ 이렇게 삼자가 대화를 하면 한국 학생들은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영어 원어민들 역시 한국 학생보다 필리핀 일반인들과의 대화를 훨씬 편해한다. 이건 내가 현장에서 많이 겪은 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필리핀 일반인“은 적어도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을 말한다.

 

필리핀에는 가난으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은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만 배우다가 멈춘다. 그들은 실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갈수록 영어 실력이 줄어들어 결국 영어로 대화가 어려워진다.

 

필리핀에 자유여행(배낭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은 공통으로 이런 말을 한다. 

 

“야!, 필리핀 어학연수 그거 미친 짓이야. 거리에서 사람들 만나봐 영어도 못 해. 발음도 이상하고 내 말도 못 알아들어.”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런 자유여행객들이 만나는 필리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마도 택시기사나 보트 맨 혹은 지프니 기사, 시장 상인, 술집 종업원 정도였을 것이다. 이들은 필리핀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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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의 쿠바오 파머스마켓(cubao farmer‘s market)

 

자기가 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밖에 없으니 모든 필리핀 사람이 “영어를 못한다.” 혹은, “영어를 이상하게 한다.”고 한다. 원래 인간은 자기가 본 것만 믿는다.

 

만약, 여행객이 필리핀의 대학생이나 학교 선생님, 사업가, 큰 회사의 셀러리맨, 공무원 등과 조금만 교류를 해도 그런 소리는 못 한다. 그들은 호텔 로비에서 만난 캐셔나 매니저, 벨보이에 대해서는 모두 잊고 있다. 큰 리조트의 경우 하우스키퍼(청소부)까지 모두 영어를 잘한다.

 

제대로 교육받고 성장한 필리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한다. 바꿔서 이야기하면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당연히 영어를 못한다. 이건 ‘공용어’로 영어를 쓰는 나라의 한계이다.

 

현지인들은 타갈로그어 책보다는 영어책을 많이 본다.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답은 이랬다. 

 

“어릴 때부터 영어로 된 책들만 접하다 보니 영어에 거부감이 없고, 인터넷에는 영어 콘텐츠가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굳이 타갈로그어 콘텐츠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지인 중에 컴퓨터를 전공한 공과대학교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쪽의 콘텐츠를 바로 흡수할 수 있는데 굳이 ‘타갈로그어’ 콘텐츠를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타갈로그어로 만드는 사람도 없어요.”

 

이러니 자연스럽게 필리핀어 콘텐츠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타갈로그어로 유튜브 콘텐츠를 찍었다고 생각해 보자. 필리핀 내에서도 루손(Luzon) 지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은 안 본다.

 

그럼 ‘비사야어’로 찍었다면? 필리핀 사람의 70%는 안 본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찍으면? 전 세계 몇십억의 인구에게 노출이 된다. 누가 영어가 되는데 자국어로 찍겠는가. 

 

 

필리핀의 또 다른 계급 기준 ‘언어’

 

여기서 잘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영어를 잘하고 영어 콘텐츠를 접할 기회도 늘어난다. 이것은 언어가 사회적 계급 문제로 연결된다는 뜻이다.

 

내가 필리핀 세부에 살면서 받았던 문화 충격 중 하나는 필리핀 상류층 사람들은 가족 간에도 지역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애들은 지역 언어를 쓰려고 하는데 부모들은 되도록 그걸 막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용 언어로 계층 구분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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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대표적 부촌 주의 하나인 락웰 지역. 마닐라에 위치한다.

 

경제적 귀족인 상류층에서는 자기들끼리 되도록 영어로 대화를 하려 하고, 아이들은 모두 ‘국제학교’급의 사립학교에서 교육한다. 대부분 아이는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면 영미권으로 유학을 하러 가고 웬만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는 그 정도 뒷바라지할 정도의 부는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용 언어가 계급 격차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필리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필리핀 상류층은 외국인들을 거지로 생각해. 그건 한국인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진짜 부잣집 애들, 특히 여자애들은 한국인 남자친구 생기면 부모들이 못 만나게 해. 거지들 집에 들이면 안 된다고.”

 

여행객들이나 잠깐 머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필리핀에는 외국인 특히, 한국인을 출입제한하는 공간이 있다. 대부분이 지저분하게 노는 한국인들 때문이지만, 그중에는 상류층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들이기 싫어서 막는 곳도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부(富)”가 계급을 나누는 상징이다. 필리핀도 자본주의 사회니 이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언어’라는 또 다른 계급의 기준이 있다. 이건 정권이 바뀌고 체제가 바뀐다고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템이 그렇게 굳어졌고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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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상류층의 주거형태는 거의 타운빌리지이다. 단지 안에 단독주택들이 모여있고 한 동네만 한 크기의 주택단지를 삼엄한 담장이 두르고 있다. 사설 경호원이 24시 보초를 서고 거주자가 아닌 경우 신원 확인을 해야 방문할 수 있다.

 

필리핀에서는 교육이 짧은 사람은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힘들다. 구조적으로 그렇다. 그러니 ‘공용어’ 시스템을 계속 가져가면 기득권자들은 그들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옛날 한국에서 양반들이 ‘한자’를 사용했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방식의 언어 사용은 상류계층이 문화적 귀족 생활을 유지하는 사회적 방어막을 형성하는 셈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고급과 하급의 언어를 구분하고, 하급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사회적 계급을 뛰어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된다.

 

나는 필리핀에서 영어를 잘하고 가난한 사람은 봤지만 부자가 영어를 못하는 경우는 못 봤다. 필리핀의 이런 언어 시스템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평범한 외국인인 나의 눈에는 필리핀은 미래가 없어 보인다. 

 

나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언어학자도 아니다. 그저 필리핀에 13년 넘게 평범한 이민자로 살면서 본 시스템에 대한 나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말이 아름답고 논리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말과 문자는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는 풍부한 형용사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드는 언어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또한 논리적으로 문장을 구성해서 학술 논문을 쓸 수 있는 언어도 그리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문학작품과 학술논문을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언어는 현재 지구상에 정말 별로 없다.

 

21세기가 되면서 인터넷 문화 콘텐츠의 발달과 함께 ‘우리 말과 글’은 이미 우수한 언어로 세계 속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우리말은 영원히 강건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나는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말을 자랑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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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벼랑끝의 시 낭송

 

글을 마치며 몇 개의 문구가 떠올라 적는다. 

 

이런 문장들을 우리 고유의 말과 글로 읽고 쓸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너무도 기쁘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만해 한용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끝~!

 

 
Profile
"Sometimes I think I'm fighting for a life I ain't got time to live"
- Dallas Buyers Club, 2013.
가끔은 살려고 애쓰다가 정작 삶을 누릴 시간이 없는 거 같다.
-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2013...